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최후의 격전지 (2)
[이단을 처단하였습니다!]
화르르륵!
십자가에 묶인 악마가 정화의 불길 속에서 타올랐다.
악마의 하수인을 태운 것은 에일.
이단의 낙인이 찍혀 있는 녀석을 불태움으로써 화형 보너스인 공격력 버프를 챙겼다.
‘완전히 난장판이네.’
고개를 돌릴 필요도 없이 비명 소리와 굉음이 쉴 새 없이 오갔다.
여기가 평범한 사냥터 지역이었다면 낙인이 찍힌 스탯, 경험치 덩어리들이 돌아다닌다며 좋아했을 것이다.
하지만 도시의 상황은 심각했다.
구별 없이 마구잡이로 공격하는 악마의 추종자들에게 철십자와 아무 관련이 없는 대다수의 일반 유저들은 물론이거니와 평화로운 삶을 살던 주민들도 여지없이 희생당하는 중이었다.
역시나 아폴리온은 이야기가 밖으로 새어 나가는 일 없도록 모든 이들을 몰살할 생각이었다.
아예 이곳을 희생양 삼으려는 것이었다.
‘어차피 유저들은 죽여도 이틀이면 부활해. 하지만 뭔가 수작을 부려 놨겠지.’
재빨리 화면을 확인한 에일의 시선이 돌아갔다.
현재 도시는 결계 탓에 출입이 불가능한 상황.
바깥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확인해 보니 이번 일이 터지기 바로 직전에 왕가에서 벨하벤에 통행금지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반역을 꿈꾸던 악마 추종자들의 대규모 움직임이 발견되었다는 이유에서였다.
교묘하게 사실과 거짓을 섞어 놓은 명분.
왕가 전체가 아폴리온에게 장악당해 놀아나고 있는 상태라는 걸 감안하면 어떤 의도로 내린 왕명인지는 뻔했다.
‘어차피 모험가인 유저들만의 목소리로는 설득력이 부족해. 목격자인 NPC들만 모조리 죽이면 뭐라 떠들건 대응조차 하지 않고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고. 왕가를 차지한 이상 가장 중요한 건 세이아의 생사 여부니까.’
단지 중소 규모 거점이라면 모를까.
이만한 대도시를 통째로 지워 버리려는 시도는 오픈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가상현실의 특성상 아무리 게임이라 해도 지나친 잔혹 행위는 반감을 사기 마련이었다.
더군다나 해당 도시 주변에 자리를 잡았을 수많은 유저의 반발 탓에 세력의 힘과는 별개로 모두가 시도할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다.
하나 지금은 다시 되살아 날 유저들조차 구별하지 않고 학살 중이었다.
그동안 아폴리온이 해 오던 이미지 관리는 알키오네라는 정체가 드러난 순간부터 의미가 없어졌다.
‘하지만 설마 이 정도로 막 나갈 줄은…….’
악마의 하수인을 소환하는 데엔 수많은 희생자의 영혼이 필요했다.
이만한 균열을 열기 위해서라면 이미 지금껏 다른 곳에서 무고한 NPC들을 상대로 수많은 학살을 저질렀을 것이다.
이번 사건 역시 아폴리온의 입장에서는 단지 공주를 처리하는 과정 겸 제물이 될 영혼을 모으는 과정 정도로 여길 터였다.
“여신님?”
“…….”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루의 모습.
도시에 벌어지고 있는 참담한 광경에 루는 차마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워로드가 게임 속이라는 걸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AI라고는 해도 큰 차이가 있지는 않았다.
지금의 그녀에겐 이곳이 유일한 세상이었고, 평소 내세우던 정의와도 정면으로 충돌되는 아폴리온 길드의 행적이었다.
한번 악의를 가진 유저는 그 어떤 악의 조직보다도 무서울 수 있다는 것.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는 중이었다.
“반드시 막아야 해.”
“그거야 당연하죠.”
콰악!
에일이 하수인의 몸에 꽂혀 있던 검을 뽑았다.
* * *
균열에서 직접 모습을 드러낸 건 악마의 하수인들이었다.
