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추적
에스마이어 지역의 한 도시.
뒷골목에 기대어 있는 에일은 손에 쥐어져 있는 자료들을 꼼꼼히 확인하고 있었다.
나이트메어에게서 전달받은 정보들.
‘역시나 여명의 소행이라는 건가…….’
후방 지역에서 목격된 활동들로 보아, 나이트메어 길드와 전쟁 중인 여명이 작업질을 하고 있는 게 거의 확실해 보였다.
목적은 보나마나 이번 전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고대 정령을 풀어놓을 심산일 터.
게다가 이 상황에 엮여 있는 건 두 길드뿐만이 아니었다.
왕가의 세이아 공주에게도 급한 연락이 들어왔다.
“일이 꽤나 급박하게 돌아가는 모양이야.”
그의 퀘스트 창에는 또다른 왕가의 퀘스트가 추가되어 있었다.
저번 퀘스트의 연장 선상에 있는 세이아의 의뢰.
어떻게든 결사단을 추적해 그들의 음모를 저지해 달라는 것이었다.
후계의 지지에 있어선 한쪽으로 쏠렸던 6대 길드들이 이젠 입장이 서로 나뉘게 된 상황.
공주의 입장에서는 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걸 오히려 기회로 써먹어야 할 텐데…….”
최대 세력인 6대 길드 간의 패권 다툼과 왕가의 계승권 문제, 성물을 둘러싼 신격들 간의 경쟁까지.
에일은 복잡해진 머리를 잠시 식히며 눈을 감았다.
그때 왼편의 길목에서 뜀박질 소리가 들려왔다.
대략 두어 명 정도의 사람이 골목을 달리고 있는 소리였다.
“그, 그만 쫓아와!”
헐떡이는 남자의 말소리.
누군가에게 쫓겨 달아나는 듯한 기색이었고, 에일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다리를 슬쩍 내밀었다.
“끄악!”
쿠당탕!
골목을 돌던 남자는 발에 걸려 넘어졌다.
에일은 그의 등을 짓밟아 꼼짝 못 하게 만들었고, 눈을 슬쩍 뜨며 꿈틀거리는 남자를 내려다봤다.
그의 머리 위에 새겨진 이단의 낙인이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잡아내셨군요!”
남자를 뒤쫓던 메이가 다가왔다.
그와 같은 교단의 이단심판관이자, 이전에 월드 이벤트로 인한 대규모 공성전에서 그를 도왔던 유저였다.
빛의 교단의 준랭커급 네임드 플레이어이기도 했다.
“좋은 유인이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런 그녀가 이곳에 있는 이유.
교단이 대대적으로 결사단을 잡아내기 위해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월드 퀘스트와 함께 성물의 문제까지.
이번 일의 중요성이 남다른 데다가, 이단을 쫓는 건 애초에 교단이 책임지던 원래의 업무이기도 했다.
6대 길드와 전장에서 전면전을 붙어야 할 만큼 큰 리스크를 가진 일도 아니고, 이렇게 나서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단지 이곳뿐만이 아니라 대륙 전체의 이단심문소에서 전력 다해 대대적인 추적을 벌이고 있었다.
“일단 얼굴은 확실하고.”
붙잡힌 남자의 얼굴을 본 에일이 확신했다.
이 남자도 나이트메어가 건네준 의심자 명단 중에 한 명이었고, 자료에 있던 것과 얼굴이 일치했다.
물론 아직 결사단의 끄나풀이라는 것까지 확실한 건 아니었다.
“확실한 건 심문을 해봐야 알겠지만, 이단의 낙인이 있는 걸 보아 맞는 것 같습니다. 뭣보다 결사단과 관련이 없더라도 태워 버리면 그만이니까요.”
메이가 간단히 말했다.
이단의 낙인이 보이는 이단심판관들은 역시 음지에 숨어든 범죄자들을 추적하는 데 있어 훨씬 쉽게 진행할 수 있었다.
그들을 쫓는 동안 조금 더 잔인하거나 과감해진다고 해도, 뭐라고 하기는커녕 엄지를 치켜들 여신이 뒤에 버티고 있었으니.
[‘빛의 심판자. 루’가 이단의 절규를 기대합니다!]
“…….”
