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랭크 인 (5)
“선배님! 혹시 그 소식 들으셨어요?”
여직원이 호들갑을 떨며 들어왔다.
그러자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보며 커피를 홀짝이던 남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지금 보고 있었어.”
랭킹에 등장한 에일의 이름.
1년이나 늦게 시작한 루키가 몇 달도 되지 않아 최상위권 유저들을 따라잡으며 워로드 공식 랭킹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정말 아무도 예상 못 한 소식이었고, 워로드의 개발사 안에도 그 소식이 들어갔다.
‘랭커라니 정말 그 녀석 말대로 됐잖아…….’
그는 처음 우진을 발견하고 설레발을 떨던 동료가 떠올렸다.
접속에 관련해 최초로 문제가 생긴 우진의 집까지 직접 찾아갔던 여직원의 동료가 바로 그였다.
복귀한 그녀와 회사에서 잡담할 때만 해도 설마라는 생각뿐이었는데, 그는 모두의 예상을 아득히 넘어 버리며 랭커를 쓰러뜨렸다.
“다른 부서 쪽에서 들어 보니 동조율이 100을 넘었다 하더라고. 제약을 걸어 강제로 낮춘 걸 다시 111퍼센트까지 끌어올리다니. 나참, 괴물이 따로 없네.”
“그럼 혹시 위험하지는 않을까요? 저번 오류 사례에 동조율이 너무 높아서 그런 문제가 발생했다면…….”
“아니, 200만 넘지 않으면 상관없으니까 문제는 안 생길 거야. 저번 출장 때 혹시 몰라 접속기에 안전장치를 하나 더 달아 놨다고 했거든. 거기다 이번엔 신격이라는 안전장치도 있으니 상관없겠지.”
“하긴 그분은 루의 사도였죠… 그러고 보니 신격들의 경쟁은 어떻게 될까요.”
“글쎄, 모두가 성물에 관심 있는 건 아니니까.”
유저들 간에 떠도는 이야기에 의하면 모든 신격이 적극적으로 성물을 찾아 나서며 치열한 경쟁이 들어섰다고 했다.
하나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알타리엘은 아예 성물을 거들떠보지도 않아. 의외로 라자갈도 시큰둥한 반응이고. 성물 파편을 모두 모으려 하기보다는, 얻을 때마다 주어지는 영향력 쪽에 더 관심 있는 모습이지.”
이번 성물에 관한 신화급 퀘스트는 단순히 권력을 잡거나, 유일신이 되는 문제가 아닌 만큼, 각자의 성향에 따라 완전히 선호도가 달라지곤 했다.
각자 제각각의 인격을 부여한 인공지능체였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반드시 신격들이 성물을 모으도록 강제하는 제약 같은 건 없었다.
그들이 가진 스스로의 의지를 따라 움직일 뿐.
“반대로 프레이아나 바하무트는 성물들을 어떻게든 모두 얻으려 움직이는 중이지. 특히 루는 거의 집착 수준이야. 물론 처음 프로그래밍 됐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이 됐던 부분이지만, 이렇게 가장 앞서나갈 줄은 몰랐는데.”
규모로 앞서던 물의 교단과 대지 교단마저도 제치고, 가장 성물 획득에 가까워진 것은 ‘루’였다.
물론 아직 규모는 대지 교단이 가장 크고 위협적이라는 건 변함없었지만, 일이 지금까지처럼 흘러간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에일이 최초의 사도가 된 이후 수많은 활약을 보인 덕분이었다.
‘우연이 그들을 도와주기도 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
* * *
“으, 배고파.”
우진은 주린 배를 움켜쥔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워로드 속에선 인벤토리에 배를 채울 음식이 충분했지만, 현실의 허기마저 달랠 수는 없었다.
우진은 끈질긴 추적자들부터 벗어나 안전한 곳에 숨은 뒤, 로그아웃을 해 식사를 하려 냉장고 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때 그를 반긴 것은 싸늘한 한기뿐.
‘요즘 하도 정신없이 플레이했더니, 쌀 사두는 것도 잊고 있었네.’
텅 빈 냉장고와 밥솥 탓에 집 밖으로 나와야 했다.
지금이 얼마나 급박한 상황이든 어쨌든 다 먹고살자고 하는 거니, 모자 푹 눌러쓴 채 외출했다.
