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격동의 장 (8)
쿠구구구!
요동치며 꿈틀거리는 줄기들의 사이.
뿌리의 길을 빠져나가고 있는 에일과 네슈아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이 보주라는 거, 빛이 점점 약해지고 있는데.」
“여유분도 챙겨 놨으니 걱정할 건 없어. 그리고 이제 거의 다 도착했거든. 아마 이 주변이었을 텐데…….”
지도 위치를 확인한 에일이 주변을 살폈다.
겉에서 보기엔 똑같은 통로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사전의 정보가 틀릴 일은 없었고, 이 주변에 확실히 출구가 존재했다.
스스스슷!
눈앞에서 아른거리며 꿈틀거리고 있는 줄기들.
만약 수목의 보주 아이템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무차별적으로 공격해 왔을 것이다.
그들을 쫓아오던 추적자도 저 줄기들을 상대하느라 발목이 묶였고, 추적은커녕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중이었다.
툭툭.
에일의 어깨를 두들긴 네슈아가 한 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아, 저기 있네.”
그가 가리킨 방향에는 큼직하게 갈라진 균열이 있었다.
반색한 에일은 당장에 그리로 달려갔다.
외관으로 보나 위치상으로 보나 밖으로 통하는 출구가 확실했고, 그들은 균열 안쪽으로 들어갔다.
「막혀 있군.」
네슈아가 고개를 저었다.
출구는 맞았지만 막상 균열의 안쪽으로 깊게 들어가니, 도중에 가로막고 있는 벽이 있었다.
완전히 열려 있지는 않은 상태.
혹시 몰라 두들겨 봤지만 힘으로 부서질 만한 강도는 확실히 아니었다.
몬스터가 깨어난 이후로 통로의 벽과 바닥이 전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매우 강해진 탓이었다.
원래 봉인이 깨져 녀석의 활동이 시작된 이후로는 보스 몬스터를 아예 쓰러뜨리거나, 바깥쪽에서 열어주지 않는 이상 나올 수 없었다.
하지만 네슈아가 어떻게 된 일이냐고 양피지를 끄적이고 있는 사이.
막혔던 출구가 쩌저적 소리와 함께 저절로 열렸다.
“에일님!”
“거기서 용케 살아나왔네요.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마침 딱 알맞은 타이밍에 출구를 열어준 로덴과 리아가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원래 지하 종족들과 함께 전투를 치르던 그들이었지만, 미리 에일의 연락을 받고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현재 규모상 가장 큰 전장인 북동부 지역은 교단의 집행관들이 맡아 지휘하고 있어, 고작 에일이나 그들 둘의 공백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쪽은 네슈아 님 맞죠? 오는 동안 이야기 들었습니다.”
“…”
“하하, 그림자 교단에 대해선 말만 들었는데 신기하네요.”
마주한 로덴과 네슈아가 가볍게 악수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로덴이 네슈아에 대해 알고 있듯, 네슈아도 아르메니아의 유명 랭커였던 로덴에 대해 익히 들어왔었다.
허나 첫인사를 나누는 도중에도 네슈아는 역시나 말을 할 순 없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타이밍도 딱 맞아떨어졌네요.”
“에일님 부탁인데 당연히 와야죠. 그런데 혹시 랭킹 보셨어요? 지금 다들 난리가 났던데.”
“맞습니다! 하이랭커들 절반이 갑자기 아폴리온 소속으로 채워지질 않나, 갑자기 30위권에는 알리사 님 이름까지 올라가있고…”
역시나 이번 대규모 랭킹 변동 사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던 바깥에서는 훨씬 더한 충격으로 다가온 듯 했다.
그리고 마침 이야기가 나오자 알리사가 어떻게 되었을지 또다시 걱정이 떠올랐다.
헤어진 뒤로 연락이 닿지 않은 그녀의 이름은 랭킹 목록, 그것도 30위를 달성한 높은 순위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처음 봤을 때에는 굉장히 당황스럽긴 했지만, 다른 알키오네 간부들이 그러했듯, 힘을 숨겨놨던 것이라면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랭킹 3위인 루칸을 감당하기엔 무리였겠지.’
시간을 끌기 위해 맞부딪힌 이상, 무사히 빠져나왔을 가능성은 그리 낙관적이지 못했다.
