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성전 (4)
본격적인 성전이 시작되며 지하에 있던 신도들이 움직였다.
엘트리스의 주민들뿐만 아니라, 남부 늪지 아래의 시드나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언데드에 대항할 신성 마법을 전해주고, 교단의 인력까지 투입되며 지역의 안정화가 대부분 마무리된 상황.
마침 딱 알맞은 타이밍에 선포된 성전의 부름에 시드나의 전사들은 지체하지 않고 출정했다.
대부분의 전사들이 지상으로 올라온 대규모 출전이었다.
하나 엘트리스의 주민들과 합류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행선지는 다른 곳에 있었다.
“어느 곳 할 거 없이 후방의 주요 거점들은 죄다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 탓에 저희 측에선 지금처럼 병력을 나눌 수밖에 없었고요.”
말을 탄 부관이 선두에 선 기사단장에게 말했다.
대지 교단이 후방의 성채로 보낸 증원군.
프레이아의 전용 직업들로 이루어진 정예 기사단이었다.
빛의 교단 내에서 심판관들이 모인 이단심문소가 최고의 무력 집단이듯, 대지 교단도 전용 직업을 구성된 기사단이 교단을 대표하는 전력이었다.
그중 기사단 수백이 엘트리스의 이종족들에게 습격을 받은 중요 거점으로 향했다.
혼란한 상황 탓에 뒤늦게 출발한지라 버틸 가능성은 적었지만, 그렇다고 초토화되어 가는 후방 지역을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몇몇 거점에선 야만 전사들이 나타났다고 하던데?”
“예, 전원 200레벨이 넘는 전사 NPC들입니다. 대체 어디서 그런 자들이 나타나 빛의 교단과 연합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반적인 유저 이상으로 강력한 전력입니다.”
“그래도 클래스가 물리 계열뿐이라는 걸 알았으니, 이제 그쪽 문제는 대처하기 쉽겠지.”
기사단장이 시선을 슬쩍 돌리며 말했다.
대지 교단의 기사단으로 이루어진 지원군엔 물의 교단 측 신도들도 일부 섞여 있었다.
그들을 굳이 포함시켜 동행한 이유는 간단했다.물의 교단은 치유력과 소환 마법에 특화된 교단이었고, 물리 내성을 지닌 소환수는 전사들의 카운터나 다름없었다.
“그렇지만… 쥐 수인들의 땅굴 탓에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움직임을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전방에서는 빛의 교단의 신도들이 밀려들고 있기까지 하니, 지금 저희의 전력으로 모두 대처하기는 무리입니다. 아무래도 아폴리온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빛의 교단 하나 감당 못 해서 쩔쩔매는 꼴이라니……. 이러다간 참전의 대가로 약속받은 성물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는데.”
두 6대 길드를 동시에 상대하고 있는 아폴리온은 이미 위쪽 전선에 전력을 쏟아붓고 있었다.
이런 팽팽한 상황에서 더 증원군을 요구하면, 아폴리온의 입장에서 반길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 전쟁에 패하기라도 하면, 약속받은 성물이고 뭐고 끝장이었다.
아래쪽 전선이 완전히 뚫리며 사달이 나지 않으려면, 아폴리온 측의 도움을 바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역시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임무가 달라질 건 없다. 속도를 높여 지금 맡은 성채만큼은 사수한다.”
콰악!
히히히힝!
그 순간 날아든 도끼가 앞서던 말과 기사들에게 적중했다.
“무슨……!”
“우워어어!”
매복해있던 수백여 명의 부족 전사들이 수풀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전혀 예상 못 한 급습에 숲속은 난장판이 되었다.
이야기로만 건너 들었던 시드나의 야만 전사들.
최소 200레벨 이상의 전사들이 엄청난 수로 밀고 들어왔다.
그들의 전력은 상상 이상으로, 방어력을 믿고 방심했다간 마갑까지 걸친 기사를 말째로 베어내는 괴력을 선보였다.
“놈들이다 소환수를 불러내!”
급박한 상황 속에 기사단장이 외쳤다.
그러자 그의 외침을 들은 물의 교단측 신도들이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츠츠츠츳!
소환 마법을 사용한 파도술사들은 물리 내성을 지녀 마법에만 대미지를 입는 소환수들을 불러내기 시작했다.
