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성전 (3)
쿠웅! 쿠웅!
공성추가 성문을 두드리며 굉음을 토해냈다.
하지만 그 소리조차 전장을 가득 메운 폭음과 고함 소리가 묻어 버릴 정도였다.
후두두둑!
투석기에 맞아 부서진 성벽 파편들이 아래로 떨어졌다.
조그만 파편들이 투구를 두들겼고, 큰 파편에 깔려 죽은 이도 한 명 생겨났다.
“큭…….”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전장 속, 성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병사들의 몸이 덜덜 떨렸다.
정신적인 보정이 붙은 유저들이야 덜하다고 하지만, NPC들에겐 해당이 없는 말.
경비병들은 완전히 공포에 질린 상태였다.
분명 아직 루를 따르는 광신도들의 무리가 닿지 않는 후방의 거점이었을 터인데, 완전히 생각도 못 한 공성전을 치르게 된 상황이었다.
격렬히 공격받는 거점은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정신 차려라!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누군가 심하게 동요하는 경비병들에게 소리쳤다.
거점을 맡던 경비 대장이 나선 것이다.
그는 성을 돌아다니며 정신력이 바닥나고 있는 병사들을 바로잡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 내심 패배를 직감하고 있었다.
‘젠장, 아직 성벽 복구도 제대로 안 된 상황에 이런 규모의 공성전이라니. 배치된 병사의 숫자가 적은 건 아니지만, 이대론 얼마 못 버텨.’
이곳은 몇 주 전만 하더라도 아폴리온의 거점이 아니었다.
북동부를 공격한 아폴리온이 그리핀의 성을 빼앗고 차지한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성채가 손상된 것은 당연한 일.
하나 아직 전쟁이 끝나지도 않은 시점에 또 6대 길드 둘이 끼어들며 전쟁이 확산된 상황이었다.
후방 거점의 시설 보수가 모두 끝났을 리 만무했다.
“놈들의 수가 너무 많습니다!”
그에게 다가온 부관이 소리쳤다.
“버텨내! 자리를 지키라고 해라!”
“하지만 이대로는 분명…….”
“그래도 이곳을 버릴 수는 없다. 여길 놈들에게 내주면 골치 아픈 정도로는 안 끝나.”
이곳은 중요한 길목을 차지하고 있는 핵심 거점 중 하나였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넘겨준다면 아래쪽 전선에 큰 문제가 생길 일이었다.
“빌어먹을, 어디서 이따위 괴물들이 튀어나와서…….”
성벽 너머로 들려오는 이종족들의 소리에 경비대장이 짜증을 토해냈다.
여신의 명을 받아든 엘트리스의 이종족들은 순식간에 집결했고, 깊은 지하에서 지상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존재를 전혀 모르던 이들에겐 천재지변과도 같은 일이었다.
미리 기습을 눈치채지 못하고 대처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대지 교단의 증원이 오고 있다. 어떻게든 더 버텨내면…….”
콰앙!
그때 경비대장의 말이 무색해지도록 굉음이 들려왔다.
다른 곳도 아닌 그들이 딛고 있는 발밑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이다.
“끽끽끽끽!”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엘트리스의 수인, 래터들이 땅굴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주특기인 땅굴을 이용해 성 안으로 단숨에 침입했다.
“노, 놈들을 막아!”
경비병들이 급히 땅굴을 에워싸며 놈들을 저지하려 했다.
하지만 굴속에서 나오는 래터들은 그들로 막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야 말로 끝도 없이 몰려드는 엄청난 물량.
더군다나 성안에 생겨난 땅굴은 이곳뿐만이 아니었다.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난 땅굴들을 통해 래터들이 파도처럼 쏟아져 나왔다.
래터라는 존재 자체만 해도 충격적이었는데, 보기만 해도 끔찍한 광경을 목도하자 기겁한 병사들은 도저히 대처가 불가능했다.
콰득!
“끄아악!”
몰려드는 래터 떼에 삼켜진 병사들은 일순간에 몰살당했다.
그들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서 살아남은 건, 완전히 전의를 상실해 무기를 내버린 이들뿐이었다.
한때 래터들은 그 폭력성과 번식력으로 인해 엘트리스 최고의 골칫덩이였지만, 하나 된 종교 아래에 뭉친 이들의 파괴력은 엄청났다.
드드드득!