허나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보스의 몸속을 빠져나올 수 있는 탈출 지점의 좌표는 메신저로 보낸 것뿐이었다.
그저 무사하길 바랄 따름이었다.
“거기다 랭킹에 에일 님 이름도 있던데요?”
리아가 동경의 눈빛을 보내며 에일을 올려다봤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100위라는 랭킹을 달성한 에일은 이제 단순히 랭커가 아닌 ‘하이랭커’로 분류되는 최상위 유저였다.
알리사도 그렇고 어떻게 그렇게 한 번에 크게 순위가 뛸 수 있는지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물론 랭킹에 진입한 건 둘 뿐만이 아니었다.
북동부 전장에서 엘트리스의 주민들과 함께 적대 유저들을 사냥하던 로덴도 어느새 랭킹 500위대에 진입했다.
“500위라 생각보다 빠른데?”
“하… 지금 저 놀리는 거죠? 설마 우리 파티 세 명 중에 제일 늦을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분해 죽겠네!”
로덴이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이미 겪어본 경험 덕에 누가와도 빠른 성장 면에선 자신이 있었는데, 설마 이런 괴물 둘이 같은 파티원일 줄이야.
차마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파티 중에선 저만 랭킹에 못 들었네요…”
리아가 짐짓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른 세 명의 동료들과 달리, 그녀는 아직 홀로 랭킹권에 진입을 하지 못해 이름을 못 올려둔 상황이었다.
“괜히 거기에 마음 쓸 필요는 없어요. 마법사라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에일이 위로하듯 그녀에게 말했다.
원래 일반적으로 몰이 사냥이나 다대다 전투에 특화되어 있는 마법사는 랭킹에 진입하는 데에 불리한 입장이었다.
괜히 공식 랭킹에 근접 클래스 유저들이 강세를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6대 길드장 중 유일한 마법사 클래스였던 그리핀의 레윈도 엄연히는 배틀메이지였기 때문에, 평범한 마법사와는 다른 예외 케이스였다.
아마 마법사로서의 자질로 그녀의 실력을 따지자면, 어지간한 랭커들은 가뿐히 넘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알리사 님은 치유사잖아요?”
“그건 솔직히 저도…”
쿠구구구궁!
그때 그들이 서있던 대지가 크게 요동치며 흔들렸다.
그러자 입구 쪽에 서있던 이들은 흠칫 입구로부터 물러났다.
“몬스터가 배가 고픈 모양인데요?”
“빨리 나오길 잘했네.”
아직도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는 땅 밑의 이질감이 느껴졌다.
안쪽에서 벌어지고 있을 상황이 어떨 지야 보나마나 뻔했다.
「어서 가지」
“그래.”
추적을 따돌리며 위험을 넘기긴 했지만, 아직 완전히 상황이 끝난 건 아니었다.
서둘러 공주를 치료해 의식을 되찾게 만들어야 했고, 그들은 지체 없이 가장 가까운 도시를 향해 출발했다.
“그런데 철십자나 다른 쪽 랭커들은 어떻게 해요? 아직 저 안에 남아있을 텐데.”
발걸음을 옮기며 로덴이 물어왔다.
저 아래에 놓인 보스 몬스터의 뱃속엔 그들을 쫓던 추적자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보주도 없이 아직 안쪽에 갇혀 있을 아군 랭커들만 해도 상당한 숫자일 것이었다.
“다른 쪽에도 전달해뒀으니 괜찮을 거야.”
보스의 봉인을 깬 이후, 에일은 곧바로 안에 갇힐 아군 랭커들을 빼내기 위해 각 길드에 빠져나올 출구들의 좌표를 전했다.
아마 지금쯤 다른 길드원들이 가있어 출구를 열어줄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었고, 거기까지 이동만 가능하다면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출구의 위치를 모를 아폴리온측 길드원들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보스를 공략하지 못하면 빠져나갈 수 없다는 던전형 몬스터의 특성상, 어쩌면 이번 보스의 공략에 실패한 채 그 안에 갇혀서 모두 죽어줄 지도 몰랐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일은 훨씬 쉬워지는 셈이었다.
‘물론 안에 있는 랭커들의 이름값을 생각하면, 일이 그렇게 쉽게만 되지는 않겠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불가능한 소리는 아니었다.
뿌리의 길의 보스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기척을 숨기는 다섯 개의 보주를 적극 활용해서 공략해야했다.
