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랭크 인 (4)
콰아아앙!
커다란 폭발이 일어나며 불꽃이 터져 나왔다.
피어올라 시야를 가렸던 연기가 잠잠해지자, 그 자리엔 희귀 야수인 그림 베어의 시체만이 남아 있었다.
오히려 페이의 함정에 휘말려 폭사한 모습.
그 전에 입었던 수많은 검상의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마지막 폭발이 치명타였다.
‘설마 함정 위치까지 계산해 뒀을 줄이야!’
나무 위에 웅크리고 있던 페이의 표정이 낭패를 봤다는 듯 찌푸려졌다.
오히려 그의 함정에 소환수가 당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모두 에일이 의도한 것이었고, 역으로 당해 버린 꼴이 되어 버렸다.
숲속에 깔아 둔 모든 함정의 위치를 알아내는 건 당연히 무리일 테지만, 확신이 드는 몇몇 위치를 추려내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화살이 날아드는 경로와 소환수들이 피하는 지점들을 끊임없이 계산하며, 확실하게 추려낸 함정의 위치를 정확히 이용해 낸 것이다.
무엇보다 방금의 수는 단순히 함정을 이용해 소환수를 제압한 것에 대해서만 의미 있는 게 아니었다.
‘젠장, 놓쳐 버렸어.’
연달아 발동된 세 개의 폭발 함정.
예상 못 한 연쇄 폭발에서 뿜어져 나온 자욱한 연기 탓에 에일의 위치를 놓쳐 버린 것이다.
연기가 잦아들은 지금도 그가 어디로 향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도망간 건가……. 이거 한 소리 듣겠는데.”
이런 깊은 숲속이라면 그의 홈그라운드나 다름없었다.
근처에 있다면 기척을 읽을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이 주변을 빠져나간 뒤라는 것.
페이는 아쉬운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에일은 그의 예상을 가볍게 깨고서 나타났다.
“아니!”
“뒤……?”
콰아아아!
등 뒤에서 나타난 에일의 일섬.
검격과 성화가 나무와 함께 그를 휩쓸었고, 튕겨져 나간 페이가 바닥을 뒹굴었다.
아무리 그라도 방금의 수에 반응하긴 무리였다.
“크헉…….”
겨우 일어선 페이는 입으로 피를 쏟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체력바는 아슬아슬한 수치로 깜빡이고 있었고, 조금만 더 공격이 깊숙이 들어왔으면 그대로 빈사 상태에 빠질 뻔한 수준이었다.
“하… 골 때리네.”
모습을 감췄던 에일이 크게 돌아 뒤를 잡는 동안 기척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사냥꾼 랭커인 페이의 입장에서는 굴욕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순식간에 다시 나타난 것으로 보아, 숨어서 해독제를 마시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다.
이는 시간 안에 자신을 끝내 버릴 자신이 있다는 것.
‘날 우습게 본다 이거지…….’
조금 전과 완전히 반대가 되어 버린 듯한 상황에 페이는 단숨에 활시위를 당겼다.
빠르게 뻗어진 화살이 다섯 갈래로 나뉘었다.
콰지직!
높은 파괴력을 지닌 다섯 갈래의 화살은 경로가 마구 휘어지며, 마주친 나무와 바위까지도 박살 내며 위력을 뽐냈다.
하지만 몸을 놀린 에일은 손쉽게 화살을 피해 냈다.
쩌엉!
단숨에 거리를 좁혀든 에일이 매섭게 검을 휘둘렀다.
페이는 어쩔 수 없이 단검을 뽑아들어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고, 뒤로 계속해서 밀려났다.
에일의 체력은 벌써 5퍼센트 남짓.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나 다름없었고, 독의 효과를 이용해 지구전으로 가려고 한 것이다.
희귀 야수 둘까지 모두 잃어버린 상황에서 근접전이 버겁긴 하겠지만, 그에겐 아직 수많은 함정이 남아 있었다.
‘뭐, 뭐야 이거……?’
하지만 휘몰아치는 에일의 공격을 직접 마주한 페이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저기서 발동되는 함정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파훼하며, 매섭게 달려드는 에일의 움직임은 처음에서의 모습과는 차원이 달랐다.
“젠장, 갑자기 각성이라도 한 거야 뭐야?”
“비슷할지도.”
“뭐……?”
쩌엉!