물리 내성이라는 특수한 특성을 지닌 소환수를 불러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여기 있는 고위급 파도술사 여럿이 힘을 모으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촤아아악!
상위 물의 정령 세 기가 바닥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앞으로 나선 물의 정령들은 전사들에게 달려들었고, 완전한 물리 내성을 지녀 전사들이 휘두른 검이 그대로 통과되었다.
“역시……!”
그 모습에 기사들은 기뻐하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야만 전사들의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면 이미 이 싸움은 이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화르르륵!
전사들의 검에 일제히 불꽃이 붙었다.
“뭐, 뭐야?”
일렁이는 백색의 성화.
뛰어난 신성 마법이자, 이단심판관의 상징과도 같은 화염이 그들의 검에서 피어오른 것이다.
언데드에 대항하기 위해 이단심판관으로서 성화까지 익힌 이들.
신성 마법을 다룰 줄 알게 된 부족 전사들에겐 더 이상 절대적인 약점이란 건 없었다.
키이이익!
물리 내성을 지니고 있는 상위 물의 정령들도 성화가 타오르는 검 앞에서는 소용없었다.
우월한 신체 조건을 통해 매섭게 달려드는 전사들의 움직임은 엄청났고, 광기에 찬 전사들의 외침이 대지를 울렸다.
“빛을 위하여!”
끔찍한 늪지 지하의 환경에서 살아남은 전사들.
언제나 언데드 군단과 싸워가며 투쟁하던 이들에게 이런 전쟁쯤이야 대수가 아니었다.
거기다 이젠 굳은 신념까지 생겨난 전사들에게 거리낄 것은 없었다.
“이… 이런, 미친.”
“멍하니 있지 마라! 서둘러!”
아직 싸움이 끝나기는 한참 멀었다.
한 동료의 일갈에 파도술사들은 서둘러 다음 소환 작업을 진행했다.
거기에 공격계 대형 마법의 캐스팅도 잊지 않았다.
앞에서 기사들이 버텨 주는 동안, 후방에 있는 마법사들의 화력이 최대한 활약해야 승산을 가져올 수 있었다.
그렇게 후방에서 마법들을 준비하는 사이.
그들을 저지하기 위한 몇몇 전사들의 화살이 날아왔다.
카앙!
하나 대지 교단의 기사들이 그를 막아섰다.
기사 중에서도 방어에 집중적으로 투자한 전문 탱커들이었고, 그들의 임무는 후방에서 딜러진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전사들로만 이루어진 저들에게 탱커를 뚫을 만큼 위력적인 원거리 견제 수단은 없었다.
“후우, 처음은 아니지만 긴장되네요.”
그때, 전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쪽에서 리아가 나타났다.
시드나의 부족 전사 몇 명과 함께 대기하고 있던 그녀는 정신 집중을 집중하고 스태프를 들어 올렸다.
츠츠츠츳!
한껏 끌어 모은 마력이 발산되었다.
높이 하늘에서 떨어진 거대한 운석.
무려 유일급의 광역 공격 스킬인 ‘유성우’였다.
콰아아앙!
유성이 떨어지며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압도적인 대미지와 넓은 타격 범위.
그에 걸맞게 아주 긴 캐스팅 시간이 필요한 마법이었고, 성장한 지금의 리아조차도 16초나 걸릴 만큼 큰 규모의 마법이었다.
“커헉…….”
그 덕에 후방에서 마법을 준비 중이었던 물의 교단의 파도술사들은 단번에 폭사했다.
상대가 모두 우락부락한 전사들뿐이라는 것에 방심해, 화살이 아닌 마법 방어에 대해선 제대로 대비를 안 해둔 탓이었다.
후방에 자리 잡은 딜러들 대부분이 사라진 상태.
하지만 무자비한 리아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헬파이어, 파멸의 불씨, 블리자드 등의 엄청난 범위 마법을 연달아 시전하며 쏟아냈다.
콰과과광!
“무슨 저런 괴물이……!”
“저… 저 여자도 엔피씨인가?”
동료들이 쓸려나가며 기겁한 기사들이 언덕 위를 올려다봤다.
유저라고는 믿기지 않을 가공할 만한 상위 마법 난사에, 얼굴이 알려진 네임드 플레이어도 아니었으니 착각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워로드 최고 랭킹의 마법사보다도 훨씬 빠른 캐스팅 속도를 지니게 된 리아였다.
