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랭크 인 (3)
콰아아앙!
“커헉……!”
폭음과 함께 튕겨 나간 페이가 거친 숨을 내몰았다.
그의 앞엔 양쪽에서 발동된 함정을 박살 낸 에일이 서 있었다.
‘끝났다고만 생각했는데 어떻게…….’
방금 입은 데미지 자체는 크지 않았다.
하나 에일이 보인 방금의 움직임은 일반적인 범주를 넘어섰다.
바로 앞에서 지켜보고 있던 그마저도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놓쳐 버렸을 정도였고, 함정을 뚫고 공격을 해올 때는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피해를 감수하고 발밑에 있던 폭발 함정을 발동시켜 겨우 다시 거리를 벌리기는 했지만, 만약 그가 끝났다고 약간의 방심이라도 했었다면 그대로 끝장났을 수도 있었다.
‘확실히… 방금 그건 루키나 준랭커 수준이 아니었지. 하지만 그래 봤자 바뀔 건 없어.’
에일은 이미 맹독에 당한 상태.
자체 회복기로 피해를 경감시켜 시간을 끈 모양이었지만, 해독제만 마시지 못하게 한다면 결국 그의 승리였다.
파앗!
페이가 다시 숲속으로 숨어들으려 하자, 에일은 다시 그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미처 다가가기 전, 발치에 이어져 있던 실이 끊어졌다.
양옆에서 독침들이 사출되어 빠르게 날아들었다.
속도와 숫자 탓에 피하려면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는 함정.
하지만 에일은 그를 보고도 오히려 정면으로 한껏 파고들었다.
날아드는 독침들의 경로를 모두 눈에 담은 뒤, 정확히 피할 수 없는 것들만 검을 휘둘러 쳐냈다.
“이크.”
까앙!
에일과 페이의 검이 맞부딪쳤다.
레벨 차이에도 불구하고 묵직한 무게감에 페이의 팔이 파르르 떨려왔고, 눈앞에서 일렁이는 하얀 불꽃이 섬뜩했다.
광기와 총애도 덕에 220대 유저치고는 스펙이 굉장히 높은 에일을 상대로 근접전에선 오래 버티기 어려웠다.
덜컹!
뒤로 밀려나며 위치를 유도해 이번엔 두 개의 함정이 동시에 발동되었다.
하지만 에일은 모습이 드러난 함정이 작동하기 직전, 검을 뻗어 기관을 꿰뚫으며 무력화시켰다.
‘미친……!’
기겁한 페이가 입을 쩍 벌렸다.
자신이 파둔 함정을 육안으로 확인하기란 불가능한 일.
미리 파악해 둔 것도 아닌 함정들을 단순 반응으로만 모조리 해체해 버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상대한 랭커 중에서도 이런 짓이 가능한 건 몇 없었다.
‘위험해!’
바짝 따라붙은 에일의 모습에 페이는 오히려 단검을 집어넣고 급히 활을 꺼내 들었다.
파바박!
페이의 몸이 빙글 돌아가며 에일에게 여러 발의 화살이 날아갔다.
공격과 동시에 회피를 할 수 있는 ‘회피 사격’ 스킬.
영웅급의 액티브 스킬인 만큼 단순히 회피를 하는 것만이 아니라, 날아드는 화살들의 위력마저도 뛰어났다.
섣불리 접근하려 했다간 역으로 당하게 된다.
그렇기에 에일은 아예 자리에 멈춰서 검을 크게 휘둘렀다.
화르르륵!
정확히 페이에게로 날아간 불의 세례.
민첩한 사냥꾼 랭커인 페이라면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일격이었겠지만, 지금의 그는 피할 수 없었다.
워로드에 완벽한 스킬이란 없듯이, 회피 사격의 약점은 바로 회피 모션이 고정되어 정해져 있다는 것이었다.
스킬을 발동하며 물러서는 방향은 정할 수 있지만, 뛰는 거리와 속도, 착지 지점은 변함없이 일정했다.
그리고 에일은 회피 사격을 사용한 페이의 방향을 확인한 뒤, 곧바로 착지 지점을 향해 광역기를 쏘아낸 것이다.
화아아악!
“큭…….”
날아든 불의 세례에 휘말려 화상을 입게 된 페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뒤늦게라도 반응해 치명타는 피했지만, 패시브로 강화된 성화의 화상으로 인해 주르륵 줄어드는 체력이 부담스러웠다.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대처한 에일의 모습.
