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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이단심판관-169화 (169/227)

169화 결투 (2)

필드상의 PVP는 투기장의 결투와는 다른 면이 많았다.

지형지물의 활용이나 몬스터나 다른 유저의 개입, 소모 아이템의 활용 역시 굉장히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공헌도 상점을 이용 가능한 에일만이 스크롤을 비롯한 아이템을 활용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그롬의 손에 쥐어진 것도 세로로 길게 펼쳐진 정체불명의 스크롤이었다.

“원래 사람 한 명에게 쓸 건 아니지만, 이번엔 특별대우야.”

드드드드득!

새까만 빛을 발하는 스크롤.

끓어오르는 늪 속에서 거대한 몸집의 몬스터가 나타났다.

“이… 이건…….”

에일이 멍하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쩍 벌어진 입과 비대한 상체, 흘러내리는 피부를 지닌 사나운 인상의 거인.

170레벨의 보스 몬스터, 늪지 거인 라문이었다.

남부 늪지대의 수많은 보스 몬스터 중 하나로, 오히려 이 극한의 지역에서는 약한 축에 속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자연히 생성되어 나타난 게 아니라, 그롬이 녀석을 소환한 것이다.

‘설마 그걸 쓸 줄이야…….’

원래 유저가 정예급 이상의 몬스터 시체를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아무리 뛰어난 네크로맨서라도 그런 스킬을 얻은 유저는 아직 전무했고, 그와 관련해 전설급 스킬 보유자가 나오지 않는 이상 그 사실은 변함은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소모성 특수 아이템의 힘을 빌렸다.

강력한 흑마법이 담긴 스크롤을 사용해 일정 시간 동안 소환의 한계를 뛰어넘도록 한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교단의 공헌도 상점을 통해 스크롤을 얻는 방법이 알려져 있었고, 가장 효율 좋게 아이템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교단에 소속된 유저는 일부일 뿐.

다른 경로로도 얼마든지 스크롤을 얻을 수 있었다.

“좋아, 이 녀석 시체까지 준비해 둔 보람이 있네.”

라문의 등에 올라탄 그롬이 웃음을 터트렸다.

보스 몬스터의 시체를 미리 마련할 땐,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 과한 건 아닌가 생각했었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쓸 일이 생기게 되었다.

‘사람 미치게 하네.’

반면 에일의 낯빛은 어두워졌다.

준랭커급 플레이어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하는 자답게, 예상하던 것을 한참 뛰어넘은 수들을 보였다.

콰아아앙!

묵직한 늪지 거인의 주먹이 바닥을 내려쳤다.

녀석의 괴력으로 인해 땅이 들썩일 정도였다.

에일은 급히 녀석의 주먹과 사방으로 튀는 파편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도망치기엔 너무 늦었어.’

달아나려면 차라리 처음에 도박수를 던지면서라도 도망쳤어야 했고 지금은 너무 늦었다.

이젠 저 녀석을 상대하는 선택지밖에 없었다.

‘그러면 저걸 어떻게 해야…….’

거대한 늪지 거인을 바라보는 에일은 막막함이 앞섰다.

이 많은 시체 사이에 섞인 보스 몬스터와 그 위에 올라탄 네크로맨서라니.

일반적인 사고로는 답이 나올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

자신의 스킬들을 바라본 에일이 생각을 정리했다.

라문이 170대의 보스라고 하나, 원래의 스펙을 온전히 가진 채 부활한 건 아니었다.

네크로맨서가 사용한 보스 부활의 경우, 밸런스 조절을 위해 원래 보스가 지녔던 여러 패턴을 사용할 수 없었다.

지금 녀석이 주먹으로만 공격하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거기다 움직임이나 체력 등의 스펙들도 원래에 비해선 한참 떨어진 마이너 카피 버전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보스를 유저가 소환수로써 부린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심히 위력적인 건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늪지 거인의 위에서 안전을 확보한 그롬은 최고급 마나 포션까지 마음껏 들이켜 가며 다음 마법들을 시전했다.

“간다!”

콰과과광!

연쇄폭발이 일어나며 터져나가는 시체들.

그와 동시에 다른 편에선 시체들이 소환되며 마구 일어났다.

