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전환점 (5)
몬스터로 가득한 깊은 동굴의 안.
“후우…….”
온통 피를 뒤집어쓴 에일이 스킬을 준비했다.
220레벨을 달성했을 때 얻었던 유일급 공격 스킬, ‘신성 폭발’.
다소 떨어진 거리로도 사용이 가능한 덕에, 근접 클래스인 에일에게 유용한 공격 옵션이 되어 주곤 했다.
뭣보다 신성 폭발이 주는 넉백과 대미지는 그의 높은 신앙심 스탯과 겹쳐져 훌륭한 성능을 내왔다.
그렇게 여태까지는 일반적인 신성 마법과 다를 것 없이 사용해 왔다.
하지만 에일은 최근 이 스킬의 새로운 활용법을 알아냈다.
바로 장검에 힘을 불어넣어 가격한 순간 폭발을 일으키는 것이다.
키에에엑!
사방에서 달려드는 키메라들.
느긋하게 캐스팅할 시간은 없었고, 에일은 뛰어든 놈들의 공격을 피해 뛰어올랐다.
빙글 몸을 돌린 에일은 검을 치켜들었다.
장검이 아닌 대검으로의 스왑.
파아앗!
커다란 에일의 대검에 새하얀 빛이 서렸다.
신성 폭발을 검을 통해 사용할 경우, 원거리에서 시전해 쏘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넉백과 대미지를 주었다.
사실상 최종 등급이나 다름없는 유일급 스킬에 더불어, 드높은 기반 스탯까지.
그렇지 않아도 강력한 스킬에서 더욱 큰 위력이라면 어찌 될지는 뻔한 일이었다.
쩌엉!
힘껏 내려친 대검에서 하얀 빛이 쏟아졌다.
콰아아아앙!
바닥으로부터 커다란 신성 폭발이 일어났고, 주변에 있던 키메라들은 모조리 쓸려나갔다.
후두둑 소리와 함께 갈기갈기 찢긴 괴물들의 시체가 바닥을 굴렀다.
그렇게 초토화된 시체들 위에 선 에일은 느긋하게 마나 포션을 들이켰다.
“이걸로 다섯 번째 시나리오 완료.”
[다섯 번째 시나리오를 클리어하였습니다!]
[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
.
‘역시 전설급 스킬이 있으니 차원이 다르네.’
스킬의 절륜한 위력에 에일의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본래 신앙심 스탯은 직업 전용 스킬의 효율성만 올려 줄 뿐인 다섯 번째 스탯이었다.
하나 전설급 스킬인 ‘구도자의 열성’ 덕에 모든 신성 마법의 기반 스탯이 되면서 이야기는 180도 달라졌다.
전설급 스킬의 존재 덕에 그는 일반 근접 클래스와는 확연히 다른 전투 방식을 구사할 수 있었다.
고작 근접 클래스 혼자서 이렇게 엄청난 속도로 던전을 돌파한 건, 광역 스킬의 폭을 굉장히 넓혀준 구도자의 열성 스킬의 공이 크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화산의 지배자’가 시원시원한 전투 방식에 즐거워합니다.]
[공용 교단 공헌도 +300]
[‘생명의 어머니’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냅니다.]
[‘빛의 심판자, 루’가 당신을 후원합니다!]
[빛의 교단 공헌도 +1,500]
다섯 번째 시나리오의 클리어와 함께,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진 신격들의 메시지가 주르륵 떠올랐다.
지금처럼 신격들은 각자 성향에 따라 주머니를 여닫고는 했다.
그들의 마음에 드는 특정 상황이나 행동을 하면 공헌도를 후원했고, 그들을 꽤 오래 봐온 에일은 이제 그들이 각자 어떤 행동들을 좋아하는지 감을 잡고 있었다.
물론 에일의 입장에서는 다른 신격이야 어찌 되건 루만 확실히 신경 쓰면 그만이었다.
다른 신격의 입장에서는 남의 신도인 탓에 선뜻 공헌도를 건넬 수 없는 반면, 거리낄 게 없는 루는 후원하는 공헌도의 단위 자체가 달랐다.
무엇보다 루는 그의 후원자인 동시에, 가장 큰 조력자이기도 했다.
화르르륵!
새하얀 불길이 키메라의 시체들을 삼키며 활활 타올랐다.
