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길을 뚫다 (2)
시나리오 던전의 보스, 레기아스 레이드에 돌입하기 전.
에일은 우선 알리사에게 녀석이 지닌 패턴과 특성 등 주의해야 할 사항들을 모두 알려 주었다.
그녀가 시나리오 던전의 등장 조건을 발동시켰다고 해도 직접 들어간 게 아니었으니, 보스의 패턴같이 내부에 관련된 정보는 없었다.“이만하면 된 것 같죠?”
“아직 나온 건 2페이즈뿐이니까요. 직접 부딪혀 봐야죠.”
씩 웃은 에일과 알리사가 절벽 앞에 나란히 섰다.
[‘빛의 심판자, 루’가 당신을 노려봅니다.]
‘아까부터 무슨 일이지……?’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에 에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전부터 이상하게 심기가 불편한 모습을 보이는 루였다.
아마 알리사와 만난 이후로 인 듯한데, 처음 보는 사이도 아니고 갑자기 왜 이러는 지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콰아아아!
“이크.”
그들이 절벽 끝에 모습을 드러내자 기다렸다는 듯이 브레스가 날아왔다.
쩌렁쩌렁한 포효를 내질리는 걸 보니 바짝 약이 오른 듯 보였다.
하지만 녀석이 브레스를 허공에 날렸다는 건, 다음 브레스가 모이는 동안은 독기를 내뱉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갑니다!”
에일의 신호가 떨어지자, 둘은 단숨에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죽을지도 모를 만큼 상당히 높은 높이였지만, 그들은 주저하지 않았다.
쿠웅!
레기아스를 피해 무사히 바닥에 착지했다.
다리가 쩌릿쩌릿했지만 스턴에 빠지지는 않았고, 체력도 절반 정도만 줄어들어 있었다.
낙하 대미지를 큰 폭으로 줄여 주는 알리사의 포션 덕이었다.
쨍그랑!
곧바로 체력을 도로 최대치까지 회복시키고, 포션을 집어던진 에일과 알리사는 옆으로 나 있는 통로로 향했다.
레기아스는 당연히 에일을 절대 놓치지 않으려 매섭게 뒤를 쫓아왔다.
‘좋아, 그래야지.’
그들이 등을 보인 것은 단지 장소를 옮기기 위함이었다.
절벽 아래엔 이미 너무 많은 독기가 모여 있었고, 곧바로 위치를 바꿔 줄 필요가 있었다.
“에일 님!”
“네!”
촤아악!
고개를 끄덕인 에일은 순식간에 발을 틀며 뒤를 돌아섰다.
그리곤 정신없이 쫓아오던 레기아스에게 검을 휘둘렀다.
갑자기 뒤를 돌지는 몰랐는지 녀석은 제대로 반응을 하지 못했고, 정면에서 휘둘러진 ‘심판의 일격’이 직격되었다.
콰드드득!
현재 에일이 지닌 최고의 단일 공격기인 만큼, 레기아스의 체력이 뭉텅 떨어져 나갔고, 부가 효과인 스턴까지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보스의 아래로 파고든 알리사가 창을 휘둘렀다.
방금 에일의 대미지에 비해 한참 못 미치긴 했지만, 비록 힐러라고는 해도 무시할 순 없는 대미지가 들어갔다.
힐러인 그녀가 보스급 몬스터인 레기아스에게 나름 유의미한 피해를 줄 수 있던 이유는 간단했다.
[힘 스탯이 대폭 증가하였습니다!]
[민첩 스탯이 대폭 증가하였습니다!]
[체력 스탯이 대폭 증가하였습니다!]
[방어구 관통력이 증가하였습니다!]
[독 내성이 소폭 증가하였습니다!]
.
.
.
어느새 알리사의 버프가 에일과 그녀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무려 200레벨대가 넘는 전문 힐러의 보조 스킬인 만큼, 어중간한 직업들의 버프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중첩될 수 있는 버프 개수의 최대치 직전까지 주어진 스킬들.
지금 에일의 스펙은 혼자 레기아스에게 달려들 때보다 훨씬 더 강해져 있었다.
쿠우웅!
그때 레기아스가 크게 몸부림치며 충격파가 불어 닥쳤다.
접근해있던 둘은 충격파에 맥없이 튕겨 나갔고, 겨우 균형을 잡으며 바닥을 미끄러졌다.