‘그래, 내 스킬 구성에 대해 어느 정돈 잘 알고 있겠지. 랭커라면 당연히 감내할 부분이고. 하지만…….’
카앙!
페이가 달려든 에일의 검을 받아쳤다.
그리곤 곧장 에일을 향해 반격을 가했다.
가슴팍을 노리는 페이의 단검.
그 동작을 읽은 에일은 곧장 역극 스킬을 사용해 뒤편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페이의 입가가 슬며시 비틀어졌다.
“네 영상을 본 건 나도 마찬가지거든.”
콰아아아앙!
페이가 미리 뒤편에 흘려 둔 폭발 화살이 터졌다.
임기응변이 아니라, 에일이 역극을 사용할 것을 미리 예상한 페이가 설계해 둔 상황이었다.
분명 에일은 활동 기간이 짧아 랭커들에 비해선 전력 노출이 훨씬 적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스스로 영상을 올리는 만큼 플레이 스타일 정도는 분석 가능했고, 영상을 아무리 잘 손본다 한들 부자연스럽지 않으려면 숨기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나 영상을 바라보는 랭커의 시선 속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큰 동작으로 상체 쪽을 노리면서 빈틈이 보일 때, 녀석은 대부분 역극 스킬을 사용했지. 그리고 그 결과…….’
에일은 주르륵 밀려나고 말았고, 폭발로 인한 연기와 먼지로 인해 페이의 뒤를 쫓지 못했다.
‘거리는 벌렸다.’
숲속으로 모습을 감춘 페이가 한숨을 돌렸다.
예상 밖의 일격에 당해 곤욕을 치르긴 했지만, 결국 다시 숨어드는 데에는 성공했다.
숨은 김에 치유 포션을 마시고 싶었지만, 방금 에일이 보인 실력으로 보아, 아주 약간의 틈이라도 준다면 해독제를 삼킬 것이었다.
그는 활과 화살을 양손에서 놓지 않았다.
‘화상도 죽을 정도는 아니고, 지금은 내가 훨씬 유리하니까. 괜히 원점으로 돌아갈 건덕지를 줄 필요는 없지.’
페이의 시선이 멈춰 선 에일을 꿰뚫었다.
* * *
‘이건 나도 몰랐던 수네.’
궁수 계열 중 화살을 폭발하는 스킬은 몇 개 알고 있었지만, 원하던 때에 화살을 폭발시키는 스킬은 그 역시 처음 본 것이었다.
역시 주요 스킬 같은 전력을 숨기는 건, 그뿐만 아니라 여타 랭커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사냥꾼의 공격 패턴은 대강 이해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
무려 워로드의 랭커를 적수로 만났다는 사실에 초조해졌지만, 지금은 다소 머리가 차분해진 상태였다.
‘조금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분명 미리 자리를 잡은 사냥꾼의 무서움이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정면 승부로는 답이 없다는 게 유저들 사이의 지배적인 의견이었다.
하지만 페이는 이미 사냥꾼 랭커로서 활동하며 그동안 숫한 상대를 만나 왔고, 모두가 똑같은 반응을 보였을 터.
달아난다는 건 뻔히 예상된 반응이었고, 결국 페이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는 꼴이었다.
오히려 빠져나가려 하면 할수록 수렁에 빠져드는 덫이었고, 더욱 일방적인 상황에 처하게 될 뿐.
‘오히려 예상을 깨야 한다.’
그렇기에 에일이 택한 것은 정면 돌파.
기꺼이 상대가 마련해 놓은 무대 안에서 그를 쓰러뜨려 줄 셈이었다.
화륵!
우선 에일은 불의 세례 스킬로 인해, 숲에 번지기 시작한 자신의 성화를 손을 튕겨 껐다.
개인 랭커가 자신을 쫓아오는 줄 몰랐음에도, 그동안 최대한 조심하며 다닌 것은 괜한 짓들이 아니었다.
상대는 아폴리온과 그를 따르는 수많은 산하 길드와 용병 길드, 거기다 외부에서 끌어들인 제3세력들까지.
후방 지역에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자신을 노리는 추적자는 당연히 페이뿐만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 적진 한가운데에서 요란하게 시선을 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특히 눈에 띄는 백색의 불을 거하게 지르며 난리를 피우는 것은 자신의 위치를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
지금 마주하고 있는 상대가 불 좀 지른다고 해서 금세 떨쳐낼 수 있는 자도 아니었다.
스스슷.