순식간에 빈틈을 향해 검을 휘두른 에일은 페이의 단검을 튕겨냈다.
이전까지만 해도 에일은 자신의 미세한 동조율 변화에 대해서 거의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 오버드라이브가 작동되어 사고가 가속되어 있는 지금은 이야기가 완전히 달랐다.
이젠 매 순간순간이 그의 눈에선 다소 느리게 보일 지경이었고, 안 그래도 뛰어난 반응 속도를 지닌 에일에게 닥치는 장면을 천천히 보여 주기까지 하니 플레이가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 이런!’
다가오는 에일의 장검에 페이가 당황했다.
한 번의 공격조차 치명적인 상황이었지만, 단검을 놓친 지금의 상태로서는 미처 대응할 수가 없었다.
‘저건……?’
그 순간 에일을 바로 마주한 페이가 눈을 크게 떴다.
점점 높아져 가는 동조율에 그의 변화점이 외부에도 선명히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금빛 광채가 일렁이는 에일의 눈동자.
저게 무엇을 뜻하는지 그로서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처음 마주했을 때의 그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
콰악!
장검이 페이의 심장을 꿰뚫으며 관통했다.
그의 움직임이 일순간 멎었고, 체력 창은 0을 향해 줄어들었다.
“이만한 레벨 차이인데도 지다니.”
페이가 허탈하게 헛웃음을 흘렸다.
워로드의 상위 천 명.
‘랭커’라는 이 자리까지 올라오면서 큰 레벨 차이를 극복하고 상대를 압살해 본 경우는 많았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않았다.
당연히 40레벨 차이의 루키에게 질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래도… 뭐, 억울하진 않네.”
털썩!
피식 웃은 페이가 그대로 자리에 쓰러졌다.
* * *
[해독제의 효과가 나타납니다!]
[중독 상태에서 벗어났습니다!]
“휴.”
서둘러 해독제를 챙겨 마신 에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남지 않은 체력에 맹독의 중독 효과까지 걸린 상황이었지만, 무사히 싸움을 끝내는 데 성공했다.
물론 한순간을 기점으로, 그 이후부턴 과정에 위기감은 없었다.
머릿속으로 그렸던 대로 페이를 성공적으로 제압해 낸 에일이었다.
[치유 포션의 효과가 나타납니다!]
[체력이 즉시 회복됩니다!]
치유 포션을 마셔 체력을 최대치까지 회복시킨 에일은 슬쩍 시선을 옮겼다.
‘이거 꿈은 아니겠지…….’
쓰러져 있는 페이의 시체를 믿기지 않는 다는 듯 바라봤다.
정말 자신이 일대일로 워로드의 ‘랭커’를 쓰러뜨린 것이다.
특이 체질로 가상현실에 손도 대지 못했을 적에는 언제나 꿈꿔 왔던 일이었지만, 막상 현실로 다가오자 얼얼한 느낌이었다.
‘허…….’
하나 그의 입가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희미한 미소가 띄워지고 있었다.
[‘은밀한 탐구자’가 놀라움을 표합니다!]
[‘생명의 어머니’가 고개를 저으며 현실을 부정합니다.]
[‘빛의 심판자, 루’가 당신의 놀라운 위업에 감탄합니다!]
[‘화산의 지배자’가 기꺼이 당신을 후원합니다!]
[공용 교단 공헌도 +500]
[공용 교단 공헌도 +2,500]
[빛의 교단 공헌도 +5,000]
.
.
.
그를 지켜보고 있던 신격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랭커와의 파격적인 승부.
거기에 신격들은 유저의 동조율과 오버드라이브 시스템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고, 에일에게 닥친 변화가 어떤 것인지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단순히 랭커를 쓰러뜨렸다는 것 이상의 놀라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 방금 그거… 다시 해볼까’
조금 전의 전투가 떠오른 에일은 차분히 눈을 감았다.
마치 무아지경에 빠진 듯했던 그때의 자신.
당시의 그 감각을 여기서 잊고 싶지는 않았다.
눈을 감은 채 이전의 감각을 되새기며 집중력을 끌어올렸고, 차오르는 감각 속에 서서히 빠져들었다.
파아아앗!
‘놀랍네…….’
눈을 뜬 에일이 주변을 바라봤다.
완전히 상황에 몰입되며 느려진 듯한 장면들이 눈에 들어왔다.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에 나타난 그의 동조율은 무려 105퍼센트에 달했다.
