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소리 없는 전쟁 (5)
“으아… 여기 정말 힘드네요.”
“효율이 그만큼 대단하니까요. 동레벨대에 지상 쪽 던전 전체를 따져도 이만한 곳은 몇 없을걸요?”
바위 위에 걸터앉은 리아와 로덴이 말을 나눴다.
엘트리스에 남아 있던 그들은 새롭게 발견된 200레벨대 던전에서 한창 사냥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동안 합을 맞추며 굉장한 실력을 갖춘 그들 파티였지만, 이곳 던전은 몬스터들의 수준은 물론 리젠 속도부터 전투 템포까지 모두 빠르고 위험했다.
이런 고난도 던전에서는 무리하지 않고, 적절한 타이밍에 재정비와 휴식 시간이 필요했다.
무려 랭커 출신의 유저만 둘이 있으니, 그 부분에 대해 실수할 일은 없었다.
“리아 님, 출출한데 간식 어때요?”
“또 저한테 요리시키려는 거죠!”
“아, 아닌데요.”
본심을 들킨 로덴이 움찔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요리로 생겨날 독들을 바라는 거였다.
사냥에 열중하며 하도 달리다 보니, 전에 그녀가 대량으로 만들어 줬던 강력한 맹독들이 슬슬 떨어지려는 참이었다.
애당초 그녀의 음식은 생명체가 섭취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섰기 때문에, 로덴과 알리사가 번갈아 가며 식사를 준비해 왔다.
“전 재능이 없나 봐요…….”
좌절한 리아가 무릎을 쪼그리고 앉으며 말했다.
처음엔 그저 우연의 일치라고만 생각했지만, 그 이후로도 몇 번씩이나 실패하자 자신의 끔찍한 요리 실력을 자각할 수밖에 없었다.
“잘해 보려고 하는 데 왜 이럴까요… 게임 밖에서도 요리해 봤는데 시스템 문제가 아닌 거 있죠. 설마 제가 라면 하나 못 끓이는 요리치였다니…….”
“에이, 재능 없다고 안 될 일이 뭐 있겠어요? 분명 하다 보면 늘 거예요.”
“지금 또 시키려는 거죠?”
“…….”
만사에 어리바리하던 그녀가 언제 이렇게 눈치가 늘었는지.
눈을 돌린 로덴은 서둘러 주제를 돌렸다.
“맞아, 요번에 나온 기사 봤어요?”
“어떤 기사요?”
“워로드 개발사에서 AI 쪽에도 투자한다고 하더라고요. 현실에서도 활용 가능하게.”
당연하게도 그간 십수 년 사이, 과거로부터 변한 건 가상현실 기술뿐만이 아니었다.
워로드가 운영되는 방식만 해도 완벽한 인공지능 기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개발사 측은 외계인을 고문한 것이 아니냐 싶을 만큼 진보적인 AI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정말요? 하긴 차들도 알아서 가는 시대니까요. 그런 이야기도 나올 때도 됐겠네요.”
이미 자율 운전 시스템과 그에 맞춘 교통 체계가 보편화된 지금.
몇몇 전용 차로를 제외하고서는 오히려 사람이 수동 운전을 하면 불법이었다.
불완전한 인간의 수동 조작 특성상, 사고 위험 탓에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오히려 직접 운전이 금지된 시대가 온 것이다.
어렸을 적 도화지에 그렸던 하늘을 날아다니는 자동차 같은 건 아직 요원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정말 많은 게 바뀌고 있었다.
AI에 대한 이야기라면 한두 번 나오는 주제도 아니었고, 기초 소득제니 뭐니 하는 것까지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으니.
영화 속에서나 벌어지던 일들이 하나둘 일어나고 있었다.
“뭐, 몇 년 전만 해도 이런 가상현실이 가능할 거라 누가 생각했겠어요. 우리도 모르는 새에 휙휙 바뀌는 거죠.”