에일은 지체 없이 곧바로 녀석에게 다시 접근했다.
반면 알리사는 녀석에게 섣불리 접근하지 않고 거리를 유지했다.
그러자 에일이 계속해서 레기아스와 붙어 싸우고 있음에도 충격파는 발생하지 않았다.
‘좋았어!’
충격파 패턴의 발동 조건은 레이드 참가한 인원 중 과반수가 근접해 있어 보스가 위협을 느낄 때였다.
알리사가 접근하지 않고 후방에 남아 있는 이상, 충격파가 발생할 일도 없다는 뜻.
다인을 기준으로 설계된 워로드의 보스 몬스터들에게 이런 패턴이 제법 많은 편이었기에, 미리 추측해 봤던 것이었는데 가설이 적중헀다.
게다가 그들이 방금 상황에서 알아낸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방금 몇 초였죠?”
“9초요!”
알리사가 답하며 앞으로 나섰다.
사납게 날뛰는 레기아스의 뒤편을 돌며 창을 비늘 속에 박아 넣었고, 끊임없이 녀석을 교란했다.
그녀 자체가 최대한의 대미지를 넣으려 하기보다는, 주력 딜링을 책임지는 에일을 자유롭게 해주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원래 레이드에 참가한 두 명이 모두 동시에 접근한다면, 충격파 패턴이 발동되어야 했다.
하지만 레기아스는 충격파를 발산하지 않았다.
파앗!
침착하게 시간을 염두에 두었던 알리사가 어느 순간 뒤로 크게 빠졌다.
예상대로 레기아스의 충격파 패턴이 발동되는 시점은 접근한 뒤 9초가 지났을 때였다.
그 사실을 알아낸 알리사는 보스가 위협을 느끼기 직전까지 근접해 시선을 끈 뒤, 뒤로 빠져 시간을 초기화한 다음 다시 접근하기를 반복했다.
에일의 움직임을 자유롭게 만들어 줌과 동시에, 충격파에 맞는 일도 없었으니 흐름이 깨지거나 딜로스가 발생하는 일 없이 안정적으로 대미지 딜링이 가능했다.
그런 그녀의 보조에 에일은 일섬, 불의 세례 등의 고위력 기술들을 쏟아가며 최대한의 대미지를 욱여넣었다.
콰아아아!
그 순간 다시 모인 레기아스의 브레스가 뻗어져 나왔다.
에일과 알리사는 동시에 양옆으로 흩어지며 브레스를 피해내긴 했지만, 피한다고 끝나는 문제는 아니었다.
치이익!
두 번째 페이즈에 진입하며 더욱 강해진 레기아스의 독기가 퍼졌다.
[지독한 독기로 인해 체력이 크게 줄어듭니다!]
고작 한 번의 브레스 만으로 오염된 공간.
그 탓에 그들의 체력도 계속해서 줄어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에일은 줄어드는 체력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검을 휘둘렀다.
지금은 혼자서 레이드를 시도했던 것과는 상황이 달랐다.
[찬란한 치유의 빛이 당신을 감쌉니다!]
알리사의 지속 치유 스킬이 발동되자, 줄어들던 체력바는 다시 주르륵 차오르기 시작했다.
뒤를 받쳐주는 힐러의 존재.
강한 독기가 체력을 갉아먹는다 해도, 일정 수준까지는 회복으로 커버가 가능했다.
물론 녀석의 독기는 브레스를 내뿜을 때마다 더욱 강해졌고, 알리사의 힐로도 감당할 수 없는 순간이 다가왔다.
“에일 님!”
“알겠습니다!”
바로 그럴 땐 또다시 레기아스를 유인해 위치를 옮기며 전투를 이어갔다.
파티의 체력창과 각종 상태이상을 계속해서 확인하고 있는 알리사의 신호에 따라서 움직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것이 최고 수준의 레이드에서 요구되는 힐러의 역할이었고, 메인 딜러 역을 맡은 에일은 그저 대미지를 최대한 쑤셔 넣는 데 집중할 뿐이었다.
콰아아앙!
‘신성 폭발’ 스킬로 장검에 깃들었던 신성력이 터지며 큰 폭발을 만들어 냈고, 레기아스의 거체가 크게 흔들렸다.
키에에에엑!
‘젠장, 골치인 건 여전하네.’
