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길을 뚫다 (3)
“네?”
그걸 사용하자는 에일의 말에 알리사가 반응했다.
레이드에 돌입하기 전, 그들이 마련해 놓은 비장의 수단.
다소 이른 듯 보이는 그의 결정에 그녀가 물어왔다.
“아직 체력이 30퍼센트나 남았는데, 괜찮을까요. 지속 시간이 끝났을 타이밍에 네 번째 페이즈라도 나타나면…….”
“아뇨, 지속 시간 안에 끝낼 겁니다. 뭣보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아요.”
에일이 단호하게 답했다.
남은 시간은 고작 이십여 분.
잡았던 주도권을 레기아스의 급변한 분위기에 휘말려 놓친 이상, 이대로 가다간 답이 없었다.
지금이라도 기점을 잡아 빠르게 녀석을 끝장내지 못하면, 그 방법을 아껴 놓는다 한들 무의미했다.
“알겠어요.”
고개를 끄덕인 알리사가 창을 바로 쥐었다.
아직 에일과 이 방법으로 호흡을 맞춰 본 적은 없었지만, 지금의 상황에선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우선 레기아스의 더욱 커진 공격 범위에 당할 일이 없도록 뒤로 훌쩍 물러났다.
반면 에일은 앞으로 성큼 나섰다.
파아아앗!
알리사의 창에 푸른빛이 감돌았고, 그와 동시에 에일에게 깃들었던 모든 버프 효과가 사라졌다.
그리고 에일의 상태창에는 새롭게 나타난 단 한 가지의 버프 효과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타악!
그를 확인한 에일은 곧바로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레기아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공격을 시작했다.
녀석의 날개짓에 날카로운 바람이 주변을 휩쓸었고, 팔과 꼬리가 휘둘러질 때마다 놀라운 범위가 초토화되었다.
조금 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엄청난 범위 공격으로 인해 구역 전체가 온통 부서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장 보이는 것과는 달리, 에일이 처음 당황해 범위 공격에 휩쓸렸을 때와는 전투의 양상이 달랐다.
‘충분히 할 만해.’
금빛으로 물든 에일의 눈동자가 바쁘게 돌아갔다.
놀랍게도 한층 더 강력해진 레기아스의 공격은 에일에게 전혀 닿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겉보기에만 요란하다거나, 에일의 운이 좋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 에일을 감싸고 있는 단 하나의 버프.
치유사 직업의 유일급 버프 스킬, ‘기원’의 영향이었다.
대상에게 걸렸던 모든 종류의 버프가 사라지는 대신, 오직 한 가지 능력에만 커다란 버프를 주는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전반적인 능력치를 골고루 올려 주는 평범한 버프의 중첩이 아닌, 아주 극단적인 효과의 스킬이었다.
이런 방식은 당연히 리스크가 컸고, 등급과는 별개로 활용하는 이들의 컨트롤과 센스가 아주 중요했다.
그리고 지금 에일에게 적용된 스킬의 버프는 바로 ‘속도’였다.
콰아아아!
쩌억 벌어진 입에서 브레스가 내뿜어졌다.
전방을 온통 뒤덮을 만큼 큰 범위의 숨결이었지만, 미리 움직임을 읽어낸 에일은 그를 파훼해 가뿐히 피해냈다.
일반적으로 상대의 수를 모두 읽어낸다 해도, 이런 광범위한 공격을 피할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였다.
그렇기에 극단적으로 상승한 속도의 역할이 중요했다.
에일의 반사 신경, 그리고 오버드라이브의 작용으로 읽어낸 공격의 반응을 에일의 몸이 완전히 따라와 주었다.
콰드드득!
레기아스가 마력을 방출하자 바닥이 날카롭게 솟아났다.
허나 에일은 오히려 놀라운 속도로 정면으로 파고들어 가며, 단숨에 녀석의 코앞까지 다다랐다.
‘물론 속도만 극대화시켜 봤자, 시간 안에 끝내긴 무리겠지.’
레기아스의 머리 앞에 붕 떠오른 에일이 생각했다.
놈의 물리 저항은 무려 85퍼센트.
아무리 속도가 빨라져서 많은 공격을 가해 봤자, 녀석이 가진 높은 내구력은 변함이 없었다.
더군다나 속도를 폭발적으로 증가시키는 대가로 기존에 받던 공격과 방어구 관통 버프도 사라졌으니, 지속 시간 내에 클리어가 어려울 거란 것도 여전했다.
‘하지만……!’
장검이 레기아스의 바로 앞까지 다가선 순간, 그에게 주어졌던 버프가 갑작스레 바뀌었다.
알리사의 버프는 어느새 ‘속도’가 아닌 ‘힘’으로 전환되어 있었다.
콰아아앙!
에일의 검 끝에서 막대한 대미지가 터져 나왔다.
전환된 스탯 덕에 커다란 충격이 가해졌고, 요지부동이던 레기아스의 체력은 큰 폭으로 줄어들었다.
‘좋았어!’