“그래도 벌써 그런 이야기가 나오다니 조금 무섭기도 해요.”
“하하, AI가 뭐가 무서워요? 그래 봤자 그냥 망치로 머리를 내려치면 끝인데.”
로덴이 휘두르는 시늉을 하며 실실 웃었다.
그에 리아는 간단한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그건 로덴 님도 마찬가지잖아요?”
“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무심코 수긍하던 로덴은 순간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앗! 죄, 죄송해요!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니라……!”
상처받은 로덴이 쓰러지듯 바닥을 짚었고, 기겁한 리아는 그런 그에게 달라붙어 쩔쩔맸다.
하지만 그들이 오두방정을 피우고 있는 동안.
알리사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자신의 개인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화면에 떠 있는 것들은 지금 워로드에 불어닥친 수많은 전쟁 소식.
아폴리온을 비롯한 6대 길드들의 움직임과 판에 끼어들기 시작한 교단들에 대한 정보들도 가득했다.
‘교단들까지 끌어들이다니…….’
예리해진 알리사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동부 황야에서 핵심 파편을 얻은 아폴리온은 일반 파편까지 더해 총 3개의 파편을 확보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성물 파편들을 대가로 대지 교단과 물의 교단을 끌어들였다.
이번에 단편적이나마 진실을 알게 된 여명과 나이트메어 길드와의 싸움에서 패를 추가하기 위함이었다.
‘이대로라면 빛의 교단까지 휘말리겠지.’
머리가 복잡해진 알리사가 고민을 이어 나갔다.
그녀의 정보망은 어지간한 개인 랭커들과도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고, 정보가 틀렸을 가능성은 없었다.
잠시 침묵하고 있던 알리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알리사’ 님이 파티에서 탈퇴하였습니다!]
“어라?”
갑작스러운 메시지에 로덴이 고개를 들었다.
시선을 돌리자 스태프를 챙겨 든 알리사가 떠날 채비를 갖춰 놓고 있었다.
“죄송해요. 당분간 함께 사냥을 못 할 것 같아요.”
“네……? 갑자기 왜요?”
깜짝 놀란 로덴과 리아가 동시에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알리사는 그저 빙긋 웃으며 답했다.
“위쪽에 확인할 일이 있어서요. 어쩌면… 시간이 조금 걸릴지도 모르겠네요.”
* * *
한동안 남동부 지역 전체를 휩쓴 나이트메어와 여명 길드 간의 전쟁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 멈췄다.
이번 전쟁으로 끝장을 보게 될 것이라 생각한 사람들의 예상을 깬 양 길드의 결정이었다.
분명 명목상으로는 서로 잠시 병력을 물린 휴전이었다.
그러나 자세한 사정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대외적으로 알려진 이유일 뿐.
지금 그들의 휴전은 또 다른 세력과의 전쟁을 치르기 위함이었다.
아폴리온과 그리핀이 부딪친 북동부의 상황은 이미 대부분 마무리된 상태.
난동을 피우던 고대 정령은 끝내 쓰러져 사라졌지만, 아폴리온 길드의 목적은 대부분 달성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예 손을 쓰기 늦어 버린 상황까진 아니었다.
초토화됐다지만 아직 지역 전체가 완전히 아폴리온의 손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기에, 격렬한 저항을 벌이며 싸움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유저들이 알지 못하는 뒷면에선 이미 소리 없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 * *
카가가강!
깊은 숲속에서 무기들이 부딪치며 번쩍였다.
여명과 아폴리온.
두 세력의 길드원들이 맞부딪친 모습이었고, 이는 여명 측 길드원들이 길드 마크까지 가린 채 후속 부대를 기습하며 시작된 것이다.
정면에서 전쟁을 선포하진 않았지만 여명과 나이트메어는 이미 두 세력 간의 다툼에 끼어들었고, 사방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이어졌다.
북동부 전장은 이미 사실상 대리전 양상이 되어 버린 모양새였다.
