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길을 뚫다
전혀 예상치 못한 얼굴.
알리사와 마주친 에일은 순간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봤다.
하지만 알리사는 맞잡았던 손을 힘껏 당기며 에일을 절벽 위로 끌어올렸다.
콰아아아!
등 뒤로 맹독 브레스가 쏟아졌고, 방금까지 에일이 있던 자리를 완전히 녹였다.
직격당했다면 그대로 죽었을 테고 굉장히 아슬아슬했다.
하지만 브레스를 쏘아냈던 레기아스는 차마 절벽을 타고 올라와 그를 쫓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에일과 알리사는 이미 안전지대 범위 내로 들어와 있었다.
새하얀 빛이 주위를 감싸고 있었고, 보스 몬스터조차 다가오지 못하는 성역의 존재에 레기아스는 그저 닭 쫓던 개처럼 절벽 위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릴 뿐이었다.
“시나리오 던전에 휘말렸던 거 맞죠? 혹시 추적자들이 들어서면 시간을 벌려고 활성화시켜 둔 거였는데… 설마 에일 님이 가장 먼저 찾아올 줄은 전혀 생각도 못 했어요.”
“그보다 대체 여긴 어떻게…….”
무의식적으로 시선 옮긴 에일은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성역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모닥불의 앞.
세이아 공주가 몸을 웅크린 채 쓰러져 있었다.
에일이 급히 그녀에게 다가갔지만,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고 의식이 전혀 없었다.
“주, 죽은 건 아니죠?”
“그럼요.”
알리사의 말에 에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숨은 붙어 있는 듯했고, 상황을 뒤집을 최후의 수단이 물거품이 될 일은 없었다.
“며칠째 의식이 없는 상태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어요.”
“어떻게 된 일이죠?”
“습격 당시, 왕궁에 쳐진 결계를 빠져나오면서 작은 사고가 있었어요. 바로 치유 스킬로 치료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전투와 관련 있던 몸은 아니다 보니 깨어나려면 제대로 된 회복이 필요할 거예요.”
“후, 이걸 뭐라 해야 할지.”
설마 왕궁을 빠져나갔던 공주가 다른 이도 아니고 알리사와 함께 있었다니.
당혹스러운 지금의 상황에 에일은 물을 게 너무 많아서 뭐라 입 열기도 머뭇거려졌다.
“…뭔가 모습이 많이 바뀌셨네요.”
그의 입에서 처음 나온 말은 다소 생뚱맞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게 실제로 알리사의 모습은 마지막으로 봤던 것과는 많이 바뀌어 있었다.
길게 내려왔던 머리는 질끈 묶여 있었고, 활동하기에 편한 붉은 로브 차림에 스태프가 아닌 기다란 창을 쥐고 있었다.
그녀가 쥐고 있는 무기는 일반적인 창과는 다른 ‘마력창’이었다.
말 그대로 마력이 깃들어 있는 창으로, 공격력과 마력 양쪽 스펙을 동시에 지녀 주로 양쪽을 모두 활용하는 하이브리드 직업들이 애용하는 무기였다.
“음, 전투 방식에 조금 변화를 줬죠.”
알리사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녀가 어느 순간 엘트리스를 떠나 혼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쯤은 그 역시 전해들은 뒤였다.
주로 보조 역할을 수행하는 치유사 입장에서 파티플레이와 개인플레이 간의 차이가 굉장히 많은 편이니, 플레이 스타일에 변경을 주는 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문제는 제쳐두고도 남아 있는 의문거리는 너무도 많았다.
“알리사 님, 혹시 이번 상황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으신가요. 공주와 함께 있는 것부터 당혹스러운 게 많아서…….”
“물론이에요. 하지만 사과부터 하는 게 우선이겠죠. 에일 님, 속여서 정말 죄송해요.”
작은 한숨을 내쉰 알리사는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자신을 속이다니, 당황한 에일이 물었다.
“그게 무슨…….”
“아마, 조금 긴 이야기가 될 거예요.”
그렇게 모닥불 사이에 마주 앉은 에일과 알리사는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그녀의 이야기는 꽤나 충격적이었다.
가장 먼저는 그녀가 했던 거짓말에 대해서였다.
사실 그녀는 트리나무의 랭커가 아니라, 이스트혼 출신의 게이머였다는 것.
그것도 과거 알키오네의 일원이었다고 고백해 왔고, 이는 상당히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그동안 그녀가 단순히 마이너 게임의 랭커치고는, 범상치 않다는 걸 몇 번 느끼긴 했다.
하지만 설마 그 악명 높던 길드의 일원이었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기존에 파티를 함께하며 알리사가 보인 이미지와는 완벽히 정반대의 이야기였다.
“처음엔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누군가 비난을 하건, 고통을 호소하건, 어차피 게임일 뿐이었으니까. 악역과 선역. 자유도라는 이름하에 시스템적으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이상, 어떤 선택지를 택해도 문제 될 게 없다. 이게 길드 전체의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전 어느 순간 회의감을 느끼게 됐고, 길드를 조용히 떠나게 된 거죠.”
“…그렇다면 아폴리온이 왕궁을 습격할 거라는 걸 미리 알고 공주를 빼돌린 건가요?”
“네, 길드가 어떤 방식으로 게임을 집어삼키는지 정도는 잘 알고 있으니까요. 아예 습격 자체를 막는 건 무리였지만요.”
그녀의 놀라운 이야기들을 들은 에일은 잠시 침음을 흘렸다.
하지만 산적해 있던 의문점들은 아직 이 정도로 가시지 않았다.
“그럼 이 지하 던전엔 어떻게 알고 들어왔던 거죠? 우연히 들어올 수 있을 만한 곳은 아닌데.”