주먹을 불끈 쥔 에일이 알리사와 시선을 짧게 주고받았다.
완벽한 타이밍에 이루어진 버프 전환이었다.
그녀의 스킬, 기원은 유지하는 데 상당한 양의 마나를 소모하는 대신 쿨타임이 곧바로 활성화되지 않았다.
스킬의 최대 지속 시간인 15분간은 활성화와 비활성화가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것은 곧 언제든 버프를 전환할 수 있다는 뜻이었고, 활용법이 무궁무진하게 늘어남을 의미했다.
물론 시전자와 버프를 받는 유저, 양쪽 모두의 실력과 호흡이 수준급이어야 가능할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점은 그들에겐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쩌엉!
키에에엑!
자유자재로 변환이 이루어지는 버프.
그는 대미지와 속도, 양쪽 모두를 챙기며 레기아스를 정면으로 파훼해 버리고 있었다.
알리사가 최근에야 얻은 신규 스킬인 탓에 미리 합을 맞춰 본 적이 없었음에도, 정말 놀라운 호흡을 보였다.
그 덕에 보스의 체력은 빠르게 깎여 나갔다.
불과 10분도 되지 않아, 남은 체력은 불과 10퍼센트대까지 곤두박질쳤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공략 전 존재하는 건 아닌 지 우려했던 4페이즈로의 진입이 시작되었다.
쩌저저적!
“이건…….”
레기아스의 짜지어진 몸뚱이가 마구 뒤틀리기 시작했다.
원래의 모습보다도 한층 더 흉측하게 변하며, 수많은 얼굴들이 녀석의 몸 위에서 비명을 지르며 꿈틀였다.
얼마 남지 않은 체력이 깜빡였지만, 녀석의 물리내성은 88퍼센트까지 치고 올랐다.
“정말 징하게…….”
콰아아아아!
레기아스의 입에서 뻗어져 나간 브레스가 그를 지나쳐 갔다.
겨냥을 잘못한 건지 지나치긴 했지만, 녀석이 보이던 브레스와는 완전히 달랐다.
말도 안 되는 속도 탓에 에일조차 보고 뒤에 피하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였다.
“읏…….”
알리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방금의 공격은 에일이 아닌 그녀를 노린 것이었고, 뺨에선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마저도 브레스를 보고 피한 것이 아니라, 사전 동작을 미리 감지한 덕에 겨우 반응한 것이었다.
파스스.
그녀의 뒤로는 접촉면이 완전히 사라진 기둥들이 휑하게 놓여 있었다.
지하 던전의 두터운 벽조차 여러 겹을 뚫고 관통한 브레스는 더 이상 고위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즉사기…….’
미간을 좁힌 에일은 주저하지 않고 앞으로 뛰어들었다.
4페이즈에 진입하자마자 이런 위협적인 패턴을 보인 레기아스였고, 예측이 어려운 변수를 줄이기 위해선 최대한 빠르게 끝장을 내야 했다.
하나 그가 검을 두어 번 휘둘러 대미지를 입힌 순간, 녀석의 몸에서 보랏빛 파장이 일어났다.
드드드드!
‘다른 패턴인가?’
덜덜 떨리고 있는 땅에 에일은 바닥에서 솟아날 공격에 대비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던전 안의 온갖 잔해들이 붕 떠올랐고, 레기아스는 염동력을 사용해 잔해들을 날려 보냈다.
녀석이 조종하는 물체는 작은 파편부터 커다란 바위까지 다양했다.
콰악!
파편들을 피해 접근한 에일은 레기아스의 목 부근에 올라타 검을 깊숙이 박아넣었다.
하지만 녀석이 고통에 발버둥치는 것과는 별개로, 한 번 폭주하기 시작한 염동력은 멈추지 않았다.
콰아앙!
“큭…….”
제법 커다란 파편에 얻어맞은 에일이 튕겨 나갔다.
30퍼센트까지 줄어든 그의 체력.
원래대로라면 목숨까지도 위험했을 수치였지만, 순간적으로 버프 스킬을 전환시켜 방어력을 극대화시킨 덕에 무사할 수 있었다.
체력이 줄어들었지만 곧바로 힐이 들어왔고, 체력이 가득 찼다.
쿠구구구구!
폭주한 염동력은 점점 더 날뛰는 중이었다.
겉잡을 수 없이 거칠어지는 패턴에 에일은 소리쳤다.
“아무래도 작은 건 흘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해했어요!”
뒤편의 알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후방에 있는 그녀도 날아드는 기둥 파편과 바윗덩어리에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다.
중앙으로 파고드는 에일보다는 공세가 덜하다고는 하나, 버프도 없이 양쪽의 상황을 신경 써야 하는 그녀도 언제 당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만약 그들 중 어느 한쪽이라도 당하게 된다면 공략은 실패나 다름없었고, 기원 스킬의 지속 시간이 끝나기 전에 최대한 빨리 결판을 내야했다.
콰악!
레기아스에게 접근한 에일의 머리에 묵직한 파편 하나가 부딪혔다.