최소 준보스급 몬스터부터 시작인 악마의 하수인들 특성상 개체 수가 아주 많이 쏟아져 나올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하수인들이 또 다른 몬스터들을 소환했고, 수많은 마수가 도시에 풀려났다.
키이이익!
놈들은 거리를 장악해 사람들을 공격하고 시설을 파괴했다.
철십자 길드가 빠르게 대처에 나서기는 했지만 드넓은 도시 전역을 모두 방어해 내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콰아아아!
커다란 성화의 파도가 거리를 휩쓸었다.
그러자 거리를 가득 메우던 마수들이 모조리 휩쓸려 사라졌다.
불의 세례 한 방에 정리된 거리.
새까맣게 그을린 바닥을 박차며 에일은 발걸음을 서둘렀다.
‘저건… 불카모스의 하수인인가.’
멀리서 거리를 지나가는 거대한 거인의 모습을 보며 에일이 생각했다.
심지어 아폴리온이 손을 잡은 악마는 한둘 정도가 아니었다.
워로드에 존재하는 모든 악마의 하수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처음 빛의 교단과 적대하며 루에게 완전 소멸된 베나론을 제외하면 전부 포함되어 있었다.
하수인과 마수들은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앞길을 막아섰다.
콰과광!
건물 한 면이 완전히 박살 나며 무너져 내렸다.
악마의 하수인이 휘두른 거대한 도끼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런.”
이단의 낙인이 찍혀 있는 하수인뿐만 아니라 상당히 많은 숫자의 마수들이 등장했다.
그 탓에 바삐 재촉하던 에일의 발걸음마저 잠시 멈추게 되었다.
신전으로 향하는 중요한 길목을 막아서고 있어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놈들을 모두 해치우자니 시간이 지나치게 잡아먹힐 게 뻔했다.
‘너무 시간이 끌리면 곤란한데…….’
에일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갔다.
갑자기 생겨난 균열과 악마들의 습격으로 큰 피해를 보고 있는 건 맞았다.
하나 지금 상황에서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몬스터들이 아니었다.
눈앞에 보이는 건 무작정 때려 부수는 녀석들보단 도시 속에 숨어든 아폴리온 측 랭커들이 가장 큰 위협이었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 갑자기 나타날지 알 수 없었다.
거기다 이번 사건의 핵심인 공주를 집중적으로 노리고 있을 터였으니 그들을 가장 먼저 처리해야 위협을 최대한 줄일 수 있었다.
콰아아앙!
그 순간 마수 떼의 한가운데에 거대한 운석이 떨어지며 폭발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방금 사용된 유성우를 비롯한 대형 마법이 연이어 쏟아지며 마수들을 모조리 휩쓸어 버렸다.
어디선가 많이 봐 온 익숙한 광경에 에일의 시선이 돌아갔다.
“에일 님!”
왼편의 건물 옥상에서 나타난 리아와 로덴.
습격이 발생하자 곧장 전투에 가담한 그들이었고, 우연히 같은 자리에 도달한 것이었다.
“여긴 저희가 맡을 테니 먼저 가세요!”
“감사합니다!”
든든한 지원군의 등장에 에일은 단숨에 정면으로 달려나갔다.
폭음에 몰려드는 마수들을 포함해 여전히 많은 숫자의 몬스터가 남아 있었지만 자리에 나타난 게 그들이라면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느닷없이 정면으로 달려드는 에일의 돌진에 마수들은 반사적으로 그를 공격하려 달려들었다.
퍼엉!
하지만 그 순간 뒤편에서 날아든 여러 갈래의 마법들이 놈들을 하나하나 요격했다.
에일은 가만히 앞으로 달리기만 하는데도 길이 저절로 뚫리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특히 가장 위협적인 ‘하수인’의 경우 발밑이 꽁꽁 얼어붙게 만들며 움직임을 일시적으로 봉쇄시켰다.
엄청난 정확도와 빠른 캐스팅.
그리고 아무런 지시도 없이 스스로 내린 발 빠른 판단으로 에일의 길을 뚫어 주었다.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리아의 모습.