사방으로 둘러싸는 동시에 폭발하는 언데드를 뚫어가며 에일은 마지막 생각을 정리했다.

“해봐야지.”

이대로 당해 줄 수야 없는 일.

과감한 도박을 던져 보는 수밖에 남지 않았다.

[구매가 완료되었습니다!]

촤르르륵!

에일이 세 장의 스크롤을 꺼내들었다.

스크롤을 구매하기 전, 그가 가진 여분의 공헌도는 3천.

일반 유저가 보기엔 굉장히 많은 양이었다.

하지만 평소 에일의 씀씀이를 생각했을 때 그리 많은 건 아니었다.

대부분 사냥 효율을 끌어올리려 일찌감치 신앙심 스탯으로 변환한 탓에 넉넉하진 않았다.

그렇기에 이번 설계를 한 번에 성공시켜야만 했다.

파아아앗!

그의 손에 쥐어진 스크롤들이 일제히 빛을 발하며 발동되었다.

세 갈래로 뻗어진 심판의 창.

거대한 창들이 소환되어 늪지 거인을 꽂아 버렸다.

쿠워어어어!

“이 정도론 소용없어!”

정통으로 먹힌 탓에 데미지가 꽤 박히긴 했지만, 시전자인 그롬은 멀쩡한 데다가 이 세 갈래의 창만으로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단지 잠깐의 속박 상태에 빠졌을 뿐.

‘시간 벌이면 충분해.’

콰악!

에일은 장검을 바닥에 꽂아 넣었다.

곧바로 시전된 스킬 ‘수호의 방패’.

그를 둘러싼 원형의 방어막이 주변의 언데드들을 가로막았다.

에일은 뜬금없이 그 안에서 무릎을 꿇은 채 기도를 하기 시작했고, 그를 본 그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치유도 불가능할 텐데 뭐 하는 거지? 어쨌든 가만히 둘 수야 없지.”

그의 행동에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수상한 짓을 벌이는 걸 그냥 두고 볼 수야 없었다.

콰과광!

언데드들이 보호막에 달라붙으며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살벌한 위력의 폭발.

마나가 충분한 이상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었고, 보호막이 얼마 가지 못해 깨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 외의 상황이 일어났다.

“뭐야, 왜 저렇게 단단해……?”

수호의 방패는 신앙심 스탯의 영향을 받는 신성 마법.

그동안 쌓은 에일의 신앙심 스탯은 어느덧 1,000을 넘어서 있었다.

동레벨 대의 전문 사제도 따라잡을 수 없는 굉장한 강도를 지니고 있었고, 만약 이 엄청난 수치가 아니었다면 방어막은 진작에 박살 났을 것이다.

쩌저저적!

연달은 폭발에 금이 가기 시작한 방어막.

촉박한 상황 속에서 에일은 더욱 정신을 집중했다.

‘조금만 더…….’

콰앙!

‘지금이다!’

촤르르르륵!

방어막이 깨짐과 동시에, 에일의 스킬이 발동되었다.

바닥을 뚫고 나온 수십 갈래의 사슬이 거체의 라문을 휘감으며 단단히 옥죄였다.

심지어 사슬에 묶인 건 라문만이 아니었다.

그 위에 올라타 있던 그롬까지도 꼼짝없이 묶이게 된 상황.

“이게 무슨……!”

에일이 방어막 안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건 단순한 기도가 아니었다.

신성 마법의 캐스팅.

영웅급 스킬인 ‘신성의 사슬’를 준비하고 있던 것이었다.

사람을 상대할 때엔 상관없었으나, 저만한 대형 몬스터를 상대할 때는 캐스팅 시간을 가져야 했다.

신성의 사슬도 어디까지나 신앙심 스탯의 영향을 받는 신성 ‘마법’이었다.

“좋았어.”

꼼짝없이 묶인 늪지 거인과 그롬.

이번엔 거인뿐만이 아니라 그롬까지도 묶어 버리는 데 성공했고, 핵심적인 녀석들을 단번에 붙잡은 셈이었다.

그러자 에일은 다시 한 번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공격해!”

그롬이 급하게 외쳤다.

쥐고 있던 스태프를 놓친 데다가, 양팔까지 봉쇄된 탓에 마법을 캐스팅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시체 폭발이 불가능했고, 시체들이 달려들게 만들었다.