시야가 흔들렸지만 이를 빠득 간 에일은 힘껏 검을 내리쳤다.
지금 그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보스의 체력 상황이었다.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는 저 많은 물체 사이에서 모든 공격을 피할 순 없었다.
큰 파편은 피하되 작은 파편은 죽지 않을 선에서만 흘려 주며, 맞는 순간엔 방어력을 상승시켜 피해량을 반감시켰다.
어느 공격을 피하고, 어떤 공격을 흘릴지.
그를 보조하고 있는 알리사는 어느 순간에 어떤 능력치 증폭이 필요한지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내렸다.
동시에 에일은 그런 그녀의 판단과 자신의 판단이 일치할 것이라 전적으로 믿으며 움직였다.
조금이라도 망설이는 순간, 호흡은 깨지고 말 것이었다.
키이이이이익!
레기아스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지금의 전투가 가상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온몸이 저릿저릿해 왔고, 어느새 그의 동조율은 131퍼센트를 돌파한 뒤였다.
기원 스킬의 유지 시간은 불과 20초밖에 남지 않았다.
지속 지간이 끝나면 버프 없이 녀석과 싸워야 했고, 이번 시나리오 자체의 제한 시간마저도 얼마 남지 않은 걸 생각하면 큰 낭패를 볼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콰드드득!
재차 박아 넣은 에일의 장검이 단단한 뼈를 박살 내며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그리고, 레기아스의 체력은 마침내 4퍼센트대에 진입했다.
“에일 님!”
“봤습니다!”
에일과 알리사는 녀석의 체력바를 거의 동시에 포착했다.
그러자 그들은 방향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이미 폭주를 시작한 레기아스는 등을 보인 그들을 앞뒤 가리지 않고 곧장 쫓았다.
[스킬, ‘기원’의 지속 시간이 만료되었습니다!]
결국 자리를 옮기는 사이, 유지되던 버프가 사라지고 말았다.
최종 시나리오의 클리어 시간도 불과 몇 분밖에 남지 않은 상황.
하나 뒤로 돈 에일의 얼굴엔 망설임이 없었다.
키에에엑!
그들이 멈춰선 곳은 성역의 앞.
이번 전투를 막 시작했던 절벽 아래로 다시 돌아온 셈이었다.
하나 그때완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처음 자리를 옮기는 과정에서 미리 흘려 둔 수많은 폭발 스크롤들이 절벽 아래에 놓여 있었다.
이성을 잃은 레기아스가 절벽 아래로 다가온 순간.
“끝이다.”
콰아아아앙!
녀석의 발치 아래에 있는 스크롤들이 일시에 터져 나갔다.
혹시 몰라 남겨 둔 공헌도의 대부분을 썼던 만큼, 폭발의 위력은 대단했다.
물론 스크롤의 폭발 마법이 얼마나 강하다 한들, 마법 면역 특성을 지닌 레기아스에겐 아무런 대미지도 주지 못했다.
하지만 에일이 노린 것은 조금 다른 쪽이었다.
쿠구구궁!
커다란 절벽이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해도 레기아스는 폭발의 반동에 곧바로 움직이진 못했다.
키이이익!
녀석은 결국 무너지는 절벽 아래에 그대로 깔리고 말았다.
아무리 물리저항을 지니고 있다고 한들, 고작 4퍼센트 남은 상태로 저 암벽 아래에 깔린 이상 무사할 순 없었다.
레이드 시작 전부터 준비해 둔 마지막 마무리.
마지막 페이즈에 진입한 순간이 가장 고비였던 것을 예상했기에 끝까지 남겨 두었던 카드였다.
쿠웅!
하지만 안도할 새도 없이, 곧바로 잔해로 다가간 그들은 가득 쌓인 암석들 사이에서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여기 있어요!”
잔해 안에서 푸른빛이 새어 나오는 걸 발견한 알리사가 외쳤다.
그러자 서둘러 달려든 에일은 방어막에 보호받고 있던 공주를 꺼내 들었다.
절벽 위 성역에 남겨 두었던 공주가 이 폭발 속에서도 무사할 수 있었던 건, 그녀가 반지로 끼고 있던 왕가의 아티팩트 덕이었다.
“휴, 다행히 무사하네요.”
먼지 하나 뒤집어쓰지 않은 채 새근거리고 있는 세이아의 모습.
무사한 그녀의 모습을 본 그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왕족을 이렇게 막 다뤄도 되나 싶었지만, 상황이 여러모로 여의치 않은 탓에 나름 최선의 수를 쓴 것이었다.
“저희… 해낸 거 맞죠?”
“확실히요.”
풀썩!
다리가 풀린 에일과 알리사가 동시에 주저앉았다.
[최종 시나리오가 완료되었습니다!]
[모든 시나리오를 클리어해, 막대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기준보다 훨씬 적은 공략 인원수로 인해, 두 배의 추가 보상이 주어집니다!]
[신격의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대량의 경험치와 공헌도를 획득하였습니다!]
[죄악의 존재, 신성모독자를 처단하였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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