장악된 성문은 안쪽으로부터 열렸고, 성문 앞에 있던 붉은 오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워어어어!”
중장갑을 두른 오크들이 포효하며 내부로 진입했고, 외성 지역은 눈 깜짝할 새에 함락되어 갔다.
그러자 아직 남은 곳은 성채 안의 내성뿐이었다.
크기는 외성보다는 못하지만 비교적 멀쩡한 성벽과 단단한 성문이 그들을 막아서고 있었다.
후우웅!
그때 투석기의 화염탄이 하늘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일제히 발사된 화염탄들은 빗나가는 일 없이 모두 성문에 부딪히며 커다란 폭발을 일으켰다.
콰아아앙!
내성 성문을 단숨에 박살 내 버린 위력.
무려 수십 기가 넘는 투석기가 정확히 내성의 성문을 때리며 열어냈다.
그야말로 가공할 만한 정확도였다.
엘트리스의 드워프 장인들이 제작해 낸 공성병기는 유저들이 수많은 골드를 부어 개량하며 만들어 내던 것 이상이었다.
“우워어어어!”
붉은 오크들은 뻥 뚫린 입구로 그대로 밀고 들어갔다.
불리한 전황과 겹쳐 그들의 기세에 내성의 병사들이 주춤주춤 물러설 정도였다.
하나 병사들을 밀쳐내며 앞으로 나선 이가 한 명 있었다.
서걱!
그의 창이 휘둘러지자 오크들의 시체가 널브러졌다.
중갑을 입은 붉은 오크들이었지만, 그의 일격이 뻗어질 때마다 여럿이 나가떨어졌다.
그의 이름은 허크.
아폴리온의 정식 길드원이자, 준랭커급 전력이었다.
다음 임무지 재배치를 위해 후방 지역에 잠시 들른 참이었는데, 이번 전투에 휘말린 것이었다.
“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홀로 앞으로 나서 오크들을 베어가는 허크의 모습에 내성의 병사들도 사기가 올랐다.
허크는 묵묵히 창을 휘둘러 가며 성문을 사수했다.
오히려 더 좁은 지역이기에, 소수의 활약으로 시간을 끌기 용이했다.
이곳 거점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고, 그 덕에 이 곳을 차지하고 있던 그리핀은 방어 시설에 꽤나 투자를 했었다.
공성병기도 쉽게 부술 수 없을 만큼, 내성은 더욱 견고했다.
적절한 때에 지원군만 와준다면 버틸 수 있을지도 몰랐다.
터벅.
하지만 빛의 교단 쪽에서도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창을 치켜든 한 명의 남자.
‘로덴……!’
그의 모습을 본 허크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과거 아르메니아의 하이 랭커, 로덴.
그가 확실했다.
‘에일과 대결했다는 말은 들었는데… 악연이 아니었다는 건가.’
이곳에 나타나 빛의 교단에 힘을 보태고 있다는 건 오히려 그와 가까운 사이라는 뜻.
모습을 감췄다가 뒤늦게 나타나 최근 많이 언급은 되지 않았으나, 이렇듯 6대 길드의 정식 길드원조차도 이름만으로도 동요할 만한 거물이었다.
하나 허크는 다시 창을 쥔 손에 힘을 쥐었다.
‘그래 봤자 1년이나 늦게 시작한 후발 주자… 내가 질 리는 없다.’
그간의 경험상 괜히 상대의 이름에 압도되어 움츠러들었다간, 이길 싸움도 지기 마련이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유리한 것은 오히려 허크의 쪽이었다.
카앙!
동시에 발을 뻗으며 격돌한 로덴과 허크.
예리한 창과 창이 부딪히며 불꽃이 튀었다.
양쪽 모두 뛰어난 움직임과 노림수들을 보이며 주변 병사들의 넋을 놓게 만들었다.
하나 자세히 보면 그들의 표정은 상반되어 있었다.
여유로운 로덴의 모습에 비해 허크의 표정은 초조한 듯이 찌푸려져 있었다.
‘이게 어떻게…….’
남들이 보기엔 대등한 싸움을 주고받은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나 한껏 공격을 몰아치던 허크가 보인 수들은 모두 액티브 스킬을 연달아 사용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공격은 모조리 막혔다.
큼지막한 스킬까지 모두 쏟아부은 허크와 애초에 액티브 스킬 따위 가지고 있지 않은 로덴.
