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이단심판관-209화 (209/227)

209화 격동의 장 (7)

엉망이 된 바닥과 벽이 어지러이 부서져 있었다.

두 유저 사이에 치러진 격렬한 전투의 흔적이었다.

하지만 그 전투의 끝에 쓰러진 시체는 없었다.

아폴리온의 격투가, 루칸이 먼저 물러나며 싸움은 끝이 났다.

“후…….”

루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알리사는 한숨 돌렸다.

동요하지 않고 허세를 부린 덕에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루칸이 떠날 즈음엔 이미 알리사가 사용하고 있던 기원 스킬의 지속 시간이 끝난 뒤였다.

만약 기원의 효과 없이 일반 버프만으로 루칸을 상대하는 건 그녀도 무리였다.

만약 끝까지 승부를 봐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의심의 여지 없이 패했을 것이다.

‘게다가 스킬 하나를 아끼고 있었지…….’

알리사는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루칸이 보인 것은 분명 전력이 아니었다.

이미 알려진 크루거를 제외하고도, 사일러스나 루칸 같은 창립 멤버들은 전설 등급 스킬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쿨타임 때문인지 아니면 전력 노출 때문인지, 자신에게 사용하기엔 아까운 스킬이었을 가능성이 컸다.

파앗!

알리사는 화면을 띄워 랭킹을 확인했다.

그걸 증명하듯 이번 전투로 급상승한 알리사의 랭킹은 30위 바깥에 머물러 있었다.

힐러로서 지속력이 뛰어난 강점을 살려야 하지만, 정작 싸움을 길게 가져가면 핵심 스킬인 ‘기원’의 지속 시간이 끝나 버린다는 치명적인 단점.

전투를 보조해야 할 직업으로 무리하게 다른 역할을 수행하려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상대가 명백히 자신보다 두 수 아래라면 모를까, 지금 그녀의 상태로는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다 해도 한계가 명확했다.

스르륵.

그녀가 화면을 아래로 내리자 다른 하이 랭커들의 이름이 주르륵 나왔다.

랭킹창은 역시나 아폴리온 소속 길드원으로 가득했다.

이번에 새로 진입한 하이 랭커들은 모두 익숙한 얼굴들뿐이었고, 전원이 알키오네에서 활동하던 주요 전력들이었다.

사실상 같은 편인 켈베로스의 랭커들을 포함하지도 않았는데, 아폴리온의 길드원들이 하이 랭커의 과반 이상을 차지해 버렸다는 건, 상당히 큰 전력 차가 있다는 상황임을 드러냈다.

암울하게도 느껴질 수 있는 차이.

하나 알리사의 시선이 그 하이 랭커 목록의 마지막에 닿은 순간, 그녀의 표정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이건…….”

100위권 상위 랭킹의 마지막 자리에 에일의 이름이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헤어진 사이에 급등한 에일의 랭킹이 100위에 진입했다는 것.

그것이 의미하는 사실은 간단했고, 알리사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 * *

쿠구구궁!

이미 박살 난 유적들이 한차례 더 무너지며 요란한 소리를 토해냈다.

불길에 휩싸여 초토화된 구역.

그 앞에 한 명의 유저가 서 있었다.

“무슨…….”

자신이 쏘아낸 스킬의 위력에 에일은 스스로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에 새롭게 획득한 전설 스킬의 효과는 엄청났다.

스펙 상승, 스킬의 쿨타임 감소, 신성 마법의 시전 시간 삭제.

특히 마지막의 시전 시간 삭제는 더욱 큰 의미를 띠고 있었다.

또 다른 전설급 스킬인 ‘구도자의 열성’과의 시너지 덕에 원래의 효과를 아득히 넘어선 위력을 지니게 된 것이다.

본래 힘과 민첩 위주의 이단심판관은 신성 마법에 대해 회복기나 보조로만 사용할 수 있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에일은 현재 배우고 있는 모든 고위력 신성마법들을 캐스팅 시간 없이 최대치의 위력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래, 분명 대단했지. 하지만…….’

다만 한 가지, 이번 승부를 단숨에 결착 지은 마지막 수는 그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이점에 대해 제대로 활용하기도 전, 또 하나의 변수가 이 싸움을 끝내 버렸다.

‘여신의 가호’ 스킬을 사용한 이후.

단순한 액티브 스킬인 줄 알고 사용한 ‘여신의 권능’ 스킬이었지만, 그가 생각하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기술의 발동 뒤에 잠시 당혹감을 느낀 뒤에야 얼떨결에 사용한 스킬.

위력과 범위는 그 이상이었다.

에일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했던 만큼, 당하는 입장인 슬렉 역시 예상하지 못한 수였다.