방어막은 조금 전 깨졌고, 에일은 공격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제자리에서 언데드들의 공격을 꿋꿋이 받아내며 기도했다.

방어력 증가 및 물리저항 스킬과 상위 방어구, 기본적으로 높은 체력 관련 스탯들 덕에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었다.

드드드드!

그렇게 기도가 끝나고, 하늘에선 거대한 빛의 검이 나타났다.

유일급 공격 스킬, 징벌.

“어떻게 이 정도 신성 마법을……!”

그롬은 믿기지 않는 눈으로 위를 바라봤다.

사제도 아닌 근접 계열의 이단심판관이 마력 스탯을 기반으로 한 주력 신성 마법들을 이렇게 연달아 사용하다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이건 규모가 차원이 다른 공격계 신성 마법.

“잘 가라고.”

“안 돼! 어서 막아!”

사슬 속에서 그롬을 감싼 늪지 거인.

하지만 전력으로 떨어지는 거대한 징벌의 검을 바라본 그롬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다, 당했다…….’

* * *

“컥……!”

피를 토해 낸 그롬이 바닥에서 꿈틀거렸다.

그는 빈사 상태에 빠져 꼼짝도 할 수 없었고, 초토화된 땅은 완전히 뒤집어져 있었다.

위력을 최대까지 살려 캐스팅된 징벌 스킬을 버티기엔 무리였다.

공격에 직격당한 늪지 거인은 단번에 소멸되었고, 감싸진 그롬 또한 겨우 목숨만 건지는 게 다였다.

“후, 조금 위험했어.”

이마를 닦은 에일이 중얼거렸다.

징벌 스킬을 캐스팅하는 동안, 언데드 놈들한테 물어뜯기느라 체력이 바닥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입가엔 곧 뿌듯한 미소가 걸렸다.

‘그동안 확신은 없었는데, 이 정도면 나름 만족해도 되겠어.’

꽤 힘든 싸움이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승리의 달콤함이 더했다.

더군다나 준랭커급 유저를 상대로 에일은 스스로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정도 레벨대에서도 충분히 통한다는 증거였고,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게 되었다.

“그래, 내가 졌다. 인정할 수밖에 없겠어.”

쓰러진 그롬이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자, 완전히 단념한 듯한 태도였다.

“생각보다 깔끔하네.”

“하, 질척거리면 뭐 하겠어? 또 쫓아온다고 널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롬이 웃음을 흘리며 말헀다.

그 정도 되는 플레이어가 무려 40레벨 차이의 유저에게 패한다면, 굉장히 자존심이 상할 일이었다.

하나 지금은 그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일대일 결투에서 명백히 실력으로 패한 것이었으니까.

“음… 그냥 평소처럼 불에 태우기엔 좀 아깝겠지?”

에일이 그롬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상대는 무려 준랭커의 네임드 플레이어.

이미 화제성을 지닌 이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고, 이번 싸움도 당연히 워튜브에 업로드될 것이었다.

이런 건수를 일반 사냥 영상처럼 대충 업로드하는 건 아까운 일.

영상의 마지막 대미를 장식할 멋진 피날레가 필요했다.

기발하면서도 자극적이며 섬뜩한 무언가가…….

“그래, 그게 좋겠네. 조금 끔찍해서 생각만 해 뒀던 건데. 이번 기회에 써먹어 봐야지.”

에일이 인벤토리에서 이런저런 아이템들을 꺼내들었다.

그러자 기겁한 그롬이 발작하듯 몸을 꿈틀였다.

“자, 자, 잠깐만! 이건 좀 아니지!”

“왜 그래?”

자신의 소문에 대해선 이미 인지하고 왔을 터.

에일은 호들갑 떠는 그롬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봤다.

“진짜 그러기야? 우리 좋은 승부도 하고, 마지막엔 직접 인정까지 해줬는데. 살려 주는 건 아니더라도, 편히 보내 주는 게 사람의 도리 아니냐?”

“다짜고짜 습격한 주제에 뭐라는 거야.”

함정까지 파두고 죽일 기세로 달려들던 그의 모습을 잊지 않았다.

에일은 그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고, 새하얗게 질린 그롬의 눈은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아니. 마, 말 좀… 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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