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개입 (2)
6대 길드인 켈베로스와 철십자 사이에 벌어진 전쟁.
요란한 선전 포고도 없이 은밀히 이루어져 아직 유저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조용한 전장 안에선 격렬한 전투가 오가고 있었다.
쿠웅!
대지를 낮게 울리는 폭발.
산맥에서 벌어진 길드 간의 전투로 인해, 굳건했던 요새는 이미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그리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그 폐허 위에선 연달아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정면에서 온다!”
“여기서 막아!”
요새 한쪽에 이어진 좁다란 통로.
한 명의 유저가 뛰어오는 모습 켈베로스의 길드원들은 일제히 무기를 뽑아들었다.
전원이 준랭커급 실력자에 다섯이나 되는 숫자.
좁은 통로 탓에 피할 수도 없었고, 보통의 유저가 이를 무사히 지나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정면에서 뛰어들고 있는 여성은 보통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후웅!
시르는 뻗어져 오는 창을 피해 간격 안으로 파고들었다.
복부를 꿰뚫은 그녀의 장검은 길드원 하나를 단숨에 제압했다.
키릭! 콰득!
옆구리를 노린 검은 몸을 빙글 돌리며 피해냈고, 동시에 빼앗은 무기를 상대의 목에 박아 넣었다.
하나씩 베어가며 단숨에 돌파하는 모습.
좁은 통로는 오히려 그녀를 더욱 상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커헉……!”
다섯 명의 길드원이 꼼짝없이 허물어졌고, 장검을 바로잡은 시르는 아예 정면의 벽을 향해 검기를 쏘아냈다.
콰아아앙!
두터운 벽이 박살 나며 내부가 드러났다.
방 안에 서 있는 다섯 명의 유저.
켈베로스측 인원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던 시르는 곧장 ‘순간 가속’ 스킬을 사용해 접근했다.
엄청난 속도에 겨우 반응한 네 명의 유저가 그녀를 막아서려 했지만, 그 정도로는 역부족이었다.
쩌엉!
검격을 받아내려 한 그들은 단번에 반대편 벽으로 튕겨져 나갔다.
바닥에 나뒹구는 길드원들.
6대 길드의 일원인 준랭커급 플레이어들조차도 그녀의 스킬을 버틸 순 없었다.
“하…….”
유일하게 자리에 멀쩡히 서 있는 남자가 헛웃음을 흘렸다.
지옥견의 길드 문장을 새겨진 갑옷에 기다란 창을 짊어진 남자.
세계 랭킹 5위의 정상급 랭커이자, 켈베로스의 길드장인 유론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데 문으로 좀 들어와라. 이거 너희 요새였어.”
유론이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굉장히 잘생긴 얼굴의 소유자였지만, 그의 미소를 마주한 시르의 얼굴엔 불쾌함만이 자리 잡았다.
“개망나니 유론, 네가 할 만한 소리는 아니지.”
“자꾸 이상한 수식어 밀지 말지? 앞에 개를 붙이는 건 너밖에 없거든.”
“다물어.”
전장에서 마주한 두 명의 6대 길드장.
그들은 2세대 가상현실게임에서부터 이어져 온 오랜 관계 사이였다.
“이 요새 생각보다 방비가 잘되어 있던 걸. 방심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고생깨나 했어,”
“너희가 전쟁을 벌여올 줄은 이미 알고 있었거든. 그동안 아폴리온과 어설프게 빚어온 마찰은 단순한 눈속임. 네 성격상 서로 미적지근하게 견제나 하고 있을 리는 없었으니까.”
“음, 잘 알고 있네.”
유론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남들에게는 당연히 비밀로 해야 할 일이었지만, 이 자리에선 굳이 부정해 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르메니아 온라인 시절부터 줄곧 맞붙어온 상대.
게임 상에서 그녀보다 자신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유저는 사실상 없다고 봐야했다.
“그 어설픈 연기를 하고 있던 걸로 봐서, 아예 처음부터 붙어먹고 있던 거라고 봐야 할 텐데… 아폴리온이 널 어떻게 구워삶은 건지는 아직도 의문이란 말이지.”
