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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이단심판관-167화 (167/227)

167화 구원의 사도 (3)

“멋진 동상이군요.”

집행관, 아일린이 거대한 석상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녀의 앞에 세워진 루의 석상은 한눈에 담기도 벅찰 만큼 웅장한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아직 능숙하진 않아 보이지만요.”

곁에 선 에일이 그녀의 말을 받았다.

삐뚤삐뚤한 선과 여기저기 보이는 결함.

시드나 지역 부족원들의 손재주는 좋게 봐준다 해도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부족원 전원이 무시무시한 야만전사를 연상시키는 모습인 만큼, 이런 일과는 그간 거리가 멀었다.

물론 힘이 워낙 좋아서 규모만큼은 엄청났지만.

“능숙한 기술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석상을 만드는 과정. 신께 감사하고, 뜻이 닿기를 바라는 새 신도들의 마음이 가장 중요한 것이지요. 분명 여신께서도 그들의 정성에 흡족해하실 겁니다.”

“…….”

그녀의 말에 에일은 입을 다물었다.

정작 루는 석상이 자신의 눈부신 미모를 담아내지 못했다며 슬쩍 불평했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여신의 반응을 알고 있는 에일은 차마 그 사실을 신실한 믿음으로 가득 차 있는 아일린에게 말할 수 없었다.

[‘빛의 심판자, 루’가 탄성을 자아냅니다.]

다만 그런 루조차 감탄을 금치 못한 것이 있었다.

이제 막 이루어진 거대 기념비의 완공.

시드나에서 가장 높고 거대한 건축물이기도 한 이 거대 기념비는 네포스의 군단을 물리친 역사적인 순간을 기념하기 위한 비석이었다.

동시에 기념비엔 그러한 기적을 가능하게 만든 여신을 찬양하는 구절들로 가득했다.

에일과 힘을 합한 전사들은 언데드 군단을 완전히 물리쳤고, 이 두 번째 지하 세계는 완벽한 신도들의 거점 지역이 된 것이다.

‘아직 잔당들이 남아 있어 다 끝난 건 아니지만…….’

언덕 위에서 기념비를 올려다보던 에일이 시선을 돌렸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인원의 행렬.

시드나 지역에 진입한 교단의 이단심판관, 그리고 사제들이 세계의 입구를 통해 우르르 들어오고 있었다.

교단에서 정식으로 파견을 나온 인원들이었다.

에일은 엘트리스의 래터들을 대동해 시드나 지역과 지상을 잇는 새로운 입구를 만들어 냈다.

래터들이 나섰음에도 적잖은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이젠 무시무시한 영원의 호수를 거치지 않아도, 시드나 지역과 지상을 오고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통로를 통해 교단의 사제들이 파견되었다.

[‘빛의 심판자, 루’가 당신을 후원합니다!]

[빛의 교단 공헌도 +1,000]

‘시드나에 들어선 다음부터 벌써 몇 번째 후원인지.’

에일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수많은 주민들이 빛의 교단을 따랐고, 시드나는 통째로 루의 영역이나 다름없이 되어 버렸다.

그 덕에 루가 막대한 영향력을 획득함은 당연한 일.

그로 인한 이득은 에일에게도 고스란히 돌아오게 되는 것이었다.

[‘은밀한 탐구자’가 당신의 수완에 감탄합니다.]

[‘생명의 어머니’의 시기에 찬 눈빛이 당신에게 향합니다.]

다른 신격들의 입장에선 당연히 배가 아플 일.

체면상 직접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그와 적대적인 입장에 서게 된 프레이아는 달랐다.

물론 프레이아가 아무리 무섭게 노려본다 한들, 이미 열렬한 빛의 신도들로 가득한 시드나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다 해결된 건 아니지. 아직 안정화가 필요한 상황이니까.’

네포스의 언데드 군단을 대대적으로 몰아냈음에도 늪지대가 여전히 생존에 열악한 환경임은 변함없었다.

그렇기에 에일이 교단에 파견을 요청한 것이다.가장 큰 적은 사라졌고, 교단의 집행관인 아일린과 이단심판관들까지 나선 이상 이곳의 환경도 빠르게 개선될 것이었다.