“그거야 제가 에일 님한테 가르쳐 준 건데 모를 리가 있나요.”
“네? 서… 설마?”
에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자 알리사는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각종 공유 사이트에서 워로드에 대한 양질의 정보를 주고받던 유저 ‘Lotus’가 바로 그녀였던 것이다.
여태까진 무의식적으로 남자일 거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기가 막힌 우연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아니지.”
반사적으로 말을 뱉던 에일이 고개를 저었다.
언제부터 자신에 대해 안 건지, 왜 진작 말해 주지 않고 모른 척한 건지 더 자세히 묻고 싶은 마음은 간신히 억눌렀다.
지금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은 나중으로 미뤄야 했다.
무엇보다 지금 그녀의 설명대로라면 의문이 한 가지 남아 있었다.
“이쪽 지형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고, 알리사 님이라면 분명 추적을 따돌리고 빠져나갈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여기에 남아 있던 이유가 있나요?”
에일의 물음에 잠시 침묵하던 알리사가 입을 열었다.
“두 번이나 거짓말을 할 수는 없겠죠. 사실 두 선택지 사이에서 고민 중이었어요. 공주를 빼돌릴 건지, 아니면 이대로 내버려두고 떠날지.”
“……!”
깜짝 놀란 에일이 흠칫했다.
이대로 세이아를 이곳에 내버려두고 간다면, 키메라로 득실거리는 던전에 고립된 그녀는 분명 꼼짝없이 죽을 터였다.
상황을 뒤집을 변수를 차단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
하지만 에일은 곧 그녀가 왜 그런 고민을 한 것인지 이해했다.
지금은 알키오네에서 완전히 손을 털고 나왔다고는 하나, 세이아를 아예 적대 길드에게 넘기는 순간, 옛 소속 길드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알키오네와 아폴리온.
이름은 달라도 당시의 구성원들은 전혀 다름이 없었다.
이는 제삼자가 생각하는 만큼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가 알키오네에서 활동할 당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에일이나 다른 이들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아폴리온이 앞으로 어떤 행동을 보일지 예상하고 있던 알리사가 중요한 열쇠인 공주를 빼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 이상의 행동을 곧장 취하는 것에 대해선 고민에 빠져 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아뇨,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이젠 다 정리가 됐거든요. 마침 뜻밖에 에일 님의 얼굴까지 보게 되니 더 확신이 생겼고요.”
빙긋 웃어 보인 알리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겉보기엔 정말 속 시원한 듯 보이는 그녀의 표정이었다.
하지만 에일의 눈썰미로도 그녀가 단지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마음의 정리가 된 건지 쉽게 구별이 가지 않았다.
“혹시 알키오네에 대해 더 자세히 말해 줄 수 있으신가요?”
에일이 조심스레 그녀에게 물었다.
이스트혼의 알키오네.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길드였지만, 막상 알키오네에 대해 알려진 정보는 너무 적었다.
유별나게 보안 유지를 철저히 신경 쓴 길드라는 점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가면을 쓰고 얼굴을 공개하지 않고 활동하던 곳이라 더더욱 그랬다.
이제 당장 그들을 적대하는 에일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곤란한 점이었다.
보스를 잡던 유저를 상대하던 사전 정보의 유무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하지만 아예 길드 내부에서 활동을 직접 해나가던 알리사라면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을 터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빠져나가면서 해드릴게요. 일단은 이곳을 나가는 게 우선일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에일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목표로 하던 세이아를 확보한 지금 상황에서는, 최대한 빨리 그녀를 안전한 곳까지 옮기는 게 중요했다.
항상 예상 밖의 수를 선보이던 아폴리온이 무언가 다른 수를 만들기 전에, 랭커들이 깔린 이 지역부터 완전히 벗어나야 했다.
에일이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더 자세히 묻고 싶은 걸 최대한 참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진짜 공주가 살아 있다는 걸 모두에게 알릴 수만 있다면, 상황은 완전히 뒤집어진다.’
이번 작전의 성공 여부에 정말 많은 것이 달려 있었다.
왕궁을 급습한 아폴리온이 모두의 허를 찌른 건 맞지만, 실패 시 리스크가 굉장히 큰 선택이었던 건 여전히 변함없었다.
사실만 제대로 밝혀진다면 큰 반발이 일어나, 오히려 그들을 나락까지 떨어뜨릴 수 있는 수였다.
알리사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난 에일은 장검을 챙겨들었다.
다만 이대로 던전을 빠져나가기엔 남아 있는 문제가 한 가지 있었다.
키이이이익!
아래에서 들려오는 레기아스의 커다란 울음소리.
녀석은 아직도 에일을 놓친 것에 대해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브레스를 사방에 뿌려대며 독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굉음을 듣고 온 애꿎은 다른 키메라 몬스터들이 녀석의 난동에 줄줄이 녹아내릴 지경이었다.
“저 녀석이 버티고 있는 게 문제네요.”
에일이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아무래도 에일이 성역 바깥으로 나오기 전까지 아예 이 자리를 떠나지 않을 셈으로 보였다.
레기아스가 보였던 움직임을 생각한다면 공주까지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 있는 상황에, 녀석을 따돌리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란 건가.’
보스를 제거하지 않는 이상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
“…….”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동시에 서로 고개를 돌린 에일과 알리사의 시선이 맞닿았다.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페이즈별 패턴.
마법과 물리 내성을 아우르는 말도 안 되는 스펙.
녀석은 분명 에일조차도 도중에 공략을 포기하고, 등을 보여야 할 만큼 강력한 난적이었다.
하나 도저히 해결이 불가능해 보였던 보스의 난이도라도, 하나가 아닌 둘이 뭉친 이상 이야기는 달라졌다.
“가볼까요?”
“그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