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격동의 장 (3)
카가강!
검을 받아친 에일이 주르륵 밀려났다.
다리 앞에서 마주한 두 랭커와 전투가 벌어졌고, 의식이 없는 세이아 공주를 뒤쪽에 챙기느라 다리를 밟아 보지도 못했다.
건너편에서 달려온 아폴리온의 랭커는 각각 800, 900위대의 실력자였다.
‘젠장,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치열한 접전에 에일의 애가 탔다.
알리사가 아직 랭킹에 진입하지 않은 데다가, 소수전 PVP에 취약한 힐러라는 걸 고려하면 생각보다 잘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그들을 상대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최대한 빨리 그들을 따돌리고 다리를 건너야 했지만, 순순히 놓아 줄 자들이 아니었다.
‘어떻게 따돌려 보려고 해도 틈을 주질 않으니.’
공주의 목숨에 큰 공이 걸린 만큼 적극적인 공세를 취할 법도 하지만, 그들은 오로지 방어와 견제 위주로 시간을 끄는 데 주력했다.
일말의 가능성을 차단하며, 승부수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
쓸데없는 자존심 세우지 않고 착실하게 길드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방어적으로 나선다고 해서, 마냥 소극적인 태도라는 건 아니었다.
언제든 공세로 전환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함부로 볼 수 없었다.
무리하게 그들을 뿌리치기 위해 아예 등을 내보였다간, 그 즉시 목이 꿰뚫릴 것이었다.
의식이 없는 공주가 뒤편에 놓여 있는 상황 탓에, 움직임이나 동선을 원하는 만큼 크게 가져갈 수 없는 것도 한몫했다.
그가 맡은 임무상 공주의 안전이 최우선 사항이었고, 상대가 노리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걸 써야 하나…….’
곁눈질한 에일의 시선이 스킬창으로 슬쩍 향했다.
새롭게 얻은 전설급의 액티브 스킬.
어떤 변수인지 아직 모르는 데다가, 한 번 사용하면 6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만큼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최후의 수를 꺼내 드는 것도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이쪽이야!”
그사이 그들의 뒤편에서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무려 아폴리온측 랭커가 4명이나 그들의 뒤편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앞뒤로 들이닥치는 랭커들의 모습에 포위당한 에일과 알리사의 낯빛은 어두워졌다.
빠져나갈 구멍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
“일단 공주부터 커헉……!”
콰앙!
순식간에 다가온 람빅이 랭커 하나를 벽으로 날려 버렸다.
나이트메어의 간부이자 강력한 하이 랭커의 등장에 아폴리온의 랭커들은 곧바로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나이트메어다!”
“근접 넷에 소환사 하나! 대응해!”
그들의 외침 소리와 거의 동시에, 검은 갑주를 두른 나이트메어의 랭커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미궁의 숲을 뒤지고 있던 건 아폴리온 측 랭커들뿐만이 아니었고, 천장이 무너져 내리며 뒤따라온 건 아군 랭커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카앙!
“공주 쪽부터 보호해!”
무기를 힘껏 휘두른 람빅이 외쳤다.
정신없이 얽혀 난전이 벌어진 상황 속에서 벽에 기대어 있는 공주는 물론, 에일과 알리사까지 보호하듯 뒤로 빼냈다.
콰과광!
“숲 안에 아폴리온 놈들이 많아 지상으로는 무리입니다! 빠져나갈 경로는 찾아 뒀습니까!”
연달아 폭음이 울리는 전장 속에서 람빅이 소리치며 물었다.
열이 넘는 랭커들이 부딪치며 만들어 내는 엄청난 굉음들 사이기에, 인상까지 찌푸려 가며 크게 이야기해야 겨우 들리는 수준이었다.
“예, 생각해 둔 곳이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지금 길드장님들도 이곳에 와 있습니다! 엄호할 테니 최대한 빨리 가십시오!”
나이트메어와 여명의 길드장인 카린이나 솔로스까지 이곳 미궁의 숲으로 직접 찾아든 상황.