“망자들에게 고통받던 이 땅도 여신의 은총 아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형제님의 활약 덕분에 많은 사람을 구한 것이지요.”

“다른 일만으로도 바쁘실 텐데, 여길 맡기고 떠나게 되서 면목 없습니다.”

“그런 말씀 하실 필요 없습니다. 더 큰 임무를 맡으신 분께서 말이죠.”

아일린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에일은 인벤토리에서 아이템을 꺼내들었다.

남부에서 얻은 성물 파편.

네포스와 군단을 제거한 뒤 좌표들을 수색해 회수한 두 번째 조각이었다.

“교단 내에서도 형제님이 벌써 두 번째 조각을 손에 넣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습니다.”

“운이 따랐죠.”

“아니요, 운이 아닙니다. 여신께서 그동안의 관습을 깨고, 형제님을 여섯 번째 집행관으로 선택하신 건, 결코 우연이나 운 따위가 아니었죠.”

아일린이 깊은 신뢰의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빛의 교단은 벌써 네 개의 핵심 파편 중, 두 파편을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그것도 교단의 도움 없이 에일 혼자만의 힘으로 해낸 일이었다.

교단 내에서 집행관 선정에 대해 의문을 갖던 자들도 이번 소식을 전해 듣고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전 이만 출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이제 얻은 성물을 왕국 내로 회수해야 했다.

아일린은 당분간 이곳에 남아 새로운 땅을 안정화시킬 것이었고, 에일은 남부의 성물 파편을 가지고 교단으로 돌아간다.

“아, 그리고 형제님.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바깥의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시길.”

* * *

에일은 지상과 지하를 잇는 ‘세계의 입구’를 통해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곤 드넓은 남부 오지를 빠져나가려 하염없이 걷는 중이었다.

늪지대에 바글거리는 몬스터들을 피하거나 상대하느라 바쁘긴 했지만, 그때를 제외하면 시간 자체는 남아돌았다.

그 시간 동안 에일이 취한 행동은 당연히 정보 수집.

이동 시간 동안 정보 사이트를 뒤지는 건 이젠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나 출발 전에 아일린이 그에게 말했듯, 정보망을 통해 들려오는 소식들은 하나같이 심상치 않은 것들뿐이었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건 아폴리온과 그리핀의 전면전이 발생한 소식.

서부 지역에 맞닿아 평소 마찰을 빚던 켈베로스가 아닌, 북동의 그리핀을 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심지어 두 길드는 당장에라도 서로를 끝장내려는 듯이 총력전을 펼치고 있었다.

‘아폴리온이 갑자기 왕자 쪽에 섰다는 소식도 있고…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 건지.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사건이 연달아 터지면 곤란한데.’

철십자에서 넘겨준 정보에 따르면 아폴리온 길드가 지지하던 왕가를 바꾸고 돌아섰다고 한다.

이유는 불명.

6대 길드의 본격적인 개입으로 순탄하게 끝날 거만 같던 월드 퀘스트의 판도가 또다시 변화를 맞고 있었다.

‘다행히 끝내주는 정보망이 하나 생긴 덕에 뒤처지진 않겠지만.’

에일은 철십자와 이번 거래를 맺으며 중요한 정보를 공유하기로 계약을 맺은 뒤였다.

그가 남부 성물을 이미 회수한 것도 아직은 철십자의 고위 간부들밖에 알지 못했고, 그 사실을 알 방도가 없는 다른 유저들은 하염없이 텅 빈 늪지대를 뒤지는 중이었다.

에일도 무려 6대 길드 중 하나와 정보를 공유하며 굉장한 창구가 생긴 셈이었으니,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잠깐…….’

무언가 기척을 느낀 에일이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습지의 빽빽한 나무들 사이에서 에일은 눈을 굴리며 수상한 낌새를 찾아냈다.

콰악!

왼편에서 날아든 날카로운 뼈의 창이 그가 서 있던 땅에 박혔다.

뒤로 가볍게 물러나 공격을 피한 에일은 단숨에 장검을 빼 들었다.

“듣던 대로 눈치가 빠르네.”