시르가 미심쩍은 듯 말했다.
그에게 망나니 유론이라는 별명은 괜히 생긴 것이 아니었다.
협상이든 협박이든, 그는 쉽게 통제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한데 그런 그가 아예 아폴리온을 위해 이렇게까지 움직여 주다니.
“이번 기회에 아폴리온 밑으로 들어갈 셈이냐?”
“왜? 그리핀 녀석들부터 싹 밀어버리고, 그 땅을 반으로 나누면 우리도 이득인데.”
“그딴 거래가 아니라는 것쯤은 다 알아.”
“하하…….”
유론이 묘한 웃음을 흘렸다.
아폴리온이 크게 치고나가는 지금의 상황은 결국 장기적으론 켈베로스에게도 아주 안 좋은 수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론도 그걸 몰라서 협력하는 게 아니었다.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말이 많았어!”
카가가각!
격하게 부딪힌 창과 장검.
“뭔가 알아내려고 대화로 슬슬 꼬여내려는 건 알겠는데… 간만에 붙게 된 마당에 너무 시시하잖아.”
코앞까지 바짝 붙은 유론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시르의 표정도 냉랭하게 바뀌었다.
“그렇다면야…….”
쩌엉!
날카로운 연격이 유론의 목을 노렸고, 살벌한 몰아치는 공격에도 그는 가볍게 쳐내며 물러났다.
아주 작은 빈틈이라도 생기면 즉시 스킬을 발동하며 치명상을 입힐 생각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양옆의 벽이 박살 나며 두 명의 유저가 나타났다.
레이크와 아런.
랭킹 9, 14위의 최상위 하이 랭커이자, 시르의 오른팔과 왼팔로 철십자의 최고 간부들이었다.
“무슨……!”
퍼억!
놀라운 반응 속도의 유론은 겨우 공격을 막아 냈지만, 아런의 발에 얻어맞아 바닥을 굴렀다.
“퉷, 많이도 끌고 왔네.”
재빨리 일어난 유론이 자세를 취했다.
무려 하이 랭커가 셋.
그것도 2위, 9위, 14위가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여기까지만 해야겠네.”
“순순히 놓아줄 리가.”
그를 둘러싼 세 명의 랭커가 다가섰다.
적대 길드장을 제거할 좋은 기회였고, 편히 놓아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분명 위기에 처했을 유론의 입가가 오히려 씨익 올라갔다.
콰아아아앙!
갑자기 일어난 거대한 폭발.
바깥에서 미리 캐스팅하고 있던 대형 마법, 유성우가 요새를 강타한 것이었다.
그것도 정확히 그들이 서 있던 장소의 위를 노린 탓에, 천장과 벽들이 완전히 무너지며 안에 있던 이들이 모두 튕겨져 나갔다.
“젠장, 살살 좀 하라니까.”
무너진 잔해 속에서 나온 유론이 투덜거렸다.
그 역시 폭발에 휘말려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큭…….”
반대편 잔해에서 빠져나온 시르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와 함께 있던 간부들도 죽지는 않았지만, 유론과의 거리는 너무 벌어진 상태였다.
“나도 기왕이면 여기서 화끈하게 승부를 보고 싶지만… 당분간 시간을 끌어야 해서 말이야. 우리 어디가지 말고 진득하니 싸워 보자고.”
히죽 웃은 유론이 곧장 등을 돌려 달아났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인상을 찌푸린 시르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으로선… 다른 쪽에 기댈 수밖에 없나.”
* * *
아스칼론의 왕궁.
세이아 공주는 초조한 듯 방 안을 오가고 있었다.
술술 풀려나가는 줄만 알았던 일들이 외려 배배 꼬여가는 지금의 상황 때문이었다.
사방에서 일어난 길드 간의 대규모 전쟁.
6개의 거대한 지지세력 중 하나가 무너지는 중이었고, 다른 하나는 갑자기 태도를 바꿔 왕자를 지지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아직은 대의회 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하나, 이대로 가다간 어떻게 될지 몰랐다.
그러자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측근이 입을 열었다.
“고민이 많아 보이시는군요. 아직 왕자에게로 주도권이 넘어간 건 아닙니다만.”
