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구원의 사도 (2)
어둠이 내려선 깊은 동굴 속의 던전.
그리핀 길드의 주요 영지에 위치한 이곳엔 모두가 놀랄 만한 거물들이 찾아와 있었다.
“연락이 왔어. 동부 황야 쪽 성물은 무사히 회수됐다는 모양이야.”
“그래, 계획대로 잘 굴러가고 있군. 이제 이쪽만 끝내면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겠어.”
크루거와 사일러스가 대화를 나눴다.
워로드 전체 랭킹의 1위와 8위.
아폴리온 길드의 최고 수뇌부이기도 한 그들은 자신들의 길드와 전혀 상관없는 영지에 와 있음에도 길드원 하나 대동하지 않았다.
최근 같은 살벌한 분위기에 보인 대담한 행동.
그들의 앞에 있는 것은 커다란 사령석과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결사단의 일원들이었다.
대지에서 빨아들인 검은 마력이 사령석에 휘감기며 요동쳤다.
“크루거, 꼭 이런 음침한 녀석들하고 손을 잡아야겠어?”
“다 들리게 그런 말을 하면 상처받는 답니다.”
결사단의 뮤트가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일러스는 마땅찮은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제 와서 발을 뺄 수야 없으니, 굳건한 입지의 그녀라고 해도 결정을 틀기엔 무리였다.
“우리가 밀어줘야 하는 게 그 재수 없는 왕자라니. 아니꼬워서 버틸 수가 없네.”
“유리한 쪽에 배팅하면 얻는 것도 없으니까.”
크루거가 간단히 말했다.
6대 길드 모두가 공주의 편을 들어 주고 있는 지금.
기존 입장 그대로 공주를 지지해 봤자 변하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 반대편에 선 뒤, 이 상황을 뒤집어만 준다면 훨씬 더 큰 발언권을 가질 수 있었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카드가 쥐어져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그때, 입구 쪽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이 자식들이……!”
그리핀의 길드장, 레윈.
랭킹 6위의 최상위 랭커인 그의 뒤엔 보좌하는 대여섯 명의 길드원까지 뒤이어 따라와 멈춰 섰다.
“설마 했는데, 남의 영지에서 이따위 개수작을… 네놈들이 벌인 짓이 선전포고나 다름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레윈의 사나운 눈초리가 크루거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흉흉한 눈빛을 받는 그는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였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군. 인원수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적지만.”
“이 새끼가…….”
그리핀의 영지에 침입한 크루거에 대한 정보를 들은 레윈은 곧장 이곳 동굴로 향했다.
하지만 이리로 이어지는 길목에 숨어 있던 아폴리온 측의 길드원이 다수 있었고, 함정 탓에 상당한 수의 길드원들을 잃게 되었다.
인상을 찌푸렸던 레윈은 잠시 그의 뒤편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 저게 그 사령석이냐? 고대 정령인지 뭔지 따위로 우리가 당할 거라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야.”
“나도 거기까진 바라지 않아.”
담담히 말한 크루거가 손을 놀렸다.
두우우웅!
[선전포고가 이루어졌습니다!]
[‘아폴리온’ 길드와 ‘그리핀’ 길드가 전쟁 상태에 돌입합니다!]
“무, 무슨……!”
양측 모든 길드원들에게 띄워진 시스템 메시지.
자리에 있던 그리핀의 길드원들은 일제히 동요했다.
설마 이 자리에서 선전포고를 할 줄이야,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그의 행동이다.
“약간의 도움이면 충분해. 마무리를 짓는 건 우리의 손이지. 이제 균형을 깰 때가 온 거다.”
“닥쳐! 여기서 죽여 주마!”
흥분한 레윈이 스태프를 꺼내 든 채 달려들었다.
그의 직업은 ‘배틀 메이지’.
중근거리 전투를 구사하는 특이한 마법사 클래스였고, 캐스팅과 근접 전투를 함께해야 하는 탓에 워낙 난이도가 높아, 대부분의 유저들은 손도 대지 못하는 직업이었다.
사실상 레윈 만의 시그니처 클래스이기도 한 직업.
창과 같은 기다란 스태프가 크루거의 목을 노렸다.
쩌엉!
그의 공격을 막아 낸 것은 사일러스.
검게 물든 그녀의 칼날이 크게 휘둘러졌고, 레윈은 훌쩍 뒤로 물러났다.