“아, 그리고 다른 쪽에서 연락이 왔는데, 모두 수월하게 진행되는 중이라 합니다. 특히 솔스티드 지역 쪽은 내통하고 있던 영주를 하나 잡아내서 다른 거물들까지 추적 중이라고 하고요.”
“도시의 영주라면… 명목상이라고는 해도 무작정 잡아들이기엔 곤란했을 텐데요.”
“다른 집행관께서 직접 나서 처리하셨다고 합니다.”
“하하…….”
그녀의 말에 에일이 헛웃음을 흘렸다.
분명 대부분 실질적인 권한은 해당 영지를 차지한 길드들이 가져, NPC 영주는 명목상의 위치에 불과했다.
하나 그렇다 해도 쉽게 건드릴 수 있는 대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빛의 교단의 집행관이 나섰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
분명 사전 통보도 없이 심판관들을 이끌고 당당히 문짝을 부수고 들어가 살벌하게 깽판을 쳤을 것이다.
‘저번엔 아예 영주의 머리를 질질 끌고 가 처형대에 올렸던 일까지 있었으니…….’
에일이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타기 전, 빛의 교단의 악명이 괜히 생긴 게 아니었다.
유저와 NPC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교단을 기피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뭐, 어쨌든 그런 성향 탓에 일 처리 하나는 시원시원하게 되니까.’
처음엔 지나치게 막 나가는 듯해서, 영 적응이 안 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환경에 너무 익숙해진 탓일까.
이젠 평범한 세력의 소속으로 이런 일을 진행하자면 답답해서 못 할 것만 같았다.
“그러면…….”
파앗!
에일은 쓰러진 남자를 밧줄로 묶은 뒤, 다리를 붙잡아 질질 끌고 갔다.
“끄으으, 날 어디로 끌고 가는 거야!”
“가보면 알아.”
뒷골목 아래에 마련된 작은 건물.
건물 안으로 들어선 에일과 메이는 남자를 그 안으로 던져 넣었다.
살벌한 고문 도구와 여기저기 낭자한 핏자국들.
굳이 이단심문소까지 끌고 갈 것도 없이 그들을 위해 마련된 공간이었다.
6대 길드와의 협력이 있는 덕에, 확실히 이런 부분에선 아주 편했다.
에일은 남자를 고정된 의자에 단단히 묶었다.
“나, 날 어쩌려고! 어차피 말하고 싶어도 말 못 한단 말이야!”
공포에 질려 마구 소리치는 남자.
그러자 에일은 남자의 목에 그려진 침묵의 문양을 바라봤다.
결사단이 비밀 엄수를 위해 새겨 넣은 특수한 마법이었다.
붙잡힌 조직원이나 수하들이 죽어도 정보 유출만큼은 되지 않도록 강력한 마법을 걸어 놓은 것이다.
“메이 님.”
“네.”
고개를 끄덕인 메이가 스크롤 펼쳤다.
침묵의 문양이 굉장히 골치 아픈 마법인 건 맞았다.
처음엔 결사단의 목적을 드러내는 것만 해도 굉장히 애를 먹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인제 와서는 이야기가 달랐다.
빛의 교단에선 이미 그에 대한 파훼법을 찾아낸 뒤였다.
“무, 무슨……! 꾸어어억!”
빛과 함께 남자가 엄청난 고통에 뒤집어졌다.
스크롤에서 뻗어져 나온 하얀빛이 남자의 목을 태웠고, 침묵의 문양은 곧 완전히 사라졌다.
물론 그 과정에서 지져진 살갗이 흉측하게 타버리는 게 부작용이었지만, 사실 부작용이라기보단 부가효과라 하는 편이 맞는 듯 했다.
이단들에게 고통을 주는 효과를 부작용이라고 하기엔 조금 뭐했으니 말이다.
“그럼 여기서부턴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아뇨, 제가 하겠습니다.”
“집행관께서 굳이 그러실 필요는……?”
메이가 의아한 듯 물어왔다.
분명 고문이란 건 생각보다 힘도 많이 들어가고, 여러모로 깔끔하지 못한 중노동이었다.
하나 죄인을 고문하는 것도 전용 스탯을 조금이나마 올리게 하는 행동 중 하나였다.
오히려 항상 챙기고 있는 기도보다 이쪽의 효율이 더욱 좋았다.
뒷짐 지고 쉬고 있을 바에야 소량의 스탯을 챙기는 게 훨씬 낫다는 것.