일일이 정식으로 처형을 할 시간은 없었지만, 성화로 태우는 것쯤이야 잠깐이면 됐다.
[‘빛의 심판자, 루’가 일렁이는 불길에 웃음 짓습니다.]
[빛의 교단 공헌도 +250]
‘같은 배를 탄 입장인데, 최대한 신경 써 줘야지. 물론 이게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에일이 활활 타오르는 방 안을 바라봤다.
검은빛으로 물든 군락지가 불길에 휩싸인 모습.
이곳이 바로 그 많던 키메라들이 쏟아져 나오던 진원지 중 하나였다.
동시에 시나리오 던전상, 다섯 번째 시나리오의 파괴 목표이기도 했다.
임무를 성공하며 파괴한데다가 완전히 전소까지 시켜놨으니, 뒤쪽에서부터 몬스터들이 더 들이닥칠 일은 없을 것이다.
‘잠깐… 벌써 열 개도 안 남은 건가.’
인벤토리의 남은 포션들을 확인한 에일이 혀를 찼다.
워낙 쉬지도 않고 괴물들과 싸워대느라, 그 많았던 포션들이 바닥을 드러냈다.
갑자기 긴 여정이 있을 때까지 대비해, 어지간해서는 부족할 일 없게 포션을 쌓아 뒀는데 이 정도 상황까지는 예상 못 했던 탓이었다.
‘그래도 확실히 도핑 효과가 있긴 했어.’
에일은 슬쩍 시선을 옮겨 자신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아직도 몇 시간 가까이 남아 있는 도핑의 지속 효과가 밝게 활성화되어 있었다.
정예 키메라에게서 얻은 내단의 효과였다.
먹을 때는 고역이었지만, 역시 효과만큼은 확실했다.
전반적인 스탯들이 모두 큰 폭으로 올라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게다가 이제 거의 끝에 가까워진 것 같으니까.’
에일이 화면에 띄운 지도를 확인했다.
최초 발견자도 진입을 포기하고 돌아섰던 탓에, 이번 시나리오 던전의 난관들은 그 역시 미리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주변 지리를 잘 알고 있다면, 끝나는 시점에 대한 대략적인 예측 정도는 가능했다.
미궁의 숲 지하 던전 속에 위치한 이 시나리오 던전은 중심부의 약간 아래쪽에 자리 잡아 적지 않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고, 더 이상 뻗어질 공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곧 던전의 끝이 나타날 거라는 것이었다.
이번 지하 던전의 구조에 대해, 아주 자세히 알고 있는 에일이었기에 예측가능한 일이었다.
‘그럼 가볼까.’
아이템 회수와 재정비를 완전히 마친 에일은 불타는 군락지를 지나 다음 에리어로 향했다.
뒤로 나 있는 좁은 통로를 지나 너머의 방 안에 도착했다.
발을 들이자마자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한가운데에 웅크리고 있는 거대한 괴물이었다.
흉측한 괴물은 알 수 없는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고, 그를 마주한 에일의 입가엔 오히려 미소가 지어졌다.
[최종 시나리오가 발생되었습니다!]
[정해진 시간 내에 보스 몬스터, 레기아스를 제거하십시오!]
[남은 시간 ‘02:54:59’]
[죄악의 존재, 신성모독자와 조우했습니다!]
크르르르.
기척이 느껴지자 레기아스가 뜨거운 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웅크린 몸이 펼쳐지자 용을 연상시키는 거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키메라들과 다름없이 고약하게 짜집어져 흘러내리는 몸뚱이인 건 같았지만, 그런 녀석들은 비교도 안 될 만큼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섬뜩한 시선이 맞닿았지만 에일은 즉시 띄워 올린 녀석의 정보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의 레벨은 250.
반면 현재 에일의 레벨은 238로 조금 차이가 있긴 했지만, 공략이 불가능할 차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 정도 차이라면 감사하지.’
에일은 오히려 녀석과의 레벨 차이를 반겼다.
앞선 시나리오들의 수준으로 보아 더 높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큰 차이가 아니었다.
다만, 다소 위험한 부분은 녀석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결국 직접 나서 알아보는 수밖에 없었고, 에일은 곧바로 바닥에 검을 꽂아 넣으며 스킬을 발동시켰다.
파아앗!
수호의 방패가 발동되며 보호막이 생겨났다.