이번 임무의 중요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부분이었고, 길드들이 사활을 걸었다고 해도 무방했다.
“론, 어서 해라!”
“알겠습니다!”
키이이익!
600위대의 소환사 랭커인 론.
그의 유니크 소환수인 와이번이 골짜기 아래에서 활공하며 모습을 드러냈고, 그들의 앞에 착지하자마자 입으로 물어 내던지듯 자신의 등에 태웠다.
“어서 가십시오! 공주만 손에 넣으면 이 싸움은 이긴 거나 다름없습니다!”
붕 떠오르는 감각 속에 람빅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러자 떠오르기 시작한 와이번의 등 뒤에서 에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후웅!
단숨에 날개를 펼친 와이번은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방향을 돌렸다.
아폴리온의 랭커는 당연히 그를 막기 위해 활시위를 당겼지만, 단숨에 거리를 좁혀든 람빅이 그를 저지했다.
“저쪽으로 가자.”
세이아를 단단히 부여잡은 에일은 와이번에게 방향을 가리켰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다리를 건넜겠지만, 골짜기 아래쪽으로 빙 돌면 지름길을 통해 올라갈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아예 이 녀석을 타고 끝까지 빠져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마력으로 움직이는 유저들의 소환수는 유지 시간이 있는 데다가, 시전자로부터 일정 거리 이상으로 벗어날 수 없었다.
“저분들 덕분에 한 고비 넘겼네요.”
“네, 아직도 많이 남은 게 문제지만요.”
에일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답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점점 커져 가는 랭커들의 싸움 소리가 귀에 닿았다.
* * *
파앗!
지하 던전을 빠져나온 에일과 알리사에게로 햇빛이 쏟아졌다.
소환수의 도움을 받아 경로를 대폭 줄인 덕에 지상의 숲으로 무사히 올라올 수 있었다.
물론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러고도 중간에 마주한 추적자들이 있었지만, 20위의 하이 랭커인 아리에를 비롯한 여명 측 랭커들이 재빨리 가세해 준 덕에 겨우 빠져나갈 수 있었다.
추적이 얼마나 집요한지, 만약 랭커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바로 이 근처였죠?”
“이쪽이에요.”
자세를 낮춘 알리사가 앞장섰다.
겨우 지하 던전을 빠져나오긴 했지만, 지상의 숲에도 아폴리온의 길드원들이 도사리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다소 빙 돌면서도 이쪽 출구를 택한 이유가 있는 법.
파아앗!
그들이 조심스레 거목과 바위가 얽힌 수풀 뒤쪽으로 들어서자, 숨겨져 있던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후, 여기까진 어떻게 왔네요.”
에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은 일명 ‘뿌리의 길’이라 불리는 거대한 지하 통로였다.
아주 멀리까지도 뻗어져 있는 통로와 복잡한 길목들로 나뉜 지형 때문에, 지형을 알고만 있다면 달아나는 입장에선 아주 유용한 도주 수단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안심하기는 한참 이르지만…….’
지금 그들의 상대는 수많은 랭커이다.
극히 알려지지 않은 통로에 들어섰다고 해도 흔적까지 일일이 지울 시간은 없는 탓에, 추적해 오던 아폴리온의 길드원들이 곧 이곳을 찾아내 뒤쫓아 올 것이었다.
“어서 가죠.”
“네.”
간단한 작업을 하느라, 잠시 멈춰 섰던 그들은 다시 부지런히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입구 안쪽으로 들어가자 길게 이어져 있는 통로엔 크고 작은 줄기들이 이리저리 얽혀 있었다.
이름 그대로 통로의 내부는 거목의 몸속 같은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길을 완전히 잃을 리는 없었다.
‘지도로 보는 거랑 좀 다르긴 한데, 이 정도야 뭐.’
둘은 모두 이곳의 구조에 대해 어느 정도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기에, 복잡한 지형에도 크게 헤매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자신들을 쫓아올 추적자들만큼은 이 복잡한 길속에서 헤매 주길 바랬다.