옆에서 끼어든 탓에 팔뚝에 얕은 상처가 생겼고, 약간의 피가 뚝뚝 떨어졌다.
츠츠츠!
[저주에 노출되어 이동 속도가 소폭 감소합니다!]
[저주에 노출되어 최대 체력이 소폭 감소합니다!]
레윈의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들.
방금 합을 주고받은 그녀의 스킬이었다.
마검사 클래스를 지닌 사일러스는 그중에서도 어둠 속성에 특화되어 있어 보조적인 흑마법과 저주에 능했다.
하지만 레윈은 이런 류의 디버프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급 패시브를 지니고 있어, 많은 수치가 떨어지진 않았다.
파앗!
자신에게 가속 마법을 건 레윈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이렇게 전쟁을 걸어온 이상, 자신의 영지에 발을 들인 그들을 곱게 보내 줄 수는 없는 일.
그는 앞을 막는 사일러스를 단숨에 정리하고, 길드장인 크루거의 목까지 따 버릴 셈이었다.
카가각!
수차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공방이 치열하게 오갔다.
그때 무기를 휘두름과 동시에 캐스팅을 마친 레윈에게서 강력한 전류가 뻗어져 나갔다.
사일러스는 재빨리 범위 밖으로 한 걸음 물러났지만, 그사이 즉발 마법 수준의 충격파가 그녀를 강타했다.
콰앙!
그녀는 튕겨져 나가며 스턴 상태에 빠졌고, 날아가는 동안 콤보를 넣기 위해 단숨에 쇄도한 레윈이 따라붙었다.
하지만 그녀는 충격파에 당하자마자 곧바로 상태 이상 해제기를 사용해 스턴 상태에서 벗어났다.
오히려 거꾸로 몸이 뒤집힌 상태로 공중에서 큼직한 스킬을 발동시켰다.
콰아아앙!
유일급 공격 스킬, 강습.
동굴 바닥이 온통 뒤집어졌고, 순간 공격에 당할 뻔한 레윈은 서둘러 몸을 뒤로 빼냈다.
‘이 정도 실력이라니…….’
예상 밖의 선전에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녀 또한 랭킹 8위의 최상위 하이 랭커.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쯤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6대 길드장인 자신과 대등하게 맞설 레벨은 아니었다.
그런데 방금 움직임은 순간적으로 그의 예상을 우습게 뛰어넘었다.
갑자기 실력이 늘기라도 한 건지, 그동안 보고로 들어 왔던 것보다 훨씬 뛰어난 모습이었다.
- 길드장! 칠흑의 탑으로 향했던 랭커들이 당했습니다!
- 슐츠와 알렉 2명 다 아폴리온의 루칸에게 제압당했습니다!
- 난파선의 무덤 쪽 인원도 전멸입니다!
“뭐, 뭐라고……?”
그때 사방에서 들어오기 시작한 급박한 보고들.
당황한 레윈은 순간 머리가 딱딱히 멈춘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영지에 들어온 것은 크루거와 사일러스뿐만이 아니었다.
비밀리에 영지 안으로 들어선 아폴리온의 고위 간부들은 모두 그리핀 길드의 정보망에 걸렸고, 레윈은 그들을 쫓기 위해 추적대를 보내 놨었다.
아폴리온의 간부급 상위 랭커들이 다른 6대 길드에 비해서도 굉장히 강하다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는 바.
미리 분석해 놓은 데이터에 따라 충분한 전력의 랭커들로 구성했다.
하지만 지금 들려온 결과는 모두 패배였다.
오히려 상대의 전력을 파악하고 나선 쪽이 모조리 패했다는 것.
“젠장, 이게 대체 어떻게…….”
“이거, 다른 쪽도 마무리가 된 모양인데.”
레윈의 표정을 본 사일러스가 히죽 웃었다.
그녀의 말에 크루거는 검을 뽑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렇다면 이쪽도 슬슬 끝내지.”
* * *
“길드장, 전쟁입니다! 아폴리온이 그리핀에게 전면전을 걸었어요!”
“나도 방금 들었어.”
호들갑을 떠는 람빅의 말에도 나이트메어의 길드장 카린은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그게 전부입니까?”
“무슨 반응을 바란 거야?”
“생각도 못 한 움직임이잖습니까. 아폴리온이 갑자기 그쪽을 칠 거라고는…….”