대미지를 입을수록 더욱 날뛰는 보스에 에일은 땀을 삐질 흘려가며 검을 바로 잡았다.
분명 주도권을 잡은 채 전투를 이끌어가고 있는 건 맞았다.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녀석을 엄청나게 두들겼음에도, 아직 레기아스의 체력은 꽤나 남아 있었다.
‘웬만한 보스라면 벌써 두세 마리는 잡았을 수준인데, 어지간히도 애를 먹이는 자식이야.’
현재 레기아스의 남은 체력은 31퍼센트.
그동안 많이 줄이긴 했지만, 끝이 보이고 있다곤 할 수 없었다.
2페이즈에 진입하며 82퍼센트까지 치솟은 레기아스의 물리 내성은 여전히 골치덩이였다.
수십 분을 두들겨도 체력이 쉽게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음 페이즈도 남아 있을 테고, 남은 시간도 촉박해…….’
좋지 않게도 마지막 시나리오엔 시간제한까지 걸려 있었다.
어느새 그에게 주어졌던 2시간 55분이라는 제한 시간은 30분도 채 남지 않았다.
단순히 보스가 어딘가로 물러날지, 아니면 녀석이 급격히 강해지며 강제 실패 처리가 될지.
워로드의 던전 특성상, 제한 시간을 넘겼다간 어떤 일이 생길지 몰랐다.
콰악!
그때 에일의 장검이 레기아스의 옆구리를 찔렀다.
놈의 체력은 드디어 30퍼센트까지 떨어졌고, 날뛰던 녀석의 움직임이 순간 뚝 하고 멎었다.
‘뭐지?’
갑자기 드는 위화감에 에일이 녀석을 바라봤다.
“잠깐……!”
깜짝 놀란 알리사가 멈칫했다.
정보창으로 떠올라 있던 레기아스의 이름색이 바뀌어 있었다.
‘에픽 보스……?’
30퍼센트대 체력에 돌입하며 발동된 세 번째 페이즈.
이미 끔찍한 난이도를 가지고 있던 녀석은 새로운 페이즈에 접어들며 아예 보스로서의 등급 자체가 바뀌어 버렸다.
후웅!
레기아스의 두 팔이 크게 위로 올라갔다.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에일과 알리사는 서둘러 녀석의 팔이 닿을 범위 밖으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소용이 없었다.
콰과과과광!
지면을 강타한 거대한 충격.
막대한 충격은 바닥을 타고 퍼져, 주변을 온통 뒤집으며 파괴했다.
고작 공격 한 방에 던전 내부는 난장판이 되어버렸고, 기둥이 무너져 내린 잔해 속에서 에일은 겨우 고개를 내밀었다.
“퉷.”
에일이 입에 고인 피를 뱉어냈다.
느닷없이 이루어진 등급 상향, 게다가 이런 공격이 나올 거라고는 예상도 하지 못했기에 순간 반응을 하지 못했다.
‘하긴 이 정도면 에픽 보스가 아닌 게 이상할 정도였지.’
쿠웅!
옆에서도 이마에 피를 흘린 알리사가 잔해를 빠져나왔다.
“괜찮으세요?”
“네… 일단 힐부터 할게요.”
알리사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할 틈도 없이 치유 마법을 사용했다.
하얀 빛과 함께 체력이 주르륵 차올랐다.
크르르르.
레기아스가 낮게 울고 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녀석은 자기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미쳐 날뛰던 방금 전과는 달리, 오만한 눈으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
엉망인 키메라의 모습이지만 뒤늦게 용으로서의 자각이라도 한 걸까.
그런 녀석의 모습에 에일은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여태 봐왔던 모든 몬스터 중에서 가장 어려운 상대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3페이즈에 들어서며 더욱 올라간 물리 저항은 85퍼센트가 되어 있었고, 더군다나 특성 창엔 ‘모든 상태 이상에 대한 내성’까지 생겨났다.
세 종류의 내성을 모두 지닌 데다가, 두 가지는 완전 면역 상태.
악명 높던 미궁의 숲에서도 정점의 위치에 서 있는 녀석답게 그야말로 끔찍한 상대였다.
“넌 진짜 아이템 제대로 안 주면 천벌 받을 거다.”
콰악!
에일이 잔해 사이에 꽂혔던 장검을 뽑아들었다.
“알리사 님, 그걸 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