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격동의 장 (5)
“말도 안 돼…….”
아무런 전조도 없이 찾아온 급격한 순위 변동.
언제나 화제의 중심이기도 한 워로드의 랭킹엔 엄청난 파장이 일었다.
20위권 내에 고르게 포진되어 있던 아폴리온 최고 간부들의 랭킹이 급격히 치솟은 것이다.
언제나 6대 길드장들의 자리였던 1위부터 5위까지의 자리는 그들의 차지가 되었다.
크루거를 바로 밑까지 추격하던 철십자의 길드장, 시르의 랭킹은 6위까지 밀려났다.
심지어 단순히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소속된 상위 랭커들까지도 전력을 숨기고 있던 건 마찬가지였다.
현재 하이 랭커로 분류되는 100위권 내 랭커 목록 절반이 무려 아폴리온에 몸을 담고 있는 자들의 이름으로 도배되었다.
그나마 그 아래 랭커들의 순위엔 변동이 거의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다행이라고 할 수 없었다.
워로드에서 가장 강한 100명의 랭커 중 절반이 아폴리온의 소속이라는 것.
누구도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압도적인 격차였고, 그 사실이 주는 충격은 엄청났다.
“이게 말이 되는…….”
믿기지 않는 상황에 에일이 머리를 짚었다.
[‘생명의 어머니’가 강한 의문을 표합니다!]
[‘은밀한 탐구자’가 예상외의 상황에 흥미를 가집니다.]
[‘화산의 지배자’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합니다.]
신격들조차 알지 못했던 사실에 큰 동요를 보였다.
아무리 신이라고 해도, 워로드 바깥에서 일어난 일들까지 알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지금쯤 아무것도 모른 채, 이 소식을 접했을 플레이어들의 충격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전세계에서 엄청난 속도로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을 것이었다.
[‘빛의 심판자, 루’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봅니다.]
‘다른 6대 길드에 비해 훨씬 강할 거라 예상은 했지만, 설마 이스트혼의 전력이 이 정도일 줄이야.’
최초의 가상현실게임인 이스트혼은 한때 모든 유저가 모일 수밖에 없는 유일한 게임이었다.
헌데 그런 게임 속에서 모든 길드를 깨부수고, 통째로 손에 넣은 것이 바로 알키오네였다.
지금의 워로드급 게임을 완전히 장악하며, 인재를 쓸어 담았으니 강한 게 당연하다.
거기다 당시 알키오네는 이스트혼의 모든 유저를 뜯어내는 대신, 그만큼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그 덕에 알키오네의 내부 랭커들의 조건은 업계 최고 수준이었다.
괜히 이름난 랭커들이 일반 유저들에게 욕을 먹으면서도, 거리낌 없이 길드에 들어가 협력한 게 아니었다.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고, 길드 공식 홈페이지 폐쇄까지……. 이젠 일반 유저들에게 숨길 생각도 없다는 건가.”
다른 무엇보다도 눈속임용으로 이스트혼에 남아 있던 길드마저 갑자기 활동을 중지했다.
마치 더 이상 연기 따윈 전혀 필요 없다는 듯한 노골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그런 노골적인 움직임은 유저들의 귀로도 흘러들어갔다.
뒤늦게 아폴리온과 알키오네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유저들은 대혼란에 빠졌다.
지금 나오는 이야기들을 단순히 헛소문 취급할 수도 없었다.
누가 뭐라 한들 지금 모두에게 목격된 랭킹의 변화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과거 이스트혼 시절처럼 현재 워로드를 대체할 만한 게임이 없었기에 유저들의 공포는 더욱 커졌다.
여태 좋은 이미지만 가득하던 아폴리온 길드에게 반발하는 유저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규모가 있는 길드 사이에서는 지금이라도 빨리 아폴리온 쪽에 붙어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었다.
“일반 유저들이 반발한다 해도 아폴리온은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 어차피 워로드의 주된 전력은 길드들이에요. 그리고 그 길드들은 워로드에 생계를 비롯한 모든 게 걸려 있죠.”
앞서 걷던 알리사가 잠시 멈춰서며 말했다.