이빨을 드러낸 레기아스가 거대한 팔을 내리치며 보호막을 두들겼지만, 한두 번 만에 부서질 스킬이 아니었다.
그사이 무릎을 꿇고 다음 마법을 준비하던 에일이 긴 캐스팅을 끝냈다.
콰앙!
촤르르르륵!
수십 갈래의 단단한 빛의 사슬이 땅에서 솟아났다.
신성의 사슬 스킬이 발동되며, 레기아스의 몸을 휘감아 고정시켰다.
놈이 몸부림쳤지만 쉽게 끊어지지 않았고, 그 틈에 에일은 다음 스킬의 캐스팅을 끝냈다.
레기아스의 머리 위에 떠오른 거대한 징벌의 검.
콰아아아앙!
빛의 검이 녀석에게로 떨어졌고, 엄청난 굉음이 일어났다.
피어난 먼지 사이로 에일은 녀석에게 달려갔다.
큰 공격에 당해 휘청이고 있을 때 기회를 잡고 최대한의 대미지를 넣어둬야 했다.
키에에엑!
“뭐……?”
하지만 에일이 마주한 것은 어느새 멀쩡히 일어나있는 레기아스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녀석은 단순히 균형을 잡고 있는 수준을 넘어, 단 1퍼센트의 체력조차 줄어들지 않은 상태였다.
‘설마…….’
놀란 에일의 시선이 녀석의 정보창으로 향했다.
마법 내성 100퍼센트.
즉, 모든 마법 무효해 물리적 대미지가 아닌 이상 소용없다는 이야기였다.
쿠구구궁!
“젠장……!”
그는 바닥을 긁으며 날아드는 레기아스의 발톱을 피했다.
아예 마법 무효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니, 에일의 공격계 신성 마법들은 사실상 봉쇄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제한 시간마저 걸려 있는 와중에 넋 놓고 있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재빨리 무기를 스왑하며 단검을 꺼내든 에일은 안쪽으로 파고들어 녀석의 옆구리에 다가섰다.
에일의 순간적인 움직임은 놈조차 반응하지 못했다.
파악!
단단한 비늘 탓에 깊숙이 박히지 않았다.
하지만 목적은 달성했다.
처음 찌른 단검에 더해 어느새 바꿔든 기다란 창날까지 녀석의 옆구리를 찌르고 있었다.
[상태이상 ‘둔화’가 발동되었습니다!]
[상태이상 ‘쇠약’이 발동되었습니다!]
레기아스에게 끼얹어진 상태 이상.
몇 번의 공격만으로 승부가 결정나는 유저라면 몰라도, 체력이 막대한 보스를 상대할 때라면 필수적인 작업이었다.
특히 그가 지닌 고화력의 마법 공격이 틀어 막힌 이상 더더욱 그랬다.
후웅!
날아드는 꼬리를 피해 에일은 역극을 발동했다.
순식간에 레기아스의 등 뒤로 파고들어간 에일은 장검을 높이 치켜들고는 정신을 집중했다.
장검에 깃든 신성력이 찬란하게 빛났다.
콰아아아!
강력한 에일의 검격이 뻗어져 나갔다.
230레벨을 달성하고 가장 최근에 얻은 새로운 스킬, 유일급의 단일 공격기인 ‘심판의 일격’이었다.
신성 폭발이나 징벌 같은 광역 공격이 아닌 오롯이 단일 대상에게만 집중된 일격이자, 마법 면역과 관련이 없는 물리형 공격이었다.
대형 광역기도 아닌 스킬이 쿨타임이 지나치게 긴 점이 흠이었지만, 그에 걸맞게 위력만큼은 정말 막강했다.
타악!
부드럽게 바닥에 착지한 에일은 뒤를 돌았다.
적중 시 부가 효과인 스턴까지 있었고, 이 정도 위력이라면 녀석의 체력은 분명 큰 폭으로 떨어졌을 것이었다.
“아니…….”
하지만 에일의 표정은 이번에도 일그러졌다.
이번에도 여전히 90퍼센트대를 굳건히 유지하고 있었다.
어느새 레기아스의 숨겨져 있던 특성이 정보창에 떠올라 있었다.
[용의 저항 - 마법 내성 100%]
[무쇠 비늘 - 물리 내성 75%]
“이건 뭐 어쩌라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