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성전 (1)
북부 지역을 집어삼킨 6대 길드 간의 전쟁.
6대 길드 중 일부가 참여한 것도 아니었고, 워낙 규모가 크게 벌어지고 있는 탓에 숨기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지금에서야 대부분의 일반 유저들에게도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렇게 하나둘 들려오는 전쟁 소식에 모두가 촉각을 기울였다.
이번 전쟁의 결과가 사실상 워로드의 패권을 결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길드든 유저든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허나 그러던 중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워로드의 공식 랭킹에 에일의 이름이 떡하니 나타난 것이다.
최근 가장 말이 많았던 루키이기는 하나, 이미 앞서 나간 랭커들에 근접할 거라고 보기엔 무리였다.
하지만 그런 예상들을 깨고 에일의 이름은 랭킹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고, 그것도 1,000위나 990대도 아닌 ‘934’위의 랭킹이었다.
- 와, 에일이 934위 찍었다는데?
- 저번 영상에서 준랭커 잡을 때부터 심상치 않기는 했음.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혼자 220레벨로 랭커라니 미쳤다… 그 밑에 260대 괴수들이 드글드글한데.
-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갑자기 930위대까지 치고 올라간 거야? 보통 끝자락에서부터 시작하지 않나?
- 아마 곧 영상으로 올라오겠지.
- 이게 모두 루님의 뜻이란다. 그러니까 늦기 전에 교단에 들어오렴, 이 이단들아!
혼란에 빠진 유저들의 반응.
관계자도 아니고 정보망이 없는 대다수의 유저들은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시선은 더욱 에일에게로 향했고, 뜨겁게 달아오른 화제가 식기 전 그는 채널에 영상 하나를 업로드했다.
적당한 길이의 영상엔 두 유저의 대결 장면이 담겨 있었다.
사냥꾼 랭커로 유명한 페이와 에일의 충돌이었다.
양측의 숨 막히는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고, 미리 자리를 잡았던 페이가 함정과 야수들을 이용해 에일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그렇게 구석에 몰렸던 에일은 어느 순간 완전히 뒤바뀐 모습을 보여 줬다.
화살을 피하고, 야수를 베며 함정을 박살 낸다.
랭커가 준비해 둔 치밀한 무대를 정면으로 박살내 버리는 모습.
화제성 넘치는 상대인 랭커, 박진감 넘치는 장면, 거기에 블러디직의 편집 기술까지 더해지자 완성된 영상은 그야말로 ‘걸작’이었다.
- 와, 여기서 역전을 한다고?
- 이게 클라스다!
- 오늘도 영상 퀄에 눈 호강하고 갑니다.
- 이건 거의 핵 수준이네. 미리 함정까지 파 둔 사냥꾼 랭커를 어떻게 잡은 거야?
- 페이를 잡았을 정도면 말이 필요 없지. 이건 진짜다.
역시나 공개된 영상을 본 유저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40레벨가량이 차이나는 랭커를 압도하며 역으로 찍어 누른 모습.
특히 페이는 랭킹 끝자락에 갓 올라와 주목을 받던 초신성들을 연달아 박살 내며 권외로 보내 버린 검증된 실력자였다.
워로드 랭커들의 수문장 소리를 듣던 세 명 중 하나.
이미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개인 랭커로서 굉장한 명성을 누리고 있던 네임드였다는 것이다.
그런 네임드를 상대로 에일은 완벽히 대처했고, 모두가 그 가공할 만한 실력에 찬양 일색이었다.
이번 사건이 가져온 파급력은 단순히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에일이 랭킹에 진입함으로써 빛의 교단은 여섯 교단 중 유일하게 공식 랭커를 보유하게 된 것이다.
강력한 NPC라면 모를까, 랭커급 플레이어가 한 교단에 몸을 담은 적은 없던 일.
이는 교단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상당히 바꾸는 데에도 크게 작용했다.
에일을 필두로 빛의 교단이 훨씬 더 성장할 것이라는 의견들이 지배적었다.
그 덕에 관심은 있으나 워로드 신앙 특유의 리스크 탓에 머뭇거리던 더 많은 사람들이 교단에 발을 디디며 뜻을 함께하기를 선택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성전(聖戰).
지상의 모든 악을 말살할 대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에일의 영상이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행동을 취한 빛의 교단에서는 성전을 선포했다.