헌데 그 다섯 개의 보주는 에일과 네슈아가 빠져나가며 모두 빼돌린 뒤였다.
공략해야할 입장에서는 가뜩이나 어려운 공략을 헬모드로 전환시킨 것이나 다름없는 수였다.
어지간한 전력으로는 공략이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나 다름없었다는 말.
물론 여기까지는 기본적인 추론일 뿐, 여태껏 봉인을 풀고 깨어난 적은 한 번도 없던 탓에 그 이상의 자세한 공략법은 에일조차 알 수 없었다.
‘뭐, 사실 이제 와서는 큰 상관없는 이야기지.’
놈들이 멀쩡히 밖으로 나오던, 아니면 그 안에서 전멸해주던 간에.
어찌됐건 이번 사건의 핵심인 공주를 확보한 이상, 절반은 이긴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이쯤 했으니 슬슬 모습을 드러내주려나.’
아폴리온의 길드장, 크루거.
그를 떠올린 에일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그동안 격렬한 전쟁통에도 전면에 나서지 않고 팔짱을 끼고 있던 크루거의 존재는 상황을 살피던 에일의 신경을 항상 거슬리게 만들었었다.
그가 여태 나타나지 않은 것은 굳이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정리가 가능하다는 자신감의 표출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만약 이번 일격이 자신의 생각만큼이나 제대로 된 수였다면, 놈들의 수장은 곧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 * *
콰드드득!
아폴리온의 간부, 다고스가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며 뻗어져 오는 줄기들을 베어 갈랐다.
허나 줄기들은 아무리 베어낸다고 한들 이 거대한 던전형 보스의 체력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거기다 줄기만 상대하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뿌리들이 뭉쳐 나온 고레벨 몬스터들까지 통로를 메우며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
뿌리의 길 전체가 움직이는 괴물이라니.
던전형 보스를 처음 상대해보는 것도 아니었지만, 설마 이 드넓은 통로 전체가 몬스터의 몸속일 수 있다는 건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아래쪽 상황은 어때?”
“좋은 소식은 없어.”
통로의 몬스터를 모두 정리한 루칸과 다고스가 말을 주고받았다.
추적 중에 기습적으로 맞이하게 된 대규모 보스 레이드.
워로드 최고의 전력인 그들조차 쉽게 볼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고, 사전 준비도 없이 제대로 대처하기란 어려웠다.
“결국 공주도 놓쳐버렸군. 변수가 조금 과한데.”
“고작 이 정도로 엄살떨기는. 싱글 플레이도 아니고 너무 쉬우면 재미없잖아?”
그의 말에 루칸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허나 다고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전혀 생각도 못한 곳에서 전력 소모가 발생했고, 하위 랭커들을 꽤나 잃은 상태였다.
물론 그들이 가지고 있는 패에 비하면, 공주를 지금 잠시 놓쳤다고 한들 아주 위험하다고 할 상황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당초 완벽했던 계획에서 두 번이나 꼬이게 된 것인 지라 그로서는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띠리링!
“이봐.”
“그래, 공략법을 찾은 모양이지.”
동시에 들려온 메신저의 울림에 그들이 반응했다.
통로들을 단신으로 돌파하며 공략 방법을 찾아낸 사일러스에게서 도착한 메시지였다.
거기서 전해진 공략 방법은 간단했다.
이번 보스는 체력을 깎는 방식이 아니라, 몸속에 놓여있는 심장부를 파괴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문제는 보스의 크기가 엄청난 규모라는 것이었고, 그중에서도 심장부가 무려 다섯 곳이나 퍼져 있다는 것이었다.
“다섯 곳?”
“이거… 여기 있는 인원에서 절반은 잃어야 하겠는데.”
다고스는 물론, 여유롭던 루칸의 표정까지 살짝 찌푸려졌다.
공략법을 알아낸 이상, 그들이 전력을 낸다면 클리어까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그동안 일어날 전력 손실은 무시할 수 없는 수치였다.
거기다 보스를 처리할 때까지 주 전력이 붙잡혀 있을 시간까지 따지면 상당한 손해가 불가피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콰아아아앙!
보스의 두터운 내벽을 뚫고서 크루거가 자리에 나타났다.
“다들 정신 차려. 이번 공략, 2시간 안에 끝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