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최후의 격전지
“네가 여기엔 왜 나타난 거지?”
루의 물음이 알타리엘에게 향했다.
느닷없는 신격의 등장에 경계하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사실 궁금하기는 에일도 마찬가지였다.
바람의 신 알타리엘은 여러모로 다른 신격들과는 달랐다.
외부인들은 물론 자신의 신도들에게조차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신격이었다.
그 흔한 명령 하나 내리지 않는 철저한 자유방임주의.
절대 소속을 가지지 못하거나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는 ‘방랑’의 페널티만 제외하면 신격이 월드 퀘스트를 부여하거나 따로 요구하는 점도 없었기에 비교적 부담이 덜한 교단에 속했다.
유저들의 평이나 에일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가장 별난 신이었다.
“그동안 즐겁게 지켜보고 있었다. 꽤나 인상 깊은 행적이더군.”
하얀 매가 어깨 위에서 입을 열었다.
빛의 여신인 루가 뭐라 하건 상관 않는다는 듯이 그의 시선은 오로지 에일에게만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갑자기 찾아오신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가벼운 변덕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건 무슨…….”
“신격들이 성물을 모으는 이유가 궁금하다고 했지?”
“알타리엘, 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발끈한 루가 팔을 뻗었다.
그러자 눈부신 빛이 알타리엘을 감쌌다.
파아아앗!
신격을 추방하는 강력한 힘에 공간이 얕게 일그러졌다.
사도와 직접적으로 계약된 관계인만큼 그에 관한 주도권은 언제나 그녀가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상황에서 절대적으로 통하는 사실은 아니었다.
스르륵.
어느 순간 빛이 힘을 잃고 사라졌고, 새하얀 매 또한 그대로 에일에게 올라타 있었다.
“그런 것에 얽매일 내가 아니지. 너도 알고 있을 텐데.”
“…….”
추방이 실패하자 루의 표정이 구겨졌다.
하지만 실패했다는 사실에 당황했다기보단 이렇게 될 줄 처음부터 예상한 듯한 모습이었다.
스스로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 대상의 문제.
아무리 루가 계약 관계 속 우선순위로 우위에 서 있다 해도 신격들이 지닌 각자의 고유 특성을 넘을 순 없었다.
그러자 재빨리 상황을 파악한 에일은 다가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말해 줄 수 있는 겁니까?”
“음, 물론이고말고.”
매의 모습을 한 알타리엘은 부담스러울 만큼 성큼 다가왔다.
그리곤 에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알고 있겠지만 성물의 파편만으로는 별다른 효과가 없다. 기껏해야 영향력을 올려주는 게 전부라고 봐도 좋을 정도거든. 하지만 네 가지 핵심 파편이 모두 모여 완성된 성물은 다르다. 신격들의 소망을 들어줄 수 있는 아티팩트는 오직 그것 하나뿐이니까.”
“소, 소망……?”
당황스러운 단어에 에일이 반응했다.
무슨 칠성구도 아니고 워로드에서 소원을 들어주는 아티팩트 같은 게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물론 그런 내용의 소문이나 전설 같은 게 게임 내에 여럿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들 모두가 헛소문이거나 다른 효과의 아이템일 뿐이었다.
하물며 그 대상도 유저가 아닌 워로드의 관리자 AI 역까지 겸한 신격의 소망이라니.
“물론 바라는 건 뭐든지 이루어 주는 그런 방식의 물건은 아니다. 가능한 범주 내에서 몇 가지 선택지가 존재하지.”
“선택지라는 게 어떤 거죠?”
“다른 신격과의 경쟁에서 더욱 확고한 위치에 설지 아니면 신격을 얽매고 있는 몇 가지 제약을 없앨지. 택할 수 있는 선택지야 여러 가지다. 하지만 너희 빛의 여신이 원하는 건 분명…….”
“잠깐, 그만……!”
당황한 루가 그를 막아서려 했다.
하지만 알타리엘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자유다.”
“자유……?”
“단순히 제약을 풀어낸다는 것과는 꽤나 다른 느낌이다. 어찌 보면 굴레를 끊는 해방이고 모든 것의 끝이기도 하지.”
“도통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갑니다.”
“거기까지 말하면 이야기가 재미없어질 것 같구나.”
알타리엘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사람도 아닌 매가 저런 표정을 지으니 참 묘한 느낌을 주었다.
어찌 됐건 알타리엘은 더 이상 말할 생각 없는 듯 입을 다물었고, 루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성물을 모으는 건 알타리엘 님도 가능했던 것 아닌가요? 자유의 신이라면서 그쪽엔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데요.”
