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격동의 장 (9)
“후우.”
한숨을 돌린 에일이 난간에 기댄 채 거리를 내려다봤다.
잘 짜여진 거리에 수많은 사람이 오가며 일상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곳의 이름은 벨하벤.
철십자 길드가 지닌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다.
유독 따스한 날씨로 보아 알 수 있듯, 북부 위주의 도시들 사이에선 다소 동떨어진 위치에 자리한 곳이었지만, 오히려 그랬기에 일행이 가장 빠르게 닿을 수 있었던 곳이었다.
‘이제 정신없이 쫓겨 다닐 일은 없겠지.’
뿌리의 길을 벗어난 일행은 그 이후엔 별다른 추적 없이 무사히 도시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추적해 오던 주력 랭커들은 이미 보스 몬스터를 상대하느라 발목을 잡혔기 때문이었다.
무사히 구출해 낸 세이아는 현재 도시 내에 있는 빛의 신전에서 치료를 받는 중이었고, 사제들이 치료에 전념하고 있었다.
늦어도 내일이면 정신을 차릴 것이라는 걸 보아, 큰 문제가 생길 일은 없어 보였다.
‘중립 거점이라면 몰라도 철십자의 도시… 거기에 교단의 신전에 맡겨 둔 거니까. 문제가 생길 일도 없을 테고.’
든든한 아군인 철십자 길드의 도시 안에 들어섰으니, 아폴리온도 함부로 손을 쓸 수 없었다.
당장 난간 아래로 보이는 경비 NPC들의 숫자는 평소의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나 있는 상황이었다.
에일이 공주를 데리고 벨하벤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철십자의 길드장인 시르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벨하벤의 위치는 6대 길드 간의 전쟁이 치러지고 있는 접경선 근처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큰 변수가 생길 가능성도 없었다.
‘혹시 몰라 따로 이야기도 해놨으니까.’
굳이 에일이 말하지 않아도 사제들은 세이아의 중요성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집행관인 그가 따로 이야기까지 해놨으니, 교단의 성기사들 사이에 둘러싸여 보호받고 있을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소수의 암살자 몇 명을 보내는 것 정도로 공주의 목숨을 노리는 건 어림도 없었다.
덜컥!
그때 문을 열고 들어온 누군가의 기척에 에일의 고개가 돌아갔다.
“나쁘지 않은 도시지?”
철십자의 길드장인 시르.
켈베로스와 유론을 막느라 정신없던 그녀였지만, 이젠 가장 중요한 사안이 달려 있는 만큼 직접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특히 철혈 성채가 방어에 성공한 덕에, 현재 켈베로스의 기세가 한풀 죽은 상황이었다.
그녀 한 명 정도는 잠시 다음 수를 위해 빠져도 상관없다는 의미였다.
“내가 기다리게 했나?”
“딱히.”
그녀의 말에 에일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피식 웃은 시르는 건너편 자리에 앉으라며 눈짓했다.
애초에 그녀의 길드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고, 에일은 발코니에서 들어와 앉았다.
“이번에 상위 랭킹에 들어갔던데. 벌써부터 하이 랭커라니 언제나 기대했던 것 이상을 보여 주는걸.”
“운 좋게 기회가 생겨서. 하지만 지금 그게 문제는 아니니까.”
“그래, 아폴리온 녀석들 말이지……. 전력을 숨겼을 가능성이야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에일의 말에 시르가 쓰게 웃었다.
이번에 이루어진 대규모 랭킹 변동은 알키오네에 대해 가장 먼저 눈치채고 있던 그녀조차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특히 여태 최강이라 불리던 6대 길드장들이, 아폴리온 측 최고 간부들을 감당 못 하고 물러난 일은 절대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니었다.
직접 싸워 보지는 않았지만, 당장 그녀만 해도 2위에서 6위까지 밀려나게 된 입장이었다.
“하지만 나쁜 소식만 있는 건 아니지.”
“다른 쪽 상황이라도 나온 건가?”
“뿌리의 길에 진입했던 아군 랭커들은 거의 다 빠져나왔어. 아폴리온에게 당한 숫자는 꽤 크지만, 보스 몹한테 당한 건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야. 길드장인 카린과 솔로스도 일단은 무사하고.”