여신의 뜻이 내려와 에일을 포함한 여섯 집행관 전원이 동의하며 성전의 개시를 알렸고, 그동안의 행보와는 차원이 다른 전면전을 선포했다.
이는 에일이 먼저 루에게 제안한 것으로, 자신의 이름값과 이번 화제를 이용해 더 많은 이들을 끌어내기 위함이었다.
안 그래도 에일의 랭킹 진입이 한껏 화제가 되었던 상황에, 빛의 교단의 성전 선포는 기름을 붓는 셈이었다.
모든 사람이 이목이 집중되고 있어 효율이 극대화되는 순간에 취한 행동이었다.
“여신을 위하여!”
“정화의 불길로 이단을 말살하라!”
그야말로 수많은 유저들이 성전의 구호를 외치며 북동부로 모여들었다.
성전을 위해 자발적인 참전군이 모여드는 중이었다.
기존 신도들은 물론, 이번에 새로이 뜻을 더한 이들까지.
이번 성전에 발을 들인 이들의 참여율은 감히 다른 교단이나 세력과는 비교가 불가능했다.
안 그래도 큰 화제 거리였던 빛의 교단 팩션에서 이런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하자 흥미를 끌기엔 충분했고, 다신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신의 대리인을 자처하는 루의 광신도들은 가장 큰 규모를 지닌 대지 교단의 군세까지도 가볍게 뛰어넘었고, 그 과정에서 눈에 보이는 모든 이단과 적들을 모조리 불태우며 진군했다.
한마음 한뜻으로 모여 콘셉트에 심취한 이들의 단결력이란 무서웠다.
“우리는 여신의 검과 불꽃, 의무를 이행하라!”
광기의 일렁임은 그칠 줄을 몰랐다.
* * *
끄아아악!
연달아 울리는 폭음과 비명 소리.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며 일어난 소음들로, 혼란한 숲속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대지 교단측 병력을 휩쓰는 엄청난 숫자의 광신도들, 아니나 다를까 빛의 교단의 기세는 엄청났다.
선두에서 붙은 적들을 완전히 격퇴하는 중이었다.
‘역시 대단한걸…….’
높다란 언덕 위에서 전장을 내려다보던 에일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한번 바람을 탄 광기의 불씨는 쉽사리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단심판관과 광신도, 그 콘셉트질의 끝은 역시나 성전이었다.
주가가 하늘을 달리고 있는 에일의 주도 하에, 십자군 원정에 나서는 기사의 마음으로 모여든 유저들.
이미 정의에 심취해 두려울 것이 없는 유저들은 이 광기에 찬 분위기에 한껏 고취되어 전장에 뛰어들었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이득을 위해 죽음을 극도로 꺼리는 상대측 유저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번엔 교단의 NPC들로 이루어진 기사단과 사제 측의 병력 또한 만만치 않았다.
무려 성전이 개시된 만큼, 다른 일들을 맡고 있던 NPC들까지 대거 동원되었고, 최고위직인 여섯 집행관 중에서도 에일을 포함해 세 명이 나섰을 정도였다.
‘물론 결사단 탓에 전부가 나서는 건 무리지만… 이것만으로도 엄청나.’
빛의 교단은 원래 규모는 작은 편이었지만, NPC나 유저나 광기로 똘똘 뭉친 덕에 개개인의 전투력만큼은 아주 뛰어난 편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수많은 영향력을 모으며 교단의 덩치는 커져 갔고, 이제는 개인 전투력에 더해 규모까지 갖추게 된 셈이었다.
정면으로 붙게 된 대지 교단측 신도들은 속수무책으로 연달아 패하며 전선에서 밀려났다.
“굉장하네.”
어느새 옆까지 다가온 나이트메어의 길드장, 카린이 함께 전장을 내려다보며 감탄했다.
그녀를 돌아본 에일은 제법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다시 돌아왔다는 건……?”
“그래, 작전은 성공이야.”
카린이 홀가분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원래대로라면 그녀는 지휘를 위해 6대 길드 간의 전면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위쪽 전선에 자리해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직접 소수의 랭커들과 함께 후방에 파고들어 아폴리온의 보급로를 박살 내고 돌아왔다.
인벤토리를 지니고 있는 유저들이라면 식량과 보급 걱정이 훨씬 덜하다고는 하나, NPC 군세의 경우는 달랐다.
6대 길드쯤 되는 거대 길드들은 엄청난 자본으로 플레이어가 아닌 NPC들로도 군단을 꾸리기 마련이었고, 그 규모는 소속된 유저의 숫자를 가볍게 넘어설 정도였다.
