소설리스트

레벨업 이단심판관-215화 (215/227)

215화 최후의 격전지 (4)

끄아아악!

커다란 지하실 내부에 끔찍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시에 숨어 마법진을 유지하고 있던 이단마법사 무리는 갑자기 난입해 온 에일에게 꼼짝없이 붙잡혔다.

이런저런 신체 부위들이 뒹굴며 핏자국이 낭자했다.

강제로 독을 마시게 된 이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어 갔고, 작살에 꿰인 자들은 이미 목숨이 끊겨 벽에 걸린 채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중이었다.

화르르륵!

활활 타오르는 십자가.

묶여 있던 죄수는 이미 새까맣게 타들어 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서 있던 에일은 뺨에 묻은 핏자국을 슥 닦아 냈다.

‘지금 기분 내고 있을 때가 아니지…….’

흠칫 정신을 차린 에일이 고개를 돌렸다.

죄인들에게 주어진 합당한 형벌은 모두 집행을 마친 뒤였다.

그러자 그는 바닥에 커다랗게 그려져 있는 마법진의 한가운데로 다가섰다.

복잡해 보이는 마법진의 중심엔 검은 마석 하나가 놓여 둥둥 떠 있었다.

검은빛의 마력을 풀풀 풍기고 있는 이 마석의 정체는 이단마법사들의 마력을 유지하고 증폭시켜 주는 물건이었다.

대규모 마법을 안정적으로 유지시키기 위해 필수적인 장치였다.

마력을 공급하던 마법사들이 모두 쓰러졌음에도 유지가 되고 있는 것도 이 마석 덕이었다.

카아앙!

장검을 번쩍 들어 올린 에일이 마석을 내리쳤다.

강한 충격에 마석은 반으로 두 동강 났고 마법진을 유지하던 마력도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자 작동하고 있던 마법진은 서서히 빛을 잃었다.

쿠구구궁!

지하실이 크게 흔들리며 지저분하게 바닥에 그려져 있던 마법진은 증발하듯 말끔히 사라졌다.

에일이 지하실을 빠져나와 바깥으로 나가자 굳건하던 결계에 미세한 금이 간 것이 하늘 위로 보였다.

“저 정도 균열이면… 대강 다섯 곳 정도 치워 버리면 파괴되려나.”

“아니, 아마 그것만으론 부족할 거다.”

“그럼 좀 더 서둘러야겠네요.”

들려오는 루의 목소리에 에일은 곧장 움직였다.

한시가 급한 시간 싸움인 만큼 지체되는 일 없이 이동해야 했다.

한쪽 화면엔 지도를 켜 둔 채 다음 의심 지점들을 체크했다.

“조심……!”

그때 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번쩍 정신을 차린 에일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무언가를 겨우 느낄 수 있었다.

콰아아앙!

에일이 서 있던 자리에 커다란 충격과 함께 폭발이 일어났다.

겨우 뒤로 물러서 공격을 피한 에일은 흙먼지 속에서 눈가를 찌푸렸다.

아무리 지도를 살펴보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저런 규모의 일격임에도 거의 직전까지 눈치를 채지 못했다.

루가 곧장 말해 주지 않았으면 제대로 피하지 못해 반쯤은 휘말렸을 것이다.

쿠웅!

건물 위에서 뛰어내리며 나타난 남자.

그는 어깨에 비스듬히 창을 진 채 에일을 응시했다.

“도시를 휘젓고 다니도록 가만 둘 수야 없지.”

“유, 유론……?”

상대의 얼굴을 알아본 에일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6대 길드인 켈베로스의 길드장, 유론.

한때 워로드를 대표하던 여섯의 플레이어 중 하나였던 그가 이 자리에 와있을 줄은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도시까지 직접 찾아온 이유라면 뻔하겠지…….’

에일은 이미 그가 알키오네의 창립 멤버이자 최고 간부 출신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리사에게 들은 바 있었다.

철십자와 대립하던 것은 물론 아폴리온 길드와 은밀히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유론이라면 당연히 에일과 적대 관계에 놓여 있었다.

먼저 결사단의 이단마법사들을 찾아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에일은 큰 골칫덩이였고 그렇기에 그를 확실하게 처리하러 유론이 직접 나선 것이다.

‘6대 길드장들이라면 여러 번 봐 오긴 했지만… 벌써부터 이런 식으로 서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장검을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설마 전장 한복판에서 6대 길드장을 적수로 마주하게 될 줄이야.