“그 ‘아직’이라는 말이 붙은 게 문제겠죠. 이대로 두고 볼 순 없는 일입니다.”
까득!
세이아가 손톱을 뜯었다.
북동부에서 나타난 고대 정령의 위력은 6대 길드도 손쉽게 저지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났다.
어떻게든 다음 사건이 또 다시 터지지 않도록 음모를 막아 내야 했는데, 아폴리온이 왕자에게 협력한 이후 결사단은 더욱 추적하기 어려워진 게 문제였다.
아무래도 그들이 나서 무언가 수를 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느 정도 제약이 있던 왕자에 비해, 6대 길드의 지원까지 받자 이전과는 다른 완전히 달라진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단순히 지금까지 움직여 왔던 외부 세력 정도로는 추격이 수월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이대로 지켜볼 수는 없는 일.
‘그렇다면…….’
음지에 숨어들어 음모를 꾸미는 이들을 쫓아, 파헤치고 궤멸시킬 수 있는 외부의 세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런 일을 가장 잘할 수 있을 만한 집단이라면.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단 한 곳밖에 없었다.
“아셀 경, 지금 당장 빛의 교단에 연락하세요.”
* * *
두 번째 성물을 안전하게 보관한 뒤, 엘트리스를 떠난 에일은 곧장 나이트메어와의 협상 자리로 향했다.
지금 그의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 있는 건, 나이트메어의 길드장 카린.
그가 직접 찾아오긴 했지만, 한창 전쟁 중인 상황에 그녀가 직접 거래에 나선 건 의외였다.
어쨌든 그들은 예상했던 대로 서부 성물을 놓고 거래를 하려 했고, 카린이 요구한 것은 에일을 비롯한 빛의 교단의 도움이었다.
“그렇다면… 여명과의 전쟁을 거들어 달라는 건가?”
“전쟁? 병력은 얼마나 끌고 올 수 있는데?”
피식 웃은 카린이 물었다.
성물 파편이 중요하다고는 하나, 네 개의 핵심 파편 중 하나일 뿐.
6대 길드 간의 거대한 전쟁에서 교단이 모든 전력을 쏟아 붓는 것까지 바라는 건, 카린의 입장에서 봐도 무리였다.
“성물 조각 하나에 교단 전체가 움직일 수도 없겠지. 그럴 바엔 차라리 이걸 비싼 값에 팔아서 전쟁 전문인 용병길드를 더 고용하는 편이 나아. 하지만 우리가 필요한 건 그런 게 아니거든.”
카린이 탁자 위에 놓인 성물 파편을 빙글 돌렸다.
“길드를 굴릴 땐 인재를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것. 특기를 살려 주는 게 중요하지.”
“특기……?”
“후방에 수상한 움직임들이 보고되고 있어. 북동의 그리핀이 고대 정령에게 당한 건 들었겠지? 우리도 전면전을 치루고 있는 와중에 그런 사건이 터지면 무사할 수 없겠지.”
“그렇다면 결사단을 쫓아 달라는 건가?”
“그렇지. 다만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를 거야. 레윈이 어설픈 수에 쉽게 당해 줄 만큼 머저리는 아니었거든.”
영지 후방에 숨어든 결사단을 추적해 달라는 것.
이미 나이트메어 내에도 그 문제에 대해 따로 전담하는 인원이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따로 협상을 걸어온 것은 분명 무언가 심상찮은 조짐들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일 터였다.
‘이번 아폴리온도 그렇고, 6대 길드들이 결사단을 이용하고 있다는 건가… 이거 문제가 커지겠는데.’
조건을 아직 받아들이지 않은 지금은 그들의 자료를 받을 순 없었지만, 어쩌면 나이트메어와 대적하고 있는 여명 길드에서 왕자 측으로 섰을지도 몰랐다.
쉽게 마무리될 줄 알았던 월드 이벤트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을 수 있다는 것.
그렇게 된다면 이번 일도 분명 쉽지 않을 것이었다.
하나 숨어든 이단들을 사냥하는 것이라면, 빛의 교단이 전문이었다.
“어때? 가능하겠어?”
“얼마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