비록 두 길드장이 간부들과의 승부에서 밀려나긴 했지만, 당하지 않고 물러서는 데에는 성공했다.
공주까지 무사히 확보한 상황에 길드를 대표하는 둘이 당하지 않은 건 아주 다행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불과 몇 시간 전에 수도에서 새로운 왕이 생겨났어.”
“왕이라고……?”
“골골대던 전대 왕이 갑자기 숨을 거둔 데다가, 대의회의 표결까지 일사천리로 끝나 버렸거든. 그 결과 세이아 공주가 왕위를 이어 즉위했어. 물론 그쪽에 있는 건 가짜지만.”
“진짜 공주를 확보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왕을 갈아치울 줄은 몰랐는데.”
새로운 소식에 에일이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아마 뿌리의 길 안에서 너흴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자충수가 된 꼴이지.”
만약 이미 여왕이 생겨난 뒤에 다른 곳에서 진짜 공주가 나타난다면, 왕국 차원에서 검증 과정이 필요했다.
워로드 속 세계에서는 환영 마법이나 사악한 주술 등의 수많은 속임수가 존재했고, 왕가에서도 이런 상황에 대비해 엄격한 규정과 관습이 남아 있었다.
아무리 가짜가 여왕에 등극한 뒤라고 해도, 철저한 과정을 피할 수 없었다.
시르가 직접 여기까지 찾아온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세이아가 깨어나는 순간 유저들에게 진실을 알리는 것부터 시작해, 이 사실을 공식적으로 발표해야 했다.
왕국 전역에 있는 NPC들의 여론을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만큼, 굉장히 바빠질 것이었다.
왕궁을 피바다로 만든 중대한 반역죄가 섞여 있는 만큼, 왕국 전역이 들썩일 건 당연했다.
“이제 아폴리온은 다신 활동하지도 못할 만큼 큰 타격을 입을 거야. 아무리 금지된 마법의 힘을 빌렸다 해도, 검증 과정이 들어가면 속이는 건 불가능하니까. 만약 검증을 거부하는 무리수를 둔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지. 오히려 반발만 커질 테니. 놈들 입장에선 어느 쪽을 택하건 왕가를 박살 내 놓은 이상 거의 모든 NPC를 적으로 돌리는 것밖에 안 남았어.”
이제 앞으로 왕국 전역의 NPC들이 쏟아낼 반발은 아폴리온도 감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심지어 NPC뿐만이 아니었다.
유저들 사이에서도 알키오네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고 있어, 반발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애초에 그들이 과감하게 왕가를 점거한 것도, 앞으로 생겨날 유저의 반발을 허수아비인 왕의 명령과 그를 따를 NPC들을 이용해 찍어 누르려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건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둘 중 하나만 적으로 돌렸다면 모를까, 이제부턴 그들의 단순 전력이 얼마나 강하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질 정도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아폴리온이 가만히 지켜보고 있지는 않을 텐데…….”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지금이 좋은 상황인 것은 맞았다.
하지만 에일은 어딘가 꺼림칙한 느낌을 받았다.
불가능하거나 최소 반나절 이상은 잡아먹을 줄 알았던 뿌리의 길 보스가 완전히 공략당한 채 쓰러져 있었다.
보나 마나 내부에 갇힌 아폴리온 측 간부들에 더해, 크루거까지 직접 나서서 처리한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크루거를 포함해 모습을 감춘 간부들의 위치는 아직도 파악이 안 되고 있었다.
공주를 구해낸 것만으로는 끝이 아닐 거라는 알리사의 말을 기억하고 있는 탓에, 찜찜한 기분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물론 방심하면 안 되겠지. 하지만 간부들이 움직이는 것만으로는 소용없어. 이미 도시에 출입 통제를 걸어뒀고, 안으로 들어오려는 시민들은 모두 신원을 확인 중이니까.”
시르가 찜찜한 기색의 에일을 바라보며 말했다.