“고작 그런 장난감 따위에 얽매이는 건 진정한 자유가 아니지. 너저분한 경쟁은 여섯 신격으로도 충분하다. 자고로 진짜 자유란 집착하지 않고 포기할수록 얻어지는 것이거든. 물론 성물이 준다는 자유까지 진정한 자유라고 하는 게 맞을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여전히 영문 모를 소리만 늘어놓는 알타리엘의 말은 그 뒤로도 계속되었다.
“소망에 따라 다른 파편을 모으는 만큼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루가 바라는 건 핵심 성물 네 조각만으로도 충분하다. 신격의 소망을 이뤄 준다면 너에게도 시스템상 큰 보상이 돌아갈 테니 참고는 해 두거라.”
“이봐, 비둘기. 대체 언제까지 수다를 떨고 있을 셈이지?”
“에일.”
옆에서 끼어드는 루를 무시한 채 에일을 바라보았다.
“시스템의 제약이 덜한 나는 가장 많은 걸 볼 수 있다. 너의 대적자가 벌이는 일들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아. 반면 최초의 사도인 너를 바라보는 것도 꽤나 즐거운 일이었지. 그랬기에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자유로운 방랑자’가 당신을 후원하였습니다!]
[공용 교단 공헌도 +15,000]
[알타리엘의 축복 ‘바람의 길’이 당신의 몸을 휘감습니다!]
[24시간 동안 이동속도가 5% 상승합니다!]
“내가 지금 줄 수 있는 건 이것뿐이다. 미약한 수준이지만 제약에서 자유로운 만큼 개입 면에선 여의치 않은 탓이니 이해하거라.”
“어째서……?”
놀란 에일의 얼굴에 의문이 가득 품어졌다.
알타리엘은 아직까지 자기 신도들에게도 후원을 한 적이 없는 신격이었다.
한데 그의 신도도 아닌 자신에게 갑자기 이런 커다란 후원을 주는 것이 이해가지 않았다.
그리고 놀란 것은 루 역시 마찬가지였다.
“너…….”
“착각은 말거라. 내 영향력을 소모한 게 단지 너희를 밀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니까. 상황이 지금처럼 흘러가면 편안히 지내려던 내 입장도 곤란해진단 말이지.”
화아아악!
알타리엘이 크게 날개를 펄럭이자 바람이 일었다.
골목을 가득 채우는 돌풍과 함께 알타리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가 사라진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목소리가 맴돌았다.
“신격을 깨운 사도, 사도를 구한 신격. 우연으로 시작된 둘의 인연이지만 그 끝이 어떻게 될지는 즐거이 지켜보마.”
* * *
‘역시 굉장히 이상한 신격이었어.’
골목을 걷던 에일이 조금 전의 일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알타리엘과의 예기치 않은 만남이 끝난 뒤에도 그는 도시를 돌아다니며 점검을 진행했다.
그중 이번이 마지막 골목길을 체크하는 과정이었다.
그러자 에일은 이제 이쪽 일을 끝내면 무엇을 할지 곰곰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굉장히 일정이 애매해진 상황이라 그로선 익숙지 않았다.
“무얼 그리 생각하느냐?”
옆에서 들려온 소리가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직접 눈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루가 지켜보고 있는 것이었다.
“이 주변엔 고레벨 사냥터가 꽤 멀리 떨어져 있어서요. 거기까지 나가서 사냥을 하고 있기에도 애매하네요.”
“그러지 말고 쉬고 있지 그러느냐?”
“그냥 쉬라고요?”
“그래, 가끔은 마음 편히 쉬는 것도 필요한 법이다. 인간이든 신격이든 말이지.”
‘그런가……?’
루의 말에 에일의 고개가 갸웃 돌아갔다.
그동안 랭커들을 따라잡기 위해 정말 정신없이 달려온 에일이었다.
식사할 시간조차도 최대한 아꼈으니 사냥 중간이나 이동할 때를 제외하면 딱히 쉬어 본 적이 없었다.
하나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세이아를 도시에 두고서 레벨 업을 한답시고 자리를 비울 수도 없는 노릇.
확실히 억지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기보다는 간만에 푹 휴식 취하는 게 좋아 보였다.
고개를 끄덕인 에일은 화면에 지도를 띄웠다.
“로덴하고 리아 님은 식당에 먼저 가 있겠다고 했으니…….”
츠츠츠츳!
그때 갑자기 거뭇하게 어두워진 골목길의 풍경이 바뀌었다.
아래로 쬐던 햇살이 갑자기 줄어들었다.