엘트리스에서의 고된 경험이 일궈 낸 그녀의 눈부신 성장이었고, 옅은 미소를 지은 에일은 그대로 거리를 돌파했다.
* * *
“막아라!”
“이단을 정화해!”
고성이 울려 퍼지는 전장.
벨하벤의 빛의 신전에선 도시의 다른 어떤 곳보다도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몰려드는 악마 종자들의 무리.
그에 맞서는 교단의 병력이 충돌하며 선혈이 낭자했다.
“성수를 뿌려라! 불꽃을 끼얹어!”
키이이익!
불꽃에 휘감긴 마수들이 발버둥 치며 죽어 갔다.
계속해서 몰려드는 마수의 무리 탓에 상당한 숫자가 차이가 있음에도 신전은 놀랍도록 잘 버텨 내는 중이었다.
갑자기 통행이 차단된 탓에 악마의 천적인 이단심판관들이 도시 안에 없는 건 아쉽지만 신성력 지닌 사제와 성기사들도 상성상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광기가 섞인 정신 무장 덕에 허둥지둥거릴 일도 없었다.
결코 악마 무리 따위에게 호락호락 당해 줄 만한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몬스터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그사이.
은신을 통해 신전 내부로 몰래 잠입한 침입자가 하나 있었다.
“미끼 역할 하나는 잘해 주는군.”
복면을 내린 남자가 그림자 속에서 나타났다.
신전에 잠입한 그의 정체는 공식 랭킹 208위의 네임드 플레이어, 아이드.
도적 직업을 지닌 아폴리온 소속의 랭커였다.
역시나 아폴리온의 입장에서 가장 먼저 노려야 할 표적은 다름 아닌 세이아 공주의 목숨이었다.
도시 하나를 통째로 함락시킨다거나 철십자의 길드장 시르의 목숨은 그에 비하면 단지 보너스 정도일 뿐이었다.
그 때문에 그가 공주가 치료를 받고 있던 이 신전부터 찾아가는 것은 당연했다.
스륵!
복도에서 들려오는 바쁜 발걸음과 갑옷 소리에 아이드는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교단의 사제라면 모를까 성기사는 중갑옷을 두른 데다가 치유와 방어 능력에 집중적으로 투자한 클래스였다.
당연히 쓰러뜨리는 데에는 비교적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귀찮게 놈들을 모두 일일이 상대해 줄 시간이 없었다.
‘이쪽이군.’
높은 등급의 은신 스킬 덕에 둔한 NPC들을 모두 따돌리는 건 간단한 일이었다.
공주가 있는 방의 위치라면 이미 전달받은 바.
단숨에 그곳까지 움직였고 방문 앞을 지키고 있는 두 성기사를 마주했다.
콰득!
“으윽!”
그림자 속에서 나타난 아이드는 반응할 셈도 없이 연계 스킬을 쏟아부었고 그들을 단숨에 기절시킨 뒤 내던졌다.
콰앙!
그리곤 곧장 문을 발로 차며 내부로 진입했다.
세이아 공주를 보호하고 있을 수많은 성기사.
그들이 안에서 반겨 줄 건 당연했고 아이드는 단신으로 모조리 쓰러뜨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가 마주한 것은 텅 빈 방이었다.
“무슨……?”
공주가 있어야 할 자리였지만 그녀의 흔적은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급하게 달아난 것이라고 보기에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으니 당혹감을 느꼈다.
빠악!
“컥……!”
둔탁한 소리와 함께 아이드가 나가떨어졌다.
겨우 정신 차리며 일어난 아이드의 시선엔 어느새 뒤편에서 나타난 에일이 서 있었다.
“설마 네가…….”
그제야 그는 상황을 파악했다.
방심하고 있을 거란 처음 예상과는 달리 습격이 일어나기 전에 공주를 미리 다른 장소로 빼돌려 놓은 것이었다.
아폴리온이 수작을 부리는 동안 그들도 놀고만 있던 것이 아니었다.
스릉!
에일은 뽑아 든 장검을 그에게 겨누었다.
“우선 첫 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