특히 이번에 힘을 합친 나이트메어와 여명 길드는 뉴월드에서 워로드까지 이어져 온 악연 탓에 감정의 골은 상당히 깊었다.
하지만 이렇듯 공통의 적이 생긴 이상, 길드원들도 불만 없이 힘을 합쳤다.
지금의 상황도 제대로 파악이 안 될 만큼 멍청하다면, 애초에 6대 길드에 들어올 만한 조건을 충족시킬 수도 없었다.
“이크…….”
마침 숲을 지나던 에일이 고개를 바짝 숙였다.
우연히 양측 길드원 간의 팽팽한 싸움 광경을 목격했지만, 그들의 싸움에 직접 나서 끼어들 생각은 없었다.
‘시간도 촉박한데, 괜히 여기서 소란을 피울 필요는 없지.’
길드원들을 조용히 지나쳐 간 에일은 수풀 사이를 헤치며 숲을 나아갔다.
그가 이 혼란한 동북부의 전장에 발을 들인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아폴리온 길드를 쓰러뜨리기 위함이었다.
그동안 직접적으로는 원수진 적도 없는 길드를 상대로 다소 생뚱맞을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빛의 교단은 계승권에 있어 공주를 밀어 주는 선택지를 택했고, 그 반대로 아폴리온 길드 측은 왕자의 편에 들었다.
이미 생겨 버린 세력 간 구도에 완전히 반대된 상황.
이번 계승 전쟁의 끝을 보고 또 모든 성물 파편을 모으려면, 어떻게든 아폴리온은 쓰러뜨리고 성물을 얻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알키오네의 이야기도 잘 알고 있단 말이지…….’
철십자의 길드장, 시르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린 에일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게임계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알키오네의 악명을 모를 리가 없었다.
확신할 단계는 아니기에 아직 지켜봐야 하겠지만, 시르의 말마따나 의식해 둘 필요성은 있었다.
‘여기군…….’
미리 약속된 임무 지점에 도착한 에일이 무성한 수풀 속에 몸을 숨겼다.
그의 앞쪽으로는 개간된 숲길이 뚫려 있었는데, 곧 있으면 대지 교단의 신도들이 나타날 길이었다.
철저히 왕자의 편에 선 아폴리온은 미리 확보해 둔 성물 파편들을 이용해 교단 세력까지 끌어들였고, 거래를 수락한 대지 교단과 물의 교단이 이 전쟁에 참전한 것이다.
성물 파편에 왕족과의 관계까지 걸린 중요한 판.
교단의 소속 유저들은 물론 꽤 고위층의 NPC들까지 전쟁에 전면적으로 나서며 아폴리온을 도왔다.
그리고 공주의 편으로서, 그 반대급부로 움직인 게 바로 에일과 빛의 교단이었다.
‘왔다.’
숨을 죽이던 에일의 시선이 돌아갔다.
미리 전달받은 경로와 시간 대로 대지 교단의 신도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은 숲길을 통해 가장 격렬한 최전선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전장 중 한 곳에 지원을 가고 있는 보충대에 불과했지만, 가장 강한 세력의 대지 교단답게 상당한 숫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생명의 어머니’가 고소를 머금습니다.]
[강인한 대지의 군단에 대항할 수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간만에 신이 났는지 프레이아가 자신만만한 메시지들을 보내왔다.
그녀의 메시지대로 이 길을 가득 채운 신도들은 감히 에일 혼자선 감당할 수도 없는 숫자와 전력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에일 또한 빛의 교단의 소속.
그것도 무려 집행관이라는 위치에 있는 최고위직이었다.
경로와 규모에 대해 미리 전달받은 만큼, 모든 작전을 굳이 혼자서 진행할 필요 따위는 없었다.
터억!
스르릉!
미리 숲속에 숨어 있던 심판관들이 일제히 나타나 검을 빼들었다.
“이단들을 죽여라!”
[‘생명의 어머니’가 울상을 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