“야, 방금 뒤에…….”
“뭐?”
방금 길을 지나친 두 학생이 그를 훑고 지나갔다.
수군수군거리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고, 우진은 이제 익숙한 듯 그 광경을 받아넘겼다.
‘아직도 좀 어색하긴 하지만… 이젠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니까.’
방금 지나간 둘은 보나마나 그가 빛의 교단의 ‘에일’이 아니냐며 실랑이를 하고 있을 것이다.
최근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은 저 둘이 끝이 아니었다.
점점 워로드의 에일이라는 이름이 알려지면서, 현실에서의 우진도 알아보기 시작했다.
당장 아파트 승강기에서 마주친 옆집 아저씨도 그를 본 순간 깜짝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을 정도니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잡은 컨셉이 컨셉인지라 이상한 눈빛으로 보는 이도 간혹 있었고, 다소 귀찮은 상황도 몇 번 맞이했다.
하지만 결국엔 이러한 반응 또한 아주 좋은 지표 중 하나였다.
그는 애초부터 전략적으로 유명세를 활용할 작정으로 이 일들을 시작했고, 상황이 좋게 맞아떨어져 가면서 최근 가장 핫한 네임드 플레이어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길드에 들지 않은 개인 유저로서 이러한 유명세는 아주 유용하게 무기 중 하나였다.
거기다 그나마 지금처럼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나서면 알아보지 못하는 쪽이 대부분이었으니, 실생활에 딱히 큰 불편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은 왜 이러지…….’
우진이 불편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아까부터 계속해서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방금 지나간 학생들을 포함해 두세 명이라면 별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최소 수십.
가는 곳마다 그를 알아보며 에일이 아닌가 살펴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당장 그의 등 뒤에서도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차마 어색함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대체 뭔 일이야 이게?’
무슨 날인 것도 아니고, 이렇게나 사람들이 자신을 많이 알아보는 건 처음이었다.
마치 랭커라도 된 듯이 몰려드는 시선들.
전 세계에 상위 천 명뿐인 랭커의 화제성과 인기라면 서울 한복판 길거리에서도 정체를 알아보고 몰려들 만했지만, 자신은 아직 그렇지 않았다.
‘기분 탓은 확실히 아닌데…….’
찰칵!
“앗.”
등 뒤에서 울린 카메라 소리.
“우아아악!”
우진이 뒤를 돌아보자 깜짝 놀란 남자는 움찔하더니 비명을 토하며 도망갔다.
셔터 소리를 몰래 끄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멋대로 사진을 찍은 모양이었다.
게임 속 이미지를 생각한 건지 창백해진 얼굴로 도망가는 게, 꼭 자신이 가해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지금이 무슨 2010년대도 아니고 지킬 건 지켜 줘야지.”
가차 없이 초상권을 박탈당한 우진이 투덜거리며 편의점에 들어섰다.
최근 그의 지갑 사정상 근사한 식당을 들러도 상관은 없었지만, 우선은 일이 급하니 대충 때우려는 셈이었다.
‘맥주는… 참아야겠지.’
입맛을 다신 우진은 들었던 맥주캔을 살포시 내려놓았다.
그는 게임을 시작한 뒤로 본의 아니게 오랜 금주를 이어 나가는 중이었고, 당분간 깨질 일도 없어 보였다.
그는 도시락이나 샌드위치 등 식사거리를 잔뜩 싸들고, 카운터 앞으로 다가갔다.
그때, 계산하던 알바생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 왔다.
“그, 에일 님 맞으시죠? 첫 영상 올리실 때부터 팬이었습니다! 혹시 같이 사진 한 장 가능하세요?”
“아… 예, 뭐…….”
아까부터 뒤쪽에서 시선이 느껴지더라니만, 역시나 그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하지만 사진이라니…….’
자기가 무슨 연예인인 것도 아닌데 상당히 머쓱했다.
하지만 굳이 거절하기도 뭐했고, 우진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함께 사진을 찍었다.
평소엔 전혀 의식하지 않았던 건데, 이럴 땐 손을 어디다 둬야 하는지조차도 참 난감했다.
하나 그런 우진과는 달리, 알바생은 여전히 이런저런 포즈를 취해 보며 말을 끊임없이 건네 왔다.
