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추적 (3)
퀸즈 블론드.
최초로 에일의 심판이 벌어졌던 곳이자, 그가 두 번째로 방문했던 도시였다.
그곳의 건물 위에 선 에일은 난간에 기대어 있었다.
이번에 나이트메어 측 길드원과 만나기로 정해진 접선 장소였다.
아래로 수로 흐르며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고, 그중에서 길드가 보낸 사람이 다가오는 지 천천히 눈으로 훑었다.
“에일 님!”
그의 예상과 달리, 뒤편에서 손을 흔들며 다가온 한 여성.
검은 갑옷과 창을 들고 있는 나이트메어의 타샤였다.
“와, 이게 얼마 만이죠?”
“정말 오랜만이네요. 타샤 님이 올 거라고는 못 들었는데.”“마침 거리도 멀지 않고 제가 직접 지원해서 왔죠.”
타샤가 씩 웃으며 말했고, 에일도 그녀를 반갑게 반겼다.
도시의 한 광장에서 마주쳤던 인연.
나이트메어 길드 내에선 정말 몇 안 되는 아는 얼굴이었고, 6대 길드와 에일을 처음으로 연결해 줬던 길드원이기도 했다.
뭣보다 한창 아마란스에게 쫓기고 있던 그를 직접 개입까지 해가며 구해 줬던 그녀였으니 잊을 리가 없었다.
“그때도 설마 이렇게까지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말이죠.”
타샤가 말하며 거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거리엔 빛의 교단의 신도들이 늘어서서 대규모 행진을 하는 중이었다.
그것도 교단의 신전도 없는 퀸즈 블론드에서 평범한 종교 행사 같은 게 진행 중인 것도 아니었다.
행진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은 모두 워로드의 유저.
그것도 전원이 에일을 따르는 추종자들이었다.
처음 에일의 흔적이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던 곳인 만큼, 그를 기념해 행진이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루 여신님 만세!”
“죄인들이여 불길 속에서 회개하라!”
성화와 함께 이단들의 시체를 십자가에 매달고 거리를 행진하는 이들 사이엔 완전히 컨셉에 취한 신도들의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NPC들이나 몇몇 유저는 미친놈이라며 손가락질했지만, 그들은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현실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가상현실에서 마음껏 발산하며, 누구보다도 즐겁게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차마 건전하다는 표현까지는 못 붙여 주겠다만…….’
“말씀하셨던 정보들은 어떻게 됐나요?”
“아, 여기 빠짐없이 적혀 있습니다.”
에일이 그녀에게 양피지로 된 문서들을 내밀었다.
그가 직접 붙잡았던 두 명의 결사단원들은 에스마이어의 이단심문소에서 한바탕 심문을 당했다.
그들이 토해 낸 정보들은 모두 이 문서에 기록되어 있었고, 의뢰인 입장이기도 한 나이트메어에게 전달이 된 것이다.
“음…….”
타샤가 받아든 양피지엔 붉은 핏자국이 군데군데 눌어붙어 있었다.
빛의 교단의 이단심문소.
그곳의 악명이라면 그녀도 익히 들어왔었다.
지하 깊숙이 붙잡혀서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결국엔 불타 죽었을 이들을 생각하자니 상상만으로 오싹해질 정도였다.
“결사단원들은 모두 죽었나요?”
“아뇨, 아직 이단심문소에 있습니다.”
“아직도 거기 붙잡혀 있다고요……?”
빛의 교단에서 이단들을 그냥 내버려 둘 리는 없을 터.
어쩌면 숨겨 둔 정보는 없는지 더 지독한 고문을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네, 나중에 쓸모가 있을지도 몰라서요. 양쪽 팔까지 떼어 놨으니 달아날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금지된 마법을 익힌 자들이니 더 조심하고 있거든요.”
“그… 그런 쪽으로 걱정한 건 아니었는데…….”
“앗.”
아차한 에일이 말을 멈췄다.
심판관들뿐인 이단심문소에서 막 돌아온 참이라, 일반인과의 대화에 순간 적응하지 못했다.
“흠, 흠. 어쨌든 그런 쪽에서 문제가 생길 일은 없을 겁니다. 이단에겐 상상 이상으로 철저한 곳이니까요.”