에일의 실력을 본 페이는 완전히 숲속에 숨어 있었다.
근접전에서 벗어나는 데 방금처럼 애를 먹었으니, 이젠 함부로 모습을 드러내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야수들을 쓰겠지.’
촤륵!
아주 짧은 시간 사이, 고민을 마친 에일은 곧바로 인벤토리의 해독제에 손을 가져다 댔다.
마음 편히 해독할 시간 따위를 주진 않겠지만, 당장 페이도 똑같이 치유와 화상 포션을 마시지 못하게 항상 해독제 쪽에 손을 가져다 두려는 생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즉시 예리한 화살이 날아들었다.
파악!
몸을 피한 에일은 화살이 날아든 방향을 똑똑히 기억해 뒀다.
페이가 몸을 숨기고 있는 곳과 자신이 그곳으로 향할 경로 사이엔 항상 함정이 존재했고, 미리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해 둔 것이다.
컹컹컹!
그때 수풀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냥개들.
역시나 사냥꾼의 또 다른 특기인 야수 계열 몬스터였다.
콰악!
에일은 사방에서 달려드는 사냥개들을 해치웠다.
모습을 감춘 페이가 끊임없이 자리를 옮겨 가며 뒤통수에 화살을 박아 넣으려 해 골치 아팠지만, 그가 불러낸 게 그리 대단한 야수들은 아니었다.
단지 시간을 끌며 맹독으로 체력을 갉아먹으려는 것이다.
이제 에일에게 남은 체력 25퍼센트.
독까지 고려하면 절대로 넉넉한 수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에일은 섣불리 움직이기보단 한순간을 노렸다.
‘이걸로 30.’
에일이 지닌 ‘미치광이 광신도’ 스킬의 존재.
그는 사냥개를 베어가며 서서히 공포와 위축 스탯을 쌓는 중이었다.
‘잠깐…….’
뭔가 이상한 점을 눈치챈 페이가 멈칫했다.
어째서인지 아주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한 활시위, 그리고 급해야 할 에일이 사냥개를 상대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는 것까지.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어 소환수들을 모조리 빼냈다.
‘후, 이런 수도 있었네. 큰일 날 뻔했어.’
‘눈치챈 건가…….’
사냥개들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자 에일은 아쉬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위축 스탯을 조금이라도 쌓은 데다가, 무엇보다 자신의 움직임이 서서히 바뀌고 있는 게 느껴졌다.
겉에서 알아챌 수는 없겠지만, 그에겐 분명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휘익! 쿵!
페이가 휘파람으로 신호를 보내자, 이번엔 또 다른 야수가 수풀 속에서 나타났다.
거대한 덩치의 ‘그림 베어’와 오색늑대 ‘쿠로구마스’.
랭커답게 손꼽히는 희귀 야수 둘을 동시에 소환해 낸 것이다.
이는 에일의 공포 스탯을 의식한 소환으로 단순히 시간 벌이가 아닌, 그가 가진 진짜 전력이라는 말이었다.
콰과과광!
두 커다란 야수가 달려들며 그를 몰아붙였다.
날아드는 화살의 결도 달라졌다.
신중하고도 예리하게 날아드는 화살들은 에일의 급소만을 정확히 노렸다.
게다가 중간중간 작동되는 치명적인 함정들은 에일을 더욱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촉박한 시간과 장악된 공간.
아무리 뛰어난 실력자라도 언제 위태로이 쓰러질지 모르는 환경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에일은 쓰러지지 않았다.
‘뭐… 뭐야?’
너무나도 잘 버티는 모습에 페이조차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눈에 띄게 좋아지기 시작한 에일의 움직임.
하지만 변화가 생긴 건 보다 이전이었다.
‘보인다.’
숲을 휘젓는 에일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돌아갔다.
발동되는 함정을 부수고, 화살을 피하며, 야수를 상대하는 데에도 전혀 힘겨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동조율이 100퍼센트 초과하며 작동된 ‘오버드라이브’.
동조율이 정상치 이상으로 치솟을 때 유저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스트혼을 시작으로 모든 가상현실게임에 마련되어 있는 시스템이었다.
물론 그는 개발사들만의 이야기일 뿐.
여태 100퍼센트를 넘긴 유저가 나타난 적이 없었으니 유저들의 입장에서는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촤아악!
낯선 감각이 온몸을 뒤덮으며, 전투를 통해 점점 동조율이 올라갔다.
눈동자에 일렁이던 빛은 점점 진해졌다.
[현재 동조율 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