“이, 이건…….”
에일이 고개를 들자 뜻밖의 하늘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하늘을 온통 뒤덮은 두터운 결계가 난데없이 생겨난 것이었다.
그가 서 있던 골목길뿐만 아니라 벨하벤 전체가 결계 안에 들어가 어두워져 있었다.
‘역시 아폴리온이 움직인 건가? 하지만 이 넓은 도시를 통째로 가둬 봤자 어쩌려는 거지?’
골목길을 달려나가는 에일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지금 생겨난 결계는 분명 금지된 마법이었다.
이단마법사들의 힘을 빌려 왕궁을 장악할 때 썼던 것과 똑같은 수였다.
하지만 이곳 벨하벤은 결코 어쭙잖은 중소형 거점이 아니었다.
드넓기로 유명한 워로드의 도시 중에서도 ‘대도시’로 분류되는 거대한 거점이자 생활 터전.
유저들을 모두 제외한 NPC 시민들의 숫자만 해도 엄청났다.
그들의 입을 일일이 틀어막는 건 당연히 불가능했다.
“거기다 외각 쪽도 여전히 잠잠하잖아…….”
건물의 옥상 위로 올라선 에일이 중얼거렸다.
도시 내에서 두 번째로 높은 언덕 지역에 있던지라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도시의 굳건한 성벽과 방어 시설은 멀쩡했고, 바깥쪽에 도시를 제압할 병력은 당연히 없었다.
어중간한 전력으로 침투해 봤자 도시 내에 주둔한 철십자 길드에게 무참히 당할 뿐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랭커라 해도 극심한 숫자 차이까지 극복할 수 없는 법.
물론 대규모 병력을 데려온다고 해도 답이 되진 않았다.
아무리 비밀스럽게 움직여 봤자 공성전을 치를 만한 인원이라면 들킬 수밖에 없었고, 동시에 자신에게도 철십자로부터 소식이 들어왔을 것이다.
그것이 에일과 시르 모두 벨하벤이 당할 가능성은 없다고 본 이유였다.
하지만 그 순간 아폴리온이 준비해 둔 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키기기긱!
기분 나쁠 만큼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도시 광장에서 새빨간 균열이 열렸다.
균열 안에서 흉측한 괴물들이 쏟아졌다.
평화롭던 도시에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체…….”
아무리 상식을 뛰어넘는 금지된 마법이라 해도 이런 종류의 마법 따위는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심지어 생겨난 균열은 한 곳이 아니었다.
도시 곳곳에 생겨난 균열과 괴물들 탓에 여기저기서 전투가 발발했다.
나타난 괴물들의 머리 위에는 하나같이 이단의 낙인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은밀한 탐구자’가 당혹감을 표합니다!]
[‘화산의 지배자’가 불쾌한 존재들의 등장에 사납게 포효합니다!]
[‘강의 폭군’이 상황을 파악해 분노를 토합니다!]
일제히 신격들의 격한 반응이 주르륵 터져 나왔다.
갑작스레 무슨 일인지 혼란에 빠진 에일에게 루의 말이 들려왔다.
“녀석들이 차원의 균열을 연 거다. 악마들을 불러들인 것이지.”
“악마라면……!”
지금 벌어진 일들은 금지된 마법 따위가 아니었다.
단순한 몬스터가 아닌 악마의 하수인들이 균열을 넘고서 쏟아진 것이었다.
본래 상위의 하수인 하나를 소환하는 데만 해도 수많은 희생양의 영혼이 필요한데 이 정도 규모라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해 왔던 것인지 가늠조차 안 될 지경이었다.
[‘생명의 어머니’가 아폴리온에게 저주를 퍼붓습니다!]
분노를 담은 프레이아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악마들은 스스로 일곱 신격의 대적자를 칭하고 다녔다.
만약 아폴리온 길드가 그런 녀석들과 손을 잡았다면 그들과 협력하던 대지 교단과 물의 교단조차도 크루거에게 속은 것이었다.
‘이 안에 있는 모든 NPC를 모조리 죽일 셈인 건가……!’
바깥과의 통행을 완전히 차단한 뒤 악마를 이용해 공주를 없애고 목격자들마저 모조리 입막음을 할 셈이었다.
6대 길드라는 곳이 악마와 계약한 만큼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아폴리온의 입장에서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었다.
‘젠장, 악마들만 투입시켰을 리는 없을 테고. 분명 랭커들도 여럿 숨어들어 있겠지. 놈들이 가장 먼저 노릴 곳은…….’
장소를 떠올린 에일이 장검을 빼 든 채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