“아… 다행이네요.”
“…….”
화기애애하던 둘 사이에 감돈 잠깐의 침묵.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타샤가 양피지를 넘겼다.
“여기 있네요. 다음 접선 장소가 바로 이 지점이라는 거죠?”
“아, 네. 맞습니다.”
지금 주고받은 정보 정도야 메신저나 우편만으로도 간단히 건넬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굳이 한자리에 직접 모인 이유는 간단했다.
결사단원이 흘린 다음 접선 장소가 바로 이곳 퀸즈 블론드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여명이 배후에 있었네요.”
붙잡힌 결사단원들이 자백한 내용들에 따르면, 나이트메어 영지 내에서 일어난 음모들은 모두 여명 길드가 왕자 측으로 돌아서는 조건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왕자와 손을 잡은 것.
처음 나이트메어 측에서 예상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번 접선은 바로 그 여명의 길드원과 직접 만나는 자리였고, 그걸 직접 확인하기 위해 나이트메어 측 길드원도 한 명 찾아온 것이었다.
그들이 자백해 낸 내용만 맞다면, 쉽게 넘길 수 없는 꽤나 큰 건이었다.
“슬슬 시간이 됐겠네요.”
“그럼 바로 내려가죠.”
그들이 자리한 자리 또한 접선 지점과 가까운 곳이었기에 건물 아래로 내려서 인적이 전혀 없는 음침한 뒷골목에 들어섰다.
그렇게 골목을 누비며 그들이 향한 곳은 깊숙한 막다른 길.
무릎을 꿇은 에일은 손을 내밀어 바닥을 더듬었다.
덜컹!
평범한 흙바닥에서 무언가가 집혔고, 자그마한 비밀 문이 위로 열리며 그 아래로 입구가 나타났다.
안쪽에 숨겨져 있던 지하실.
퀸즈 블론드의 실질적 주인이기도 한 나이트메어 길드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은 장소였다.
안으로 진입한 에일과 타샤는 한 남자와 마주했다.
신분을 가리기 위해 복면으로 완전히 가리고 있는 얼굴은 전혀 노출되어 있지 않았다.
“결사단원으로 보이지는 않고… 그새 정보를 흘린 건가.”
시선을 돌린 남자가 말했다.
한쪽은 나이트메어 길드의 문양이 달려 있었고, 다른 한쪽은 빛의 교단 측 네임드 플레이어인 에일.
그들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쯤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여기서 없애고 나가는 편이 낫겠어.”
대검을 들어 올린 그는 곧장 돌진기를 발동했다.
순식간에 에일의 코앞까지 다가온 남자.
쩌엉!
휘둘러진 타샤의 흑색창이 묵직한 대검을 쳐냈다.
돌진기의 가속이 붙은 상태에서 그대로 비껴 나간 대검은 지하실의 한쪽 벽을 요란하게 부숴 버렸다.
쿠구궁!
모락모락 피어나는 흙먼지 속에서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에일 님.”
“네.”
그녀의 말에 에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모두 단 한 번의 공방만으로도 상대가 타샤와 같은 준랭커급 전력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NPC가 아닌 유저라는 것이었다.
이는 결사단이나 그 외 세력의 NPC와 마주한 것과는 의미가 완전히 달랐다.
또 다른 유저 세력이 연관되어 있을지도 몰랐고, 어쩌면 배후로 의심하고 있던 여명 길드에 대해 확실한 물증이 되어 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반드시 잡아야 한다.’
착용 중인 장비에서 길드 마크가 있을 법한 위치들을 절묘하게 가려 놓은 것을 보아, 최소한 어떤 길드에 소속된 이는 맞아 보였다.
후웅!
거리를 좁힌 남자는 이번엔 타샤를 향해 대검을 휘둘렀다.
간격 유지에 능숙한 타샤는 슬쩍 거리를 벌렸고, 그 틈을 타 옆으로 파고든 에일이 그의 옆구리에 일섬 스킬을 먹이려 했다.
휘릭! 카가강!
하지만 단숨에 대검의 경로를 튼 남자는 에일을 그대로 찍어 누르려 했다.
재빨리 끼어든 타샤의 창이 그를 심장을 노리며 물러서게 만들었고, 셋의 거리는 또 다시 벌려졌다.