꼬부라진 나무 뒤편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붉은 로브를 걸친 유저.

“너는…….”

습격자를 마주한 에일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처음 마주하는 유저임에도 상대의 정체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현상금 사냥꾼, 그롬.

2세대 가상현실게임의 랭커 출신이자, 워로드에서도 무려 준랭커급의 현상금 사냥꾼으로 활동하고 있는 네임드 플레이어였다.

“오, 한 번에 알아봐 주는 거야? 영광인데.”

“랭커 자리를 노리고 있다고 동네방네 떠들더니, 설마 나 하나 잡자고 이 먼 오지까지 찾아온 건가?”

“요새 하도 네 말이 많길래, 한번 싸워 보고 싶었거든.”

그롬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현상금 10만 골드짜리 일감은 내 수준에서도 보기 힘들어서 말이지.”

“뭐, 10만이라고……?”

에일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2만 골드였던 자신의 현상금이 단 번에 5배가 뛰어 버렸다는 말.

전쟁 소식에 정신 팔려 미처 확인하지 못한 점이었다.

고작 유저 목숨 하나에 걸린 현상금치고는 액수가 장난이 아니었다.

이 정도라면 현상금 사냥꾼들은 물론, 일부 랭커급 유저조차도 움직이게 만들 만한 동기가 되어 줄 수 있었다.

[‘생명의 어머니’가 당신의 비참한 최후를 기대합니다!]

역시나 프레이아가 벌인 짓이었다.

‘젠장, 일이 귀찮게 됐는데…….’

예상 밖의 상황에 에일은 급히 눈을 굴렸다.

주변의 낌새를 보아 동료 하나 없이 찾아온 것은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지금 그의 앞에 선 남자는 기존의 상대와는 차원이 달랐다.

무려 250레벨의 준랭커급 유저.

물론 지하에 틀어박혀 있던 에일도 시드나의 대형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지역을 통째로 손에 넣은 덕에 10레벨이나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210레벨과 250레벨간의 간격은 우습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반 유저들 사이에서도 40레벨 차이는 굉장히 컸다.

한데 200을 넘는 고레벨 유저들 간의 싸움에서 이만한 스펙 차이를 활용 못 할 허접한 플레이어가 있을 리는 없었다.

‘물론 난 광기와 총애도의 보정 덕에 스탯 차이 자체는 충분히 좁혔을 거다. 스킬 개수와 장비 레벨 차이가 있지만, 네크로맨서와 이단심판관의 상성을 고려하면 불가능한 싸움은 아니야.’

그롬의 직업은 네크로맨서.

그가 실력 있는 네임드 플레이어라 해도, 언데드를 부리는 만큼 상성 싸움에서는 에일이 앞섰다.

즉, 성립이 되지 않을 정도의 싸움까지는 아니라는 것.

물론 이건 일반적으로 마주친 싸움을 가정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문제는 녀석이 짜둔 판이라는 거겠지. 내 동선을 읽고 있었어.’

PVP를 업으로 삼고, 그롬쯤 되는 유저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리는 없었다.

자리를 잡아 뒀다는 건 미리 준비를 끝마쳐 뒀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도망칠 생각은 말아.”

터엉!

그롬이 스태프를 바닥에 내려찍었다.

그러자 늪 속에 잠겨 있던 각종 몬스터와 유저 시체들이 일어났다.

그어어어!

워로드의 네크로맨서는 직업 밸런스상 시체가 없어도 땅 아래에서 망자를 소환해 부릴 수 있었다.

하지만 시체가 있을 때의 어드밴티지가 없는 건 아니었다.

직접 부릴 시체들만 있다면 캐스팅 시간이 극단적으로 줄어들면서, 마나 소모도 훨씬 적게 조종이 가능했다.

후두둑!

나무 위에 은밀히 걸려 있던 시체들이 무더기로 떨어져 내렸고, 늪 속에 잠긴 시체들이 두둥실 떠올랐다.

깨어난 언데드들이 주변을 둘러쌌지만, 그건 그롬이 미리 준비해 둔 시체들에 비하면 극히 일부일 뿐이었다.

“이거… 고생 좀 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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