만약 그들이 유저란 걸 알았다면, 워로드에 존재할 리 없는 버그 유저라고 의심했을 만한 정도였다.
콰아아앙!
“젠장! 힐러들이……!”
심지어 리아의 강점은 빠른 캐스팅과 강력한 위력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높은 화력의 대형 마법은 일반적으로 범위 조절이 쉬운 편이 아니었다.
하나 리아는 그런 고화력 마법들을 다소 떨어져 있는 거리에서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명중률을 보였다.
무엇보다 그녀가 떨어뜨리는 마법 폭격은 정확히 상대의 취약점만을 노렸다.
최대의 대미지를 줄 수 있을 만한 곳만을 적재적소에 타격하는 능력.
상식외의 재능에 더해 에일네 고인물 파티와의 플레이를 통해, 전투 시 판단력과 센스마저도 눈부신 성취를 보인 그녀였다.
“이… 이건.”
전면에 선 기사의 눈엔 체념이 깃들었다.
앞으로는 강력한 전사들이 쇄도해 왔고, 그 뒤에선 전장 곳곳에 대형 마법을 흩뿌리는 괴물이 존재했다.
전사만으로는 아쉬운 원거리나 광역 화력을 리아가 완벽히 채워 주었다.
근접전에 대한 보호만 확실하면 무한정 대형 마법을 쏟아낼 수 있는 그녀의 특성상, 사실상 걸어 다니는 대포가 그들과 함께 하는 셈이었다.
“퇴각해라! 뒤로 물러나!”
승산이 없다는 걸 깨달은 대지 교단의 기사단장이 외쳤다.
하지만 미리 이곳에 함정을 파둔 건 상대였고, 물러나는 것도 호락호락할 리 없었다.
콰악!
날아든 화살과 도끼들.
물러나던 기사들이 그에 맞아 우르르 쓰러졌다.
이미 앞뒤로 포위되어 퇴로마저도 장악된 상태였다.
“트, 틀렸어…….”
지휘관의 의지마저도 꺾인 상황에서 저항하려 해봤자 속수무책이었고, 그들은 전멸을 피하지 못했다.
* * *
성전이 선포되며 온갖 곳에서 밀고 들어온 교단 지하 세력의 병력들은 엄청난 기세로 적들을 베어나갔다.
특히 후방을 장악하기 시작한 시드나의 전사들은 성벽도 가볍게 타고 넘으며 거점들을 함락시켰다.
래터들의 땅굴 덕에 상대는 제대로 대응을 하는 데조차 애를 먹었다.
전방에서 치러진 교단 간의 정면 승부조차도 빛의 교단이 연달아 이겨내고 있었다.
이곳 북동부 지역에서 빛의 교단이 맡은 아래쪽 전선을 막힘없이 밀어내는 중이었다.
까악까악!
시체로 가득 찬 함락된 요새의 안.
전방의 거점을 방어하던 물의 교단 신도들은 모조리 처형당해, 요새 안엔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선 에일이 장검에 기댄 채 서 있었다.
“아폴리온에서 용병단들을 저희 쪽 전선으로 보냈습니다. 두 교단이 계속해서 밀리다 보니 급하게 증원을 보낸 모양인데, 상황을 아예 뒤집을 생각인지 꽤나 많은 숫자입니다. 오닉스나 루나틱 같은 소수 정예 길드도 있었고요.”
심판관, 메이의 보고가 이루어졌다.
오닉스와 루나틱이라면 전쟁을 전문으로 하는 용병 길드 중에서도, 상당한 명성을 지니고 있는 곳이었다.
6대 길드 간 전쟁에 동원될 만한 수준의 용병 길드라면 당연한 말일 테지만, 특히 이들은 소수 정예를 내세우며 길드장에 유명한 개인 랭커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랭커라…….’
에일은 바닥에 꽂았던 장검을 뽑아들며 쥐었다.
장검에 묻었던 진득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직접 나서서 요격합시다. 이럴 때 더 몰아쳐야죠.”
용병 길드를 움직였다면 이제 아폴리온의 입장에서도 굉장히 거슬리는 수준까지는 온 셈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이건 단지 시작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