하지만 그들 또한 최상급의 추적 스킬이나 아이템들을 펑펑 쏟아부을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쿠우웅!
바로 그 순간, 멀찍이서 옅은 폭음과 함께 큰 울림이 전해져 왔다.
“이런…….”
“벌써 쫓아온 모양이에요.”
에일과 알리사가 동시에 반응했다.
방금 그 폭음과 떨림은 마법 스크롤을 이용해 입구에 설치해 둔 간단한 폭발 함정이 발동한 소리였다.
추적자들이 입구 안으로 들어서면 발동되도록 만들어 둔 장치이기에, 벌써 랭커들이 자신들을 쫓아 통로 안에 들어섰다는 의미였다.
역시 처음부터 들키지 않았다면 모를까, 한번 발각된 이상 집요하게 따라와 놓치지 않을 거라는 것쯤은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도주로로 이곳을 선택한 것에 있어선 단지 입구가 숨겨져 있다거나 복잡한 지형 때문만이 아니었다.
여러모로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계획대로만 되어 준다면 놈들을 충분히 따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앞장서 걷고 있던 알리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에일 님, 더 이상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니 여기서 이야기해야겠네요. 알키오네, 그리고 아폴리온에 대해서.”
“…말씀하시죠.”
그녀의 말에 에일이 반응했다.
원래 지하 던전을 빠져나가면서 천천히 말해 주기로 한 부분이었지만, 워낙 정신이 없던 상황이라 굳이 묻지 않던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아폴리온 길드와 적대 중이란 걸 생각하면, 전신인 알키오네에 대한 정보도 반드시 필요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모두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들뿐이었다.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초창기의 알키오네는 7명의 멤버가 모여서 만들어진 길드였어요.”
“그야 물론 알고 있습니다.”
에일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게이머 중 알키오네를 7명이 모여 만들었다는 일화는 물론, 그 일곱 유저의 닉네임을 모르는 이가 사실상 없을 정도였다.
당시 워로드 급의 파급력을 지니던 이스트혼의 랭킹에서 1위부터 7위까지 모조리 압도적인 수치로 휩쓸었던 이들.
게임의 오픈 이후, 뒤늦게 결성된 알키오네를 압도적인 위치로 키웠던 게 바로 그들이었다.
길드 마스터나 부마스터 등, 최대 세력으로 큰 이후에도 창립 멤버들이 최고 간부직을 모조리 차지한 점은 변동이 없었다.
“그때 멤버들은 현재 워도르에서 모두 얼굴을 드러낸 채 활동하고 있어요. 켈베로스의 길드장인 유론도 그중 하나죠.”
“아니, 잠시만… 그건 무슨?”
너무도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에일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2세대 게임인 아르메니아 온라인에서부터 이어진 명문 길드, 켈베로스.
그런 켈베로스의 대표이자, 워로드 6대 길드장 중 하나로 절대적 명성을 누리고 있던 유론이 알키오네의 출신이라니.
하지만 그녀의 말이 전적으로 맞다는 가정하에 한 가지 생각이 에일의 머리를 번뜩 스쳐 지나갔다.
“잠깐, 그렇다면 켈베로스가 갑자기 철십자에 전쟁을 건 것도 그것 때문…….”
“네, 맞아요.”
알리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켈베로스가 바로 옆에서 급성장하는 아폴리온을 견제하지 않고, 북부의 철십자와 전쟁을 택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
아폴리온과 처음부터 손을 잡을 생각이었다는 정도가 아닌, 아예 알키오네의 간부 출신이 6대 길드의 길드장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확실히 이해 가지 않는 행동이긴 했지만, 이게 무슨…….’
당혹감이 서린 에일의 표정은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설마 6대 길드장이 고작 알키오네의 간부 중 하나였다니, 충격을 쉽사리 떨치지 못했다.
하지만 다음에 올 그녀의 말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이스트혼에서 활동하던 시절, 저도 알키오네의 간부였어요. 더 정확히는 창립 멤버 중 하나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