“우리 쪽에서는 잘된 일이지. 전쟁 중에 뒤통수 맞을 걱정은 덜었으니까.”
나이트메어는 아직도 여명 길드와의 치열한 전쟁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두 거대 세력 간의 전쟁인 만큼 모든 전력을 쏟아야 했고, 그런 상황 속에서 뒤쪽에 버티고 있는 다른 6대 길드들은 충분한 불안 요소였다.
그런데 이때 마침 배후의 두 길드가 전쟁에 나서 준다니.
이보다 좋은 일은 없었다.
뒤를 맞을 걱정 없이 여명과의 전쟁에 오롯이 전념할 수 있게 된 상황.
“하지만 그리핀이 버틸 수 있을까요? 안 그래도 무섭게 성장하던 아폴리온 길드가 북동부까지 먹어 치우면…….”
같은 6대 길드라고는 하나, 길드 간의 전력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선두에 서 있는 아폴리온 길드가 그리핀의 영지들까지 모두 흡수한다면 그 이후가 감당되지 않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카린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그리핀도 6대 길드야. 그렇게 쉽게 당하진 않겠지. 게다가 일이 그렇게 될 때까지 켈베로스나 철십자가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리도 없고.”
북서부, 북부를 중심으로 자리 잡은 켈베로스와 철십자.
이 두 6대 길드는 2세대 게임인 아르메니아에서부터 이어진 오랜 앙숙 관계였고, 언제나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둘이 서로만 물어뜯을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나이트메어와 여명이 전쟁으로 묶여 있는 지금, 아폴리온이 지나치게 성장하려 들면 그쪽을 견제할 것이 당연했다.
“어차피 우리 쪽에서 전력을 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카린이 간단히 말했다.
이제 나이트메어와 여명 길드 간의 싸움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다른 쪽을 견제한답시고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성물 쪽 상황은?”
“아,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정신을 차린 람빅이 보고서를 그녀에게 전했다.
서부 사막의 핵심 성물 파편은 나이트메어에서 회수를 마친 상태.
북부의 성물은 빛의 교단에게 넘어간 게 확인되었고, 북부로 향하던 빛의 신도 중 눈에 띄는 유저는 에일 말고는 없었다,
즉, 에일이 가장 먼저 북부의 성물을 발견해 회수했다는 것.
“그렇단 건 철십자가 성물을 챙기도록 그냥 지켜봤다는 건가. 아니, 그럴 리는 없지.”
철십자의 길드장, 시르를 떠올린 카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자신의 땅에서 일어난 일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도 없을 것이고, 아마 에일과 무언가 거래를 했을 것이라고 보는 편이 옳았다.
“그 여자하고 무슨 거래를 주고받았을지 궁금한데… 에일하고는 연락해 봤나? 서부 성물로 빛의 교단을 끌어들이는 것도 지금으로선 괜찮은 선택지일 텐데.”“아, 그게… 저희 쪽에서 먼저 연락을 해 봤지만, 급한 용건 때문에 나중에 답신을 주겠다고 했답니다.”
“급한 일이라고……?”
카린이 의외라는 듯 반응했다.
‘남부 오지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 * *
키이이익!
평원을 빽빽이 메운 언데드 군단.
무시무시한 고레벨의 각종 괴생명체와 시체들로 가득 찬 군단을 네포스의 하수인이라 불리는 악령들이 이끌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비장한 얼굴의 부족 전사들이 늘어서 있었다.
평소 질서 없이 각자의 전투를 벌이던 그들의 모습과는 다르게, 군대처럼 질서 정연히 사열한 모습이었다.
쿠웅!
화르르륵!
바닥에 내려친 전사들의 창과 도끼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놀랍게도 그들의 무기에 나타난 건 이단심판관의 상징인 백색의 성화.
동시에 물리 공격이 통하지 않는 악령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했다.
그사이 언데드 대군이 코앞까지 다가왔고, 선두에 서있던 에일은 전사들을 향해 크게 외쳤다.
“여신의 가호가 우리와 함께한 이상, 물리칠 수 없는 적이란 없다! 끝나지 않던 악몽을 완전히 뿌리 뽑을 때다!”
“와아아아아!”
남부 늪지 아래의 깊은 지하 세계.
그곳에서 유래 없는 대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