대검을 사용하는 주제에 굉장히 민첩한 움직임을 보이는 모습.
그가 착용하고 있는 ‘바람의 길’ 방어구의 세트 효과 때문이었다.
경갑 방어구의 추가 방어력 옵션을 잃는 대신, 속도를 큰 폭으로 향상시켜 주는 아이템의 효과였다.
‘굉장히 비싼 아이템으로 알고 있는데… 두 명이라고 방심할 순 없겠어.’
괜히 그가 처음 둘의 정체를 확인하고도 자신감 있게 먼저 달려든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얕보면 곤란하지!’
카앙!
먼저 달려든 에일이 남자의 간격 안으로 한껏 붙었고, 타샤도 곧장 뒤를 이어 가세했다.
이 둘은 240에서 250가량의 준랭커.
그런 반면 에일은 일반적인 준랭커의 기준엔 미치지 못하는 210레벨대의 유저였다.
그리고 에일이 만약 레벨 그대로 어중간한 전력이었다면 그에게도 기회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꾸준하게 총애도와 신앙심, 광기 스탯을 쌓아온 에일은 발군의 실력과 합쳐져 이미 준랭커급 전력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비슷한 수준에서 스펙과 실력이 있다고 한들 2 대 1을 이겨내기엔 어림도 없는 일.
콰앙!
“큭……!”
남자가 둘의 합공에 주르륵 밀려났다.
특히 불꽃을 머금은 에일의 장검은 아슬아슬하게 얼굴 앞을 스쳐 지나가 겨우 치명상 피했다.
하지만 에일이 노린 것은 애초부터 그의 머리가 아니었다.
투욱!
“뭐……?”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복면이 벗겨졌다.
방심한 사이에 고스란이 드러난 그의 얼굴.
“오케이, 확실해요. 이 녀석 여명의 길드원이에요.”
여명의 올란.
타샤가 이미 알고 있던 얼굴이었다.
산하 길드도 아니고 여명의 길드원이 직접 이 자리에 나타난 이상 빼도 박도 못 할 증거였다.
“젠장!”
완전히 당해 버린 올란이 분통을 터트렸다.
하나 이미 늦어 버린 상황.
어차피 유저는 뒤늦게 죽인다고 해도 입을 막을 순 없었다.
이를 빠득 간 올란은 지하실의 문을 통째로 박살 내며 바깥으로 달아났다.
일단 자리에서 벗어나려는 선택.
“이런……!”
에일과 타샤가 그를 곧바로 뒤쫓아 갔다.
여기서 순순히 그를 놓아 줄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역시나 장비의 세트 효과 탓에 그의 속도는 굉장히 빨랐다.
민첩쪽 암습 특화 창술가인 타샤나, 접근시 보너스를 주는 패시브가 있는 에일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놓쳐 버렸을 정도였다.
‘이대로 있다간…….’
파앗!
그때, 뒷골목을 달리던 올란이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잠깐.’
도시 구조 훤히 알고 있는 에일은 그가 향할 다음 위치가 어디쯤일지 알고 있었다.
묘수가 번뜩 떠오른 에일은 거리를 채 돌기도 전에 크게 소리쳤다.
“이단이다! 이단이 도망친다!”
아무도 없는 골목에서의 외침.
하나 그의 외침은 왼쪽으로 이어진 큰 대로까지 이어졌고, 거리를 걷던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틀었다.
“이단?”
“이단이라고?”
일제히 돌아간 신도들의 고개.
거리를 가득 채운 이들은 다름이 아니라, 도시를 행진 중인 빛의 교단의 신도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이단’이라는 단어에 조건반사를 보이는 건 당연한 일.
“잡아라!”
“놈을 붙잡아!”
“이게 갑자기 무슨……!”
우르르 앞쪽에서 몰려드는 신도들의 모습에 올란이 당황했다.
그보다 높은 레벨의 유저는 한 명도 없다고 해도, 당장 이쪽 거리에서만 수백 명이 운집해 있었다.
거리를 메운 채 사방에서 몰려드는 신도들을 상대로 정면 돌파하기란 누가와도 무리였다.
“저… 저리… 끄어억!”
팔을 뻗으며 우르르 몰려온 신도들의 무리에 올란은 완전히 파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