그 탓에 미처 슬렉은 미처 반응도 하지 못했고, 유적지 정면에 있던 건물이 모조리 쓸려나가며 싸움은 끝이 났다.

화르르륵!

초토화되어 있는 흔적 위의 불길은 아직도 꺼지지 않았다.

무너진 유적 속에 파묻힌 채 쓰러져 있는 슬렉의 시체.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그리로 다가선 에일은 그가 잔뜩 떨어뜨린 돈과 아이템들을 챙기고 곧바로 일어났다.

‘어찌 됐건…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아직 끝난 건 아니니까.’

세이아를 다시 등에 업은 그는 지하 유적지 사이를 헤치며 이동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스킬의 말도 안 되는 효과 덕에 들뜨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완전히 다음 수를 완성시키기 전까진,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였다.

“너, 너는!”

“이런……!”

아니나 다를까 모퉁이를 돌자마자, 재수 없게도 마주친 두 명의 남성이 달려왔다.

어느새 이곳까지 내려온 두 명의 아폴리온 소속 하이 랭커였다.

무기를 뽑아들며 달려온 그들의 모습에 에일은 낭패감을 느꼈다.

‘젠장, 가호 스킬만 있으면 해볼 만하겠지만…….’

문제는 ‘여신의 가호’ 스킬의 쿨타임이 6시간이라는 것이었다.

정말 어지간해서는 시간 단위로 가지 않는 워로드의 스킬 쿨타임 체계였지만, 솔직히 말해 이 스킬만큼은 예외라고 해도 이해가 갔다.

이런 스킬을 언제든 사용할 수 있다면 명백한 오버 밸런스였고, 그만한 리스크가 따라 붙게 된 것이다.

‘이걸 어쩌지…….’

좋지 못한 상황에 에일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돌아갔다.

전설급 스킬이라는 변수도 없는 이상, 하이 랭커 둘을 동시에 상대해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느 틈에 그를 양옆으로 둘러싼 두 랭커는 전혀 빈틈을 보이지 않은 채 서서히 거리를 좁혀왔다.

콰아아앙!

그때 거대한 흑색 창이 난데없이 바닥에 내리꽂혔다.

그 충격에 땅이 흔들리며 먼지가 거세게 일었고, 먼지에 더해 짙은 연막까지 터져 나왔다.

푸슈우우!

콰악!

연막 사이에서 나타난 남자의 손이 에일의 목덜미를 집었다.

당황한 에일이 몸부림치려 했지만, 연막 속에서 나타난 것은 적이 아닌 네슈아였다.

“너……!”

터억!

깜짝 놀란 에일의 입을 네슈아가 다물게 만들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그 옆에선 당황한 랭커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선 이곳을 빠져나가야 하는 게 먼저였고, 네슈아의 뒤를 따라 랭커들을 따돌렸다.

“휴…….”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린 뒤, 유적 안의 조그만 방 안에 숨자 에일은 겨우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뿌리의 길 아래에 있는 이곳 유적지 지역은 여기저기 뻗어져 있는 수많은 통로만큼은 아니더라도, 그에 못지않게 굉장히 넓은 지역이었다.

당장 쉽게 들킬 만한 장소는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여기까지 집요하게 쫓아온 놈들이니만큼 방심할 수는 없었다.

그들을 놓쳤던 랭커들은 여전히 눈에 불을 켜고 자신들을 찾아다녔다.

거기다 조금 있으면 그들의 연락을 듣고 온 아폴리온의 랭커들이 이쪽으로 더 합류할 것이었다.

“덕분에 살았어. 여긴 어떻게 찾아온 거야?”

공주를 적당한 자리에 눕힌 에일이 물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6대 길드 소속도 아닌 네슈아가 이 자리에 나타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건 나중에. 당연히 빠져나갈 길 정도는 계산하고 온 거겠지? 출구가 어느 쪽인지 말해.」

깃펜을 끄적인 네슈아가 양피지를 들이밀었다.

누가 봐도 최대한 빨리 빠져나가야 하는 상황인 만큼, 그 역시 에일을 재촉했다.

하지만 에일은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생각해 둔 건 있지만… 빠져나가기 전에 미리 찾아야 할 아이템들이 있어.”

파앗!

에일이 손을 휙 저으며 화면을 공유했다.

그리고는 미리 지니고 있던 뿌리의 길 내부 지도를 전송한 뒤 위치까지 찍어 주었다.

“너, 기척 숨기는 거 잘하지?”

에일의 물음에 네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일은 그동안 겪은 경험상 단순히 뛰어난 특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의 기척을 숨기는 능력은 그림자 교단의 사도들만이 지닌 특수한 능력이었다.

은신에 투자한 그 어떤 도적도 네슈아보다 기척을 잘 숨길 순 없었다.