공식 랭킹이 아폴리온의 랭커들로 도배가 된 이상, 위험을 꺼릴 수밖에 없는 길드들은 지레 겁을 먹어 그들의 편에 붙을 확률이 높았다.
이스트혼에서의 오랜 경험 덕에, 그들은 사람들의 공포를 이용하는 것도 아주 능숙했다.
“그렇다면…….”
그때, 무심코 시선을 옮긴 에일은 알리사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줄곧 공주를 업은 채 뒤따라 걷느라 보지 못했던 그녀의 표정이 보였다.
평소와 달리 착잡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에일 님, 그리고 로덴 님도. 저한테 이상한 부분이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지만, 배려하는 마음에 캐묻지 않아 준 것쯤은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제가 거기서 망설이지 않았다면… 조금만 더 일찍 털어놨다면 이런 상황까지는 오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어쩌면…….”
“아뇨.”
에일의 그녀의 말을 끊었다.
“여기가 이스트혼이 아닌 워로드인 이상 예전 이야기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요. 알리사 님이 공주를 구해내고, 또 지하 던전의 절벽 위에서 끌어올려 줬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고요.”
에일은 과거 온라인게임에 푹 빠져 살았었다.
일찍 부모님을 잃었다는 점이나, 얼마나 형편이 어려운지.
현실에서 말 못 할 힘들었던 것들도 게임 속에서만큼은 신경 쓰지 않고 떠들며 웃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자신뿐 아니라 모두에게도 해당되었을 이야기일 것이다.
“결국엔 게임이잖아요? 말 못 할 비밀 좀 있으면 어때요.”
에일은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잠시 에일의 등 뒤를 바라보던 알리사는 그를 뒤따랐다.
“…고마워요.”
작게 들려오는 말소리.
보이진 않았지만,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띄워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콰아아앙!
그때 커다란 폭음이 통로를 뒤흔들었다.
맨 처음 입구 부분을 제외하면, 그들이 따로 함정을 설치해 둔 것은 없었다.
즉, 이번엔 함정이 아닌 유저들 간의 격렬한 전투 소리라는 뜻이었다.
“조금 전보다 많이 가까워졌네요. 서두르죠. 이런 곳에서 당해 줄 수는 없으니까요.”
* * *
콰드드득!
한쪽 벽이 통째로 뜯겨져 나갔다.
큰 충격에 튕겨져 나온 남자는 옷을 펄럭이며 다시 균형을 잡았다.
6대 길드 여명의 길드장, 솔로스.
세계 랭킹 3위이자 워로드 최강의 격투가였던 그는 급변한 랭킹에 격투가 1위의 자리를 놓아주어야 했다.
그것도 눈앞에 서있는 남자에게 말이다.
“그래도 생각보다 꽤 버티네.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너희도 어느 정도는 전력을 숨기고 있었다 이거지?”
피식 웃은 루칸이 느긋하게 다가왔다.
솔로스를 7위로 밀어내고, 현재 랭킹 3위를 차지하고 있는 알키오네의 초기 멤버이자 아폴리온의 최고 간부였다.
“후…….”
솔로스는 숨을 가다듬으며 루칸을 노려봤다.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남은 체력은 고작 14퍼센트.
반면 상대의 체력은 아직 절반이 넘게 남아 있었다.
아직 상대의 모든 패를 꺼내들게 하지도 못했고, 이대로는 승산이 없었다.
‘설마 이 정도였을 줄이야. 공주가 빠져나갈 시간만 벌어줄 생각이었는데… 그마저도 안 되는군.’
슬쩍 인상을 찌푸린 솔로스는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리곤 곧바로 스킬을 발동했다.
콰아앙!
주먹을 아래로 꽂자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통로를 가득 메우며 앞으로 뻗어져 나가는 폭발에 루칸은 방어 태새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솔로스는 재빨리 옆에 나 있는 통로로 몸을 피했다.
“이걸 쫓으면… 지는 거겠지.”