이는 당연히 전쟁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 중 하나였다.
카린이 주요 보급로 중 하나를 완전히 박살 낸 이상, 일부 길드 NPC들을 운용하는 데 곤란함을 겪을 것이다.
“벌써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곤 생각 못 했네. 아폴리온에서도 방비를 소홀히 하진 않았을 텐데.”
“길드장인 내가 직접 움직였을 줄은 몰랐겠지. 그것도 내가 솔로스한테 지휘를 다 맡기고서 말이야.”
서로 잡아먹으려 들던 두 라이벌 길드의 협력.
하지만 공동의 적이 생긴 지금, 서로가 괜한 수작을 부리며 일을 망칠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직 기뻐할 단계는 아니야. 아폴리온의 간부들이 갑자기 모습을 안 보이기 시작했거든. 어디서 또 무슨 꿍꿍이를 벌이고 있는 건지… 뭐, 그래도 너희가 선전해 준 덕분에 우리 쪽에선 부담이 줄었어. 이거 성물 파편 정도로 답례가 될지 모르겠네.”
아폴리온 그리고 나이트메어와 여명.
6대 길드끼리 직접 부딪친 위쪽 전선은 여전히 팽팽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 상황 속, 지금처럼 아래쪽 전선에서 계속 빛의 교단이 치고 들어오면 상대의 입장에서는 전선을 유지하는 데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원래대로라면 아폴리온이 포섭해 둔 두 교단의 세력들이 거꾸로 진격해 압박을 줘야 했지만.
처음 기대와는 달리, 빛의 교단이 굉장한 활약을 보인 덕에 아폴리온 쪽에선 역으로 압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교단의 입장에서도 공주가 반드시 왕권을 잡아야 하니까. 그런 문제를 신경 쓸 필요는 없어.”
“뭐, 그렇다면 다행이고. 어쨌든 아폴리온 그 녀석들은 오히려 교단들을 끌어들이다가 역으로 당한 셈이네. 이제 조금은…….”
타악!
순간 느껴지는 기척에 카린이 뒤를 돌았다.
그와 거의 동시에 기척을 알아차린 에일도 재빨리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댔다.
언덕에 올라서 있던 그들의 앞에 나타난 것은 거구의 남자.
아폴리온의 간부 중 하나인 ‘다고스’였다.
‘갑자기 무슨……?’
절대 모를 수가 없는 그의 얼굴에 에일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전체 랭킹 16위의 하이 랭커이자, 아폴리온의 중추를 맡는 다섯 명의 최고 간부 중 하나.
길드장인 크루거를 제외하면, 길드 내에 다섯 간부와 비교할 수 있는 이 자체가 없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위치에 있는 다고스가 난데없이 이곳에 나타났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에일이 혼자 있을 때를 노리고 왔나 보지? 하지만 타이밍이 안 좋았어.”
파앗!
순식간에 단검을 뽑아 든 카린이 그에게로 접근했다.
그녀는 멍청하게도 자신의 눈앞까지 찾아온 간부를 놓칠 생각 따위는 없었다.
무려 유일 급의 접근기를 사용한 카린의 속도는 눈으로 쫓기 버거울 만큼 엄청났다.
워로드 최속의 도적답게 수준급의 랭커라도 꼼짝하지 못하고 나가떨어질 만큼 날카로운 일격이었다.
쩌엉!
하나 다고스는 그런 그녀의 공격을 멀쩡히 받아 냈다.
심지어 카린은 그가 보인 예상 밖의 힘에 뒤로 밀려났다.
촤아악!
‘뭐지?’
주르륵 밀려난 카린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폴리온의 최고 간부인 다고스가 뛰어난 실력의 하이 랭커라는 것쯤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와의 PVP를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은 결코 아니었다.
워로드의 랭킹 1위에서부터 6위.
이에 속한 6대 길드장만큼은 그외 다른 하이 랭커들이 비견될 수조차도 없을 만큼 완전히 다른 차원의 존재였다.
하지만 그를 멀쩡히 막아 낸 다고스는 담담하게 말을 내뱉었다.
“괜히 날뛰지 마라. 여기 싸우러 온 게 아니니까. 나는 이야기를 하러 왔다.”
“이야기……?”
“그래, 그리고 네가 아니라 이쪽이다.”
다고스의 두터운 손가락이 에일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