워로드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목표를 크게 잡았던 에일이었지만 그런 그조차 유론과 이렇게 마주하고 있을 거라곤 떠올려 본 적도 없는 상황이었다.

가상현실에 접속조차 하지 못하고 끙끙대고 있을 때조차 유론에 대한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어왔던 그였다.

‘후.’

잠시 묘한 기분에 휩싸인 에일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

상대는 1년 넘게 최고의 위치에서 활동을 해 왔던 만큼 기본적인 정보들 쯤이야 이미 알려져 있었다.

‘우선 그냥 보내 줄 리는 없을 테고… 지금 시점에서 유론의 랭킹은 9위. 알키오네의 창립 멤버 출신 중에선 유일하게 아무런 변동 없이 뒷자리로 밀려났어. 아직 숨겨 둔 실력을 안 꺼내고 있는 건가?’

에일은 유론을 앞에 두고도 쉽게 확신을 내리지 못했다.

이번 변동이 오기 전에도 유론은 이미 전체 랭킹 5위라는 한참 높았던 순위를 지니고 있었고, 아폴리온의 최고 간부들의 상승으로 4단계 밀려난 순위조차 9위에 달했다.

“이봐, 싸우기도 전부터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는데.”

에일의 표정을 읽은 유론이 피식 웃었다.

“1년도 넘게 랭킹이 안 오르도록 실력을 숨기라니… 난 그런 짓 답답해서 못하거든.”

유론은 분명 아르메니아 온라인의 양대 명문 길드, 워로드의 6대 길드를 맡을 만큼 뛰어난 실력자였다.

하지만 알키오네의 창립 멤버들 사이에선 가장 말석이었고 자존심 강한 유론도 그 사실을 인정하며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직접 몸을 담고 있는 그가 봐도 당시에 모인 일곱 명은 괴물들이었다.

무엇보다 그 일곱 명 사이에서도 완전히 다른 차원의 실력자가 둘이나 존재한다는 걸 알고 난 뒤에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다행이네.”

“그렇다고 나를 만만하게 보면 곤란한데.”

씨익 웃은 유론이 창을 바닥에 찍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그와 싸우기에 앞서 궁금한 점이 있었다.

“그런데 너, 다고스한테 직접 제안을 받지 않았어?”

“그게 왜?”

“그때야 몰랐다고 쳐도 뒤늦게 우리에 대해 들었을 때 마음을 바꿔 먹으면 되는 거 아니었나? 굳이 이 고생을 사서 하면서 우리와 맞서는 이유가 뭐지? 돈이든 명성이든 비교도 안될 만큼 이쪽 길이 빠르고 큰 보상으로 돌아온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텐데.”

창에 기댄 유론이 그를 향해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러자 잠시 생각하던 에일은 간단히 답했다.

“이미 다른 쪽하고 거래를 해둬서 말이야. 뭣보다 너희가 하는 짓이 마음에 안 들거든.”

“아, 설마 그런 이유 때문인가? 우리가 유저들을 착취한다거나 죄 없는 시민 NPC들을 학살하고 제물로 바친다거나 뭐 이런 게 싫어서?”

유론이 재밌다는 듯 너털웃음을 흘렸다.

“게임인데 뭐 어때. 죽어 나가는 게 진짜 목숨도 아니잖아? 먼저 자유도를 내세우면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게 워로드고, 우린 그 길 중 하나를 선택한 것뿐이야. 유저라고 악역을 맡으면 안 되는 법이라도 있나?”

“그래, 그렇게 한다고 해서 외적으로 문제가 될 건 없겠지. 굳이 그렇게 플레이한다는 걸 딱히 뭐라고 할 생각도 없어.”

“그러면 왜……?”

“그러니까 그냥 마음에 안 든다는 거야.”

에일의 답은 여전히 간단했다.

교단과 루를 배신하고 싶지 않은 것과 아폴리온을 적대하며 막아서려는 것도 순전히 자신의 마음이었다.

그가 처음에 세웠던 목표대로 단순히 높은 랭킹과 성공만을 따진다면 가장 유력한 세력인 아폴리온에 합류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고, 어째서인지 자신도 정확히는 알지 못했다.

단지 아폴리온이 악역으로서 실리의 길을 택한 것처럼 그들을 막아선다는 것도 에일이 택한 것일 뿐이었다.