폭발을 상쇄시킨 루칸이 아쉬운 듯 주먹을 쥐었다 폈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6대 길드장의 목이라면 당연히 탐이 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솔로스가 살아 있건 죽었건, 이 판도에선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만약 끝까지 추적만 한다면 충분히 잡을 수 있겠지만,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기에 솔로스를 완전히 끝장내는 데에는 시간이 적잖이 소모될 것이었다.
하나 지금의 임무는 공주의 숨통을 끊는 것.
6대 길드장의 목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도 싸우던 도중에 운 좋게도 공주의 위치를 찾았으니까.”
주먹을 꽉 쥔 루칸의 입가가 비틀어졌다.
유일급 스킬인 ‘진동 감지’.
근방에 있는 유저들의 기척을 알아채는 강력한 패시브 스킬이었고, 벽을 넘어서나 심지어 눈을 감고도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 솔로스와 전투를 벌이던 도중.
저 아래쪽에서 느껴지는 세 명의 기척이 범위 안에 들어왔다.
“가볼까.”
쿠웅!
스킬을 시전한 루칸은 연달아 바닥을 뚫어냈다.
뿌리와 줄기들이 얽힌 통로였기에, 단단하다 해도 그의 주먹을 감당하기엔 무리였다.
콰아아앙!
천장이 박살 나며 잔해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자리엔 미리 전해 받은 얼굴들이 서 있었다.
“찾았다.”
“루칸……!”
난데없이 나타난 불청객의 등장에 에일이 물러섰다.
그것도 보통의 추적자가 아닌 아폴리온의 최고 간부.
에일은 급히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았지만, 랭킹 3위의 괴물을 상대로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막막했다.
하지만 그때 알리사는 그의 등장을 예상했다는 듯 당황하지 않고 앞으로 나섰다.
“에일 님, 먼저 가세요.”
“네?”
“여기서 시간이 끌리면 끝이에요. 제가 시간을 벌 테니 공주를 데리고 빠져나가세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순간 귀를 의심한 에일은 당연히 그녀의 말에 반발했다.
차라리 자신이 공주를 넘겨준 다음에 시간을 번다면 모를까.
전투 능력도 부족한 힐러를 혼자 남기고 가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실랑이할 시간 없어요.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공주의 목숨이에요. 만약 여기서 당하면 한 번 페널티를 받고 끝이지만, 공주를 빼앗긴다면 모든 게 끝장이라고요.”
“아무리 그래도 그건…….”
“그리고 무엇보다… 저한텐 빠져나갈 방법이 있어요. 저 이제 거짓말 같은 것 안 해요.”
“…….”
알리사의 단호한 뜻에 에일은 순간 말을 내뱉지 못했다.
하지만 곧 재촉하는 듯한 그녀의 눈빛이 그에게 닿았고, 에일은 업어든 공주를 데리고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지금은 그녀의 말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네가 워로드에 있다고 이야기는 대충 들었는데… 이런 일을 벌일 줄이야. 오랜만이네, 알레나.”
“공주를 쫓으려면 어서 시작하는 편이 좋지 않아? 나도 빠져나가려면 널 빨리 눕혀야 하는데.”
쩌엉!
인벤토리를 켠 알리사가 새로운 무기를 꺼내들었다.
220레벨제 마법창 ‘차가운 비탄’.
마법창은 기본적으로 물리와 마법 능력이 모두 갖춰져 있는 하이브리드 무기인 탓에 양쪽 모두 애매하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유일 등급 아이템인 이 녀석은 이야기가 달랐다.
파아아앗!
각종 버프 마법들이 발동되며, 빛이 알리사의 몸에 감돌았다.
“설마 진심으로 나랑 해보겠다는 건가?”
“지금이 농담할 상황은 아니니까.”
“하… 이봐, 네 실력은 나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그래 봤자 힐러. 그것도 랭킹권에 진입도 못 한 허접한 스펙으로는 아무리 너라고 해도 바뀌는 것 없어. 날 무시하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라고.”
“과연 그럴까.”
츠츠츠츳!
창을 들어 올린 알리사의 눈동자가 금빛으로 일렁였다.
[시스템 과부하, 오버드라이브 상태에 돌입합니다!]
[현재 동화율 -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