111퍼센트마저도 넘어섰던 조금 전에 비하면 덜했지만, 결과자체는 성공적이었다.
‘내 동조율이 이렇게 높다니… 생각도 못 했어.’
그는 신기한 듯 시스템 메시지 속에 적힌 높은 수치를 바라봤다.
과거 접속에 문제가 생겼을 때, 직접 사유를 듣지 못했던 에일은 지금 적힌 자신의 동조율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 정도라면 동조율을 끌어올리기 전에도 최소 90퍼센트대는 되었을 거라는 건데, 그렇다면 6대 길드장들과 다를 게 없었다.
물론 한껏 끌어올렸던 최대치의 동조율은 그들과 비교도 안될 만큼 훨씬 뛰어넘게 된 셈이었고.
‘그렇다면 이제 이걸…….’
파앗!
“읏…….”
순간 머리가 핑 도는 것을 느낀 에일이 비틀거리며 나무를 짚었다.
어느 순간 집중력이 탁 풀리며 오버드라이브 상태도 풀리고 말았고, 약간의 두통이 뒤따랐다.
그도 그럴 것이 본인의 동조율을 의도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선 초월적인 순간 집중력이 필요했다.
아무리 그라도 이 상태를 오래 지속하기란 불가능했다.
‘확실히… 남발하면서는 못 쓰겠는데.’
에일은 짧은 두통이 가신 머리를 슥슥 문질렀다.
장시간 전투를 치러야 하는 대규모 전쟁이나, 사냥 같은 때에 사용하기엔 확실히 무리인 것 같았다.
중요한 순간에 언제든 쓸 수 있도록 연습의 필요성이 느껴지는 바.
하지만 그때 그를 뒤쫓아온 추적자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확실해. 이쪽에서 들렸어.”
“찾았다. 이쪽이야!”
연달아 울려 퍼진 폭음을 쫓아온 듯한 아폴리온의 추적자들.
정규 길드원은 아닌, 산하 길드 소속의 인원이었다.
“이크…….”
숨을 죽인 에일은 몸을 낮췄다.
네다섯 밖에 안 되는 수였지만, 곧 더 많은 추적자가 사방에서 몰려들 게 뻔했다.
개인 랭커들의 개입까지 확인한 지금.
괜히 추적자들과 마주쳤다간 일이 아주 귀찮아질 수 있었다.
스륵!
지체 없이 움직이기 시작한 에일이 수풀 너머로 사라졌다.
한편 길가에 다다랐던 아폴리온의 산하 길드원들은 습격당한 대지 교단측 신도의 시체들을 발견했다.
“젠장, 고약하네.”
“흔적으로 봐서는… 아무래도 에일이 직접 왔다 간 것 같은데?”
길드원들이 처형당한 흔적을 살피며 말했다.
여기저기 섬뜩한 빛의 교단의 문양이 핏빛으로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에일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았다.
“잠깐, 이쪽으로 와 봐!”
길가 아래로 내려갔던 길드원의 외침.
그의 다급한 목소리에 동료들은 서둘러 경사면을 내려섰다.
그리고 그곳에 놓인 한 구의 시체를 발견했다.
“무슨……?”
“마, 말도 안 돼!”
989위의 사냥꾼 랭커, 페이.
그의 시체가 피를 쏟은 채 널브러져 있는 것이다.
길드원들은 경악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았고, 직접 보고 있음에도 차마 믿을 수가 없었다.
“랭커가 에일에게 당했다고? 그럴 리가…….”
“이봐, 그거 확인해 봐!”
길드원은 허겁지겁 자신의 화면을 띄워 한 창을 띄웠고, 그 안에 적힌 리스트의 목록을 주르륵 확인했다.
그리고 그 안엔 선명히 쓰여진 에일의 이름이 빛나고 있었다.
“세상에, 정말이잖아……?”
* * *
콰앙!
한 남자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아폴리온 길드의 집무실에 요란한 소음이 울렸고, 평소라면 그의 길드장에게 잔소리를 들었을 만한 일이었다.
하나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이봐, 크루거! 그 소식 들었어?”
“그래.”
이미 화면을 바라보고 있던 크루거가 쓴웃음을 흘렸다.
“이거, 제대로 사고를 쳐 주셨네.”
[934위, 에일 - 221레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