“저도 얼마 전에 빛의 교단에 들어갔습니다. 에일 님이 나타나기 전에는 솔직히 그런 교단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여신님 동상을 볼 때마다 너무 아름다워서 충성을 바치게 되더라고요. 성지 순례는 벌써 두 번이나 갔는데 역시 고전이 최고라고 잉골 숲이 제일인 것 같습니다. 분위기도 섬뜩한 게 완전……! 에일 님이 괜히 처형 장소로 선택하셨던 게 아니었어요. 아, 맞다! 이번에 랭커 찍으신 거 진짜 축하드립니다, 설마 랭커를 쓰러뜨릴 줄이야. 크… 정말 대단하십니다!”
‘어……?’
끝도 없이 재잘거리던 알바생의 말 사이에 이상한 내용이 들어가 있었다.
자신이 랭커를 찍었다니, 잠시 어리둥절하던 우진은 순간 자리에 뻣뻣하게 굳었다.
‘잠깐, 설마.’
머리가 한 대 맞은 듯 멍해진 우진은 서둘러 물건들을 챙기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딸랑!
“조심히 들어가세요! 아싸, 에일 봤다고 자랑해야지.”
눈치 없는 알바생은 그의 모습에 별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사진을 SNS에 올릴 생각에 싱글벙글한 중이었다.
그사이 골목으로 헐레벌떡 뛰어간 우진은 사람들이 없는 걸 확인하자마자 핸드폰 화면을 켰다.
그가 곧바로 접속한 것은 워로드의 공식 홈페이지.
그중 메인 정가운데에 걸려 있는 항목을 클릭했고, 그 안엔 화려한 화면과 함께 유저들의 리스트가 가득했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천 명의 랭킹.
우진은 서둘러 스크롤을 주르륵 내렸다.
‘미친…….’
아니나 다를까 에일의 이름이 떡하니 새겨져 있었다.
레벨과 직업, 소속까지 모두 정확했고, 절대 착오가 있는 경우도 아니었다.
‘아니, 상위 플레이어 상대로 전적이 많이 쌓인 것도 아니었는데, 벌써 랭킹에 올랐을 줄이야. 아직 레벨이 낮은 탓에 기대도 안했어. 스탯이나 스킬 세팅도 랭커들 사이에선 뛰어난 편은 절대 아닐 텐데… 잠깐, 게다가 934위?’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 못 했던 우진은 자신의 눈앞에 들어찬 숫자들의 향연에 흥분이 도통 가시지 않았다.
대부분의 게임들과는 다르게 워로드 랭킹은 단순히 레벨만으로 결정되지 않았다.
보유 장비나 스킬은 물론 게임 내에서 보인 실력까지도 산정되었다.
몬스터를 사냥하든 유저와 PVP를 겨루든.
그 외의 자잘한 움직임까지 모두 기록이 되어, 순위가 매겨지는 최첨단 랭킹 시스템이었다.
직업이나 속성 상성에 따라 갈릴 수도 있지만, 에일이 페이와의 대결을 통해 보인 모습은 보편적으로 935위의 랭커보다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최소 260레벨 이상의 최상위 유저들만이 가득한 이 랭킹 사이에서, 불과 221레벨에 불과한 에일이 랭킹에 진입한 것은 그야말로 놀라운 일.
단순히 놀라움을 넘어서, 자리가 안 잡혀 혼란했던 워로드 극초반대의 상황을 제외하면 아예 유래가 없는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인터넷상으로는 이미 엄청난 파장이 일었다.
그에 대한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고, 한국 유저들 사이에서는 두유노 멤버에 가입시키자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왔다.
상상 이상의 반응에 우진조차도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잠깐, 그러고 보니… 지금이라면 가능하지 않나?’
우진의 머릿속에 번뜩 생각이 스쳤다.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긴 채 견적을 짜보던 그는 곧 결론을 내렸다.
“그래, 이 상황을 이용해야지.”
골목을 빠져나온 우진은 발걸음을 서둘렀다.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하는 법.
사람들의 관심이 극대화된 지금.
이 관심을 이용한다면, 그가 항상 생각해오던 다음 행동을 취할 수 있었다.
이젠 에일 자신뿐만이 아니라, 교단 전체가 전면으로 나설 때였다.
‘성전… 성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