방어 스킬을 사용한 것도 아니고, 움직임만으로도 받아치거나 피해냈다는 말이었다.
서로가 치열하게 공방을 주고받긴 했지만, 지금 둘의 상황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철저히 패시브 위주의 스킬 구성을 통한 스펙의 극대화.
그리고 변수는 오로지 우월한 실력만으로 창출해 내는 로덴만의 플레이 스타일이었다.
콰악!
“커억…….”
허크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그의 복부는 이미 날카로운 창이 꿰뚫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뻗어진 창의 움직임을 미처 눈이 따라가지 못했다.
“레벨 차이고 뭐고, 날 이겨 본 유저는 손에 꼽거든. 워로드에선 딱 한 명. 넌 당연히 실격이고.”
피식 웃은 로덴은 창을 거두었다.
그동안 엘트리스에서 파티를 하며 엄청난 속도로 성장한 로덴은 준랭커급 유저들과 스펙이 극심하게 차이 나는 것도 아니었다.
털썩!
몸이 무너져 내린 허크가 바닥에 쓰러졌고, 그의 아이템을 슬쩍 챙긴 로덴은 시선을 돌렸다.
병사들은 허크마저 당하자 전의를 잃었고, 엘트리스의 이종족들은 내성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럼 이쪽은 대강 정리된 건가.”
로덴이 느긋하게 창을 어깨에 들춰 매며 흥얼거렸다.
방금 쓰러진 허크만 빼면 내성 쪽에 크게 위협적인 전력은 없었고, 결판은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때 마침 외성 장악을 마치고 다가온 노움 병사가 그의 등을 툭 찔렀다.
“이보게.”
“음?”
키가 작은 노움의 특성상, 로덴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하지만 키와 다르게 나이는 정반대였다.
그의 뒤에 여럿 늘어서 있는 이들은 투구를 눌러쓴 노병들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혹시 여신님의 신도가 될 생각 없나?”
“예?”
그를 향해 포교 활동을 벌이는 노움들.
로덴은 그동안 엘트리스에서 이런 저런 의뢰들을 처리해 가며 지하 주민들의 신뢰를 산 데다가, 이번 전투 지휘에도 상당한 도움을 준 덕이었다.
엘트리스의 주민들과 달리, 이런 유저 간의 대규모 전쟁에서 하이 랭커 출신인 로덴의 판단은 정확했다.
“괜찮습니다. 그런 쪽으로는 생각을 안 해봐서.”
“으음, 언제 봐도 참 아까운 친구야.”
“언제나 빛을 잊지 말게. 꼭 교단에 들지 않아도 여신의 말씀을 따르는 방법은 많으니.”
“예… 명심하죠.”
로덴이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건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었다.
이들뿐만이 아니라 오염된 땅이 정화되는 신의 기적을 목격한 엘트리스의 모든 주민은 열렬한 전도사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엘트리스에 머물던 로덴에게 있어, 한 번 거절하면 더 이상 강요하지 않는 빛의 교단의 교리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꾸물대지 말고 걸어라!”
“으으윽…….”
그때, 한 포로 무리가 그들이 있는 내성 입구 쪽으로 끌려왔다.
붙잡힌 포로 중 이단의 낙인이 찍힌 자들이 추려져 보내진 것이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신도들의 야유가 쏟아졌고, 로덴과 함께 있던 노움들의 태도가 돌변했다.“놈들을 불태워라!”
“여신의 곁으로!”
껄껄 웃던 노병들까지 돌변하며 형벌을 외치는 모습.
‘이런 건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 된다고…….’
질겁한 로덴이 땀을 삐질 흘렸다.
내성과 외성의 점령이 발빠르게 이루어짐과 동시에, 낙인을 지닌 죄인들의 처형도 진행되었다.
지상의 모든 악에게 본보기를 보여 주기 위한 행동.
그들의 옆에선 로덴은 별수 없이 이단들의 처형식을 지켜봤다.
화르르륵!
맹렬한 불길과 비명 소리.
화형부터 시작해 온갖 기상천외한 처형들이 진행되었다.
역시 빛의 교단답게 여느 때와 같이 광기에 찬 처형식이었다.
‘음, 솔직히 재밌어 보이긴 해.’
엘트리스에서 온갖 처형식들을 지겹도록 보다 보니, 익숙해진 로덴이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순간 그 사실을 자각하자 그는 흠칫 몸을 떨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다른 의미로도 참으로 무서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