“작은 일이라고는 하나 이 또한 여신을 섬기는 일. 이렇게라도 조금씩 그분께 다가서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 그런 깊은 뜻이……!”
메이가 감명 받은 눈초리로 그를 바라봤다.
어찌나 그녀가 진심 어린 표정을 지어보이는지.
저번 공성전에서도 그렇고 같은 입장이라고는 해도, 연기가 맞긴 한 건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빛의 심판자. 루’가 당신의 진심에 깊게 감동 받았습니다!]
[‘생명의 어머니’가 질투심에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봅니다!]
‘이쪽은 또 왜 이래…….’
고문을 차지하기 위해 대강 핑계를 댔더니 신격들까지 생각도 못 한 반응을 보여 왔다.
어찌 됐건 일은 서둘러 마치는 편이 좋았고, 에일은 널려 있는 고문 도구 중 그럴싸한 녀석을 집어 들었다.
“그럼 전 입구를 지키고 있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덜컹!
여전히 감명을 받은 채 밖으로 나선 메이.
고개를 돌린 에일은 의자에 묶인 남자를 바라봤다.
“이런 끔찍한 일은 하고 싶지 않지만… 음, 어쩔 수 없지.”
이번에도 어김없이 자기합리화를 한 에일이 남자에게 다가갔다.
공포에 질린 남자가 마구 발버둥 치고 애원해 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빛의 심판자, 루’가 눈빛을 빛냅니다!]
[‘화산의 지배자’가 움찔하며 눈을 가립니다.]
끄아아아악!
울려 퍼지는 비명이 골목을 가득 메웠다.
* * *
뒷골목에서의 심문은 성공적이었다.
결사단의 일원이 아니라고는 해도 꽤나 발이 넓은 하수인이었는지, 많은 정보를 품고 있었다.
물론 그가 말해 낸 것들이 모두 진실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는 일.
오랜 검증 과정을 거치긴 했어도 거짓을 말했을 수도 있었고, 직접 일일이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그리고 남자 토해 낸 정보 중 가장 중요한 곳 하나가 바로 지금 에일이 진입한 이 지하 던전이었다.
“오염된 흔적들… 정보는 확실한 것 같네.”
인적이 전혀 없는 이 지하 던전은 완전히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진동하는 썩은 내와 오염된 대지.
강제적으로 대지의 마력을 빼앗긴 뒤에 일어나는 전형적인 부작용의 흔적이었다.
지금껏 그가 여러 차례 보아온 광경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사령석을 쓰고 있단 말이지…….”
대지의 마력을 흡수하는 특수한 돌.
그동안 놈들에게 얻어낸 정보에 따르면, 사령석은 아무런 장소에서나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마력이 풍부한 특수한 지점에서만 충분한 양의 마력을 흡수할 수 있다고 했다.
거기에 그들의 음모엔 한 가지 제약이 더 있었다.
고대 정령을 깨우고 그들을 조종하려면, 해당 지역의 마력을 모아서 사용해야 한다는 것.
즉 에스마이어에서 작업을 벌이는 건, 에스마이어 지역의 고대 정령을 깨우기 위함인 것이었다.
나이트메어 길드에 타격을 입히려는 것이 확실한 상황.
“반드시 막아 내야겠지… 성물값을 하려면.”
아직 그에겐 정화의 수단인 사령석 파편이 충분히 남아 있었다.
이곳의 사령석도 빼돌리기 전에 서둘러 파괴해 낸 뒤, 오염되었던 대지를 정화하는 것이 그의 과제였다.
키이이익!
어김없이 침입자를 막기 위해 언데드들이 몰려들었다.
벌써 수십 번째나 이어진 격렬한 전투.
하나 이곳의 언데드 정도로는 그간 강해진 에일을 막기엔 턱없이 역부족이었고, 그는 가차 없이 놈들을 베면서 안으로 진입했다.
콰앙!
낡은 문짝을 부수며 오염의 중심부로 들어선 에일.
그런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은 예상외로 낯익은 얼굴의 여성이었다.
“저번보다 훨씬 강해졌네.”
결사단의 이단마법사, 뮤트.
묘한 미소를 보인 그녀가 거대한 사령석을 쓰다듬었다.
“이번엔 분신 정도론 안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