「무슨 뜻인지는 대충 알겠어. 여기서 뭘 가져오면 되지?」

“수목의 보주라는 아이템이야. 보라색 구 형태로 돼 있는 건데… 아무튼 대충 보면 딱 알 거야. 아마 제단 위에 다섯 개 정도 놓여 있을 텐데 그냥 다 챙겨서 가져오면 돼.”

「그런 걸 어디다 쓰려고?」

“지금 꼭 필요해서 그래. 사람이 아니라 식물한테 기척을 죽이는 아이템이거든.”

「뭐? 그게 무슨 소리지?」

의문으로 가득찬 네슈아의 눈빛이 에일을 바라봤다.

하지만 에일은 그런 그의 등을 떠밀며 재촉했다.

“지금 느긋하게 설명해 줄 시간 없어. 보주 말고 파쇄검이라는 것도 필요한데, 위치 찍어 줄 테니까 어서 갔다 와. 아, 다시 만날 위치도 여기 말고 다른 곳에 표시해 놓을게.”

「아니, 잠…….」

네슈아는 에일에게 쫓겨나듯 등을 떠밀렸다.

방 안에서 나와 고개를 저은 네슈아는 한숨을 픽 내쉰 뒤 아이템들을 찾아 나섰다.

에일이 지도에 표시한 위치 좌표는 정확했고, 그의 솜씨 덕에 수색 중인 랭커들의 눈을 피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뭔가 당하는 느낌이지만……’.

어쨌든 네슈아는 그렇게 두 곳의 아이템을 모두 챙겼다.

그리곤 에일이 마지막에 찍어 둔 합류 지점으로 향했다.

“왔구나. 수고했어.”

「굳이 여기서 보자고 한 이유가 있나? 중심부에 있어서 들키기 쉬운 자리인데.」

“그건 보면 알아.”

에일이 손을 내밀자, 네슈아는 잠자코 챙겨온 다섯 개의 보주를 모두 건넸다.

그를 건네받은 에일은 우선 둘이서 보주를 하나씩 나눠 가진 뒤, 인벤토리가 아닌 몸속에 직접 지니도록 지시했다.

“좋아, 다음 건?”

「여기.」

그리고 다음 아이템 파쇄검을 꺼내들었다.

봉인 깨는 중요한 퀘스트 아이템이었고, 에일은 미리 발견해 둔 통로를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숨겨져 있던 장소였지만, 미리 알고 있던 에일에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여긴……?」

벽을 통해 커다란 방 안으로 들어선 네슈아는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 안의 천장과 모든 벽에 알아볼 수 없는 고대의 글씨들이 빼곡히 쓰여 있었다.

바닥에 크게 그려져 있는 거대한 봉인진은 붉은빛을 은은하게 빛내고 있었다.

딱 봐도 심상치 않은 장소.

그 한가운데로 다가간 에일은 봉인진의 중심에 섰다.

카앙!

봉인진에 파쇄검을 힘껏 꽂아 넣자, 붉은빛이 요동치며 기이한 소리를 토해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드드드드!

벽에 쓰여 있던 글자들이 지워지며 땅이 거세게 울렸다.

강력한 봉인이 서서히 해제되어 가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정작 봉인진이 완전히 소멸되자, 땅의 울림은 잦아들었고 아무런 이상도 나타나지 않았다.

「봉인이 풀렸는데 몬스터는 왜 나타나지 않는 거지?」

“벌써 나타났어. 이제 막 일어나서 비몽사몽인 것 같지만.”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주변을 둘러본 네슈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몬스터는커녕 벌레 한 마리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자 에일은 피식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우리가 들어와 있는 이 ‘뿌리의 길’은 사실 겉에서 보이는 것처럼 단순한 통로가 아니야. 난이도 극악의 던전…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거대한 몬스터의 몸속이지.”

「뭐……?」

깜짝 놀란 네슈아가 에일을 바라봤다.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손에 꼽힐 만큼, 던전형 몬스터는 굉장히 드물게 나타나는 종류였다.

던전이 벌떡 일어나 통째로 움직이는 일 같은 건 없었지만, 던전 전체가 몬스터의 몸속이라는 것이었고, 하나같이 큰 규모와 끔찍한 난이도를 자랑했다.

「하지만 여태 이 정도 크기의 던전형 몬스터는 나타난 적이 없는데.」

“평균 260레벨의 공격대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곳이니까. 예상 권장 인원은 합이 잘 짜인 1군 공격대로 최소 100인 이상.”

「그렇다면…….」

“그래. 여기 안에 있는 게 모두 랭커들이라곤 해도, 죽지 않으려면 어지간히 고생해야 할걸.”

키이이이익!

던전이 뒤흔들리며 굉음을 토해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