“아하… 그렇단 말이지. 그냥 내 머리로는 이해가 잘 안가서 한 번쯤 물어보고 싶었어. 이스트혼에서도 꼭 너 같은 녀석들이 가끔씩 나타나 우릴 방해해 왔거든. 물론 결말은 모두 시시하게 똑같았지만!”

터엉!

먼저 땅을 박찬 유론이 순식간에 코앞까지 다가왔다.

다급히 동조율을 한껏 끌어올린 에일은 장검을 들어 유론의 창을 받아쳤다.

쩌엉!

묵직한 무게감과 떨림이 손을 타고 전해졌다.

상대가 돌진기로 거리를 좁혀든 탓에 더욱 큰 충격을 받았고 정면에서 받아친 것만으로 체력이 조금 떨어졌을 정도였다.

거기다 유론은 순식간에 축을 돌리며 변칙적인 공격을 이어서 가해 왔다.

긴 거리의 돌진기를 사용한 뒤에는 동작에 딜레이가 걸리기 마련이었는데 유론의 움직임은 아예 그런 제약을 무시하는 것 같았다.

“방금은 제법 만족스러운 답변이었어!”

카가가각!

능글맞게 웃어 보인 유론은 엄청난 공세를 퍼부었다.

마치 빈틈을 보이지 않는다면 강제로라도 만들어 끄집어내 주겠다고 말하는 것 같은 노골적인 움직임이었다.

오로지 방어에 전념하는 상황인데도 큰 빈틈을 내어 주지 않는 것만으로 벅찰 지경이었다.

‘큭… 역시 실력만큼은 진짜잖아.’

인상을 찌푸린 에일이 주르륵 밀려났다.

한때 5위에 달했던 유론의 랭킹이 현재 9위라고는 해도 그의 실력이 조금이라도 떨어진 것은 전혀 아니었다.

단지 아폴리온의 최고 간부 네 명이 일제히 치고 올라왔을 뿐이었다.

그의 실력은 여전히 워로드를 대표하던 6대 길드장으로서의 수준 그대로였다.

에일도 이 정도 상대와 직접 싸워 본 것은 처음이었고 잠깐 검을 맞댄 것만으로도 격이 다른 게 느껴졌다.

‘아무리 봐도 전력을 아낄 때가 아닌데… 아까워할 것 없이 전설 스킬을 꺼내야 하나?’

급박한 상황 속에서 에일이 격하게 갈등했다.

그동안 유론이 쌓아 온 스펙과 실력, 경험은 뭐 하나 빠질 것 없이 최고 수준이었다.

아무리 에일이 최근 스펙을 끌어올렸다 해도 6대 길드장 급과 비교하면 크게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나마 버티고 있는 것도 신격들이 부여한 각종 버프들 덕이었다.

하지만 만약 전설 등급 스킬인 ‘여신의 가호’를 사용한다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을지도 몰랐다.

다만 여신의 가호 스킬은 쿨타임이 무려 6시간이나 되는 만큼 이런 상황일수록 더더욱 아끼고 싶은 수였다.

한 번 사용하면 이번 사건이 모두 끝날 때까지 사용할 수 없을지 몰랐다.

콰아아앙!

뻗어진 유론의 광역 스킬에 에일은 위태롭게 밀려났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가장 좋은 수는 굳이 싸울 필요 없이 그를 적당히 따돌리고 결계를 치고 있는 결사단원들부터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유론의 실력으로 보아 지금 상태에서 그를 따돌리기엔 어림도 없었다.

주변을 열심히 둘러봐도 딱히 유론을 떨어뜨릴 수 있을 만한 변수가 보이지 않았다.

“고작 이 정도냐! 요즘 하이 랭커 수준은 이거밖에 안 되냐고!”

‘큭…….’

매섭게 몰아붙이는 유론의 창에 에일은 점점 구석으로 몰리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당해 버리고 말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에일의 시선은 여신의 가호 스킬로 향했다.

카앙!

“뭣……!”

하지만 그 순간 어디선가 난입한 남자의 단검이 유론을 노렸다.

아무런 기척도 없이 나타난 불청객의 등장에 유론조차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단검은 겨우 막아 냈지만 그 후속타로 들어오는 발차기에 그대로 당해 튕겨 나갔다.

콰아앙!

나가떨어진 유론이 벽에 박힌 사이 고개를 돌린 네슈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두 명이면 충분하겠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