만약 아폴리온의 간부들이 모두 이곳에 나타난다 해도, 그들만으로 삼엄한 보안을 뚫고 세이아를 해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이렇게 보는 눈이 많은 대도시에서 공주를 죽이기 위해 난리를 치는 순간,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패가 가짜라고 자백하는 꼴이나 다름없어. 절대 감당 못 할 상황이지.”
‘음… 확실히.’
시르의 말에 에일의 걱정도 조금은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이아가 의식을 되찾을 때까지 마음 편히 늘어져 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대비는 해두는 편이 낫겠지.’
변수를 따지는 에일이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 * *
벨하벤의 거리.
집무실을 나온 에일은 세이아가 있을 신전에 들르고, 철십자 길드에겐 도시의 주둔 병력 증원까지 요청했다.
길드의 주요 병력이 모두 전선에 나가 전쟁 중인 와중에 반가운 요청이 아니겠지만, 시르는 흔쾌히 수락해 주었다.
오히려 그 정도 요청이야 얼마든지 말하라며 답했다.
‘꽤나 의외였지.’
이전보다 더 호의적인 것 같은 그녀의 태도는 아마 공주를 성공적으로 빼낸 게 큰 게 작용한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번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것저것 거래를 주고받는 사이가 될 수 있을 듯했다.
소속 길드가 없는 개인 유저인 그로서는 꽤나 든든한 뒷배경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벌써 그때 일을 생각할 단계는 아니지.’
슬쩍 골목으로 들어간 에일이 시선을 돌렸다.
“이제 슬슬 말해 줘야 하지 않나요?”
에일은 루가 지켜보고 있을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빛의 심판자, 루’가 무슨 소리인지 묻습니다.]
“그냥 말로 하시죠. 굳이 메시지로 할 필요도 없는데.”
메시지가 떠오르자 에일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가 ‘여신의 가호’을 처음 사용한 이후로, 스킬의 부가 효과 덕인지 신격과의 연결이 더욱 강하게 이어졌다.
그 덕에 영향력 소모가 거의 없이 언제든 그녀와 직접적인 대화가 가능해졌다.
“저기, 여신님?”
“무, 무얼 말이냐?”
그의 눈앞에 하얀빛이 생겨나며 대답이 들려왔다.
평소처럼 공헌도를 아끼기 위한 모습이 아니라, 본래 여신의 모습 그대로 그녀가 나타났다.
“성물을 모아야 하는 이유 말입니다. 설마 여기까지 왔는데 다 끝난 뒤에야 말해 줄 거라는 건 아니겠죠?”
“그건…….”
에일의 질문에 루가 머리를 짚었다.
어째서 성물을 모으려는 건지, 성물을 모으면 어떤 일이 생기는 건지.
에일이 여러 차례 물어왔지만, 그저 때가 되면 말해 주겠다는 식으로 적당히 얼버무렸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넘기는 데도 슬슬 한계가 찾아오고 있었다.
“대체 뭐길래 그렇게 숨기는 겁니까? 더 궁금해지려 하네.”
“조, 조금만 기다려 보거라.”
결정을 내리지 못한 루가 끙끙거리며 고민했다.
여기서 말해 주는 편이 나을지, 아니면 성물이 모이는 마지막 순간에 밝히는 편이 나을지 쉽사리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다.
후우우웅!
그때 느닷없이 바람이 불어와 골목을 가득 채우며 지나쳤다.
그리고 영문 모를 시원한 바람이 잦아들자, 어느새 하얀 매가 그의 어깨에 올라타 있었다.
“직접 보는 건 처음이구나.”
“뭐, 뭐야?”
갑자기 커다란 녀석이 어깨에 나타난 건 둘째치고, 말까지 하는 매의 등장에 에일이 펄쩍 뛰었다.
심지어 놀란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너는……?”
[‘화산의 지배자’가 불어온 바람을 반깁니다!]
[‘생명의 어머니’가 불청객에게 불쾌감을 표합니다!]
루를 포함한 다른 신격들까지 제각각의 반응을 보이는 모습.
정신을 차린 에일이 제대로 녀석을 쳐다보곤 평범한 새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자유와 바람, 방랑의 신, 알타리엘.
일곱 신격 중 유일하게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는 바람 교단의 신격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