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늪지대의 공포 (2)
“여기도 마찬가지인가…….”
유적지 안으로 발을 들인 에일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아래층까지 내려와 봤지만, 이번 좌표에서도 역시 성물 파편의 흔적은 없었다.
직접적으로 발견될 파편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웨이 스톤이나 성물에 대한 단서도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도 꼼짝없이 허탕이라는 뜻.
방금 유적지 안에서 나온 대지 교단의 신도들이 별일 없이 그냥 나왔었던 걸 본다면, 예상은 쉽게 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진짜 골치 아프네.’
그렇다고 해서 에일의 실망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벌써 몇 번째인지.
더 이상 수를 세기도 어려워질 지경이었고, 정말 남부에 성물이 있기는 한 건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은 안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북부에서도 발견된 걸 보면 성물 파편이 없는 건 아닐 텐데. 아니면 혹시 아예 다른 방식으로 접근을 해야 한다거나…….’
“에일! 네 놈을 잡으러 왔다.”
뒤편에서 들려온 도발적인 목소리.
언제 유적지 안으로 진입해 온 것인지, 네 명의 유저들이 우르르 방 안에 들어왔다.“누구지? 교단 소속으로는 안 보이는데.”
각자 차려입은 장비에 선명하게 보이는 길드 마크.
특정 교단의 신도라면 대부분 길드에 들지 않았을 터인데, 그들은 모두 같은 길드의 일원으로 보였다.
“대지 교단에서 네 목에 현상금을 걸었다.”
“현상금? 아, 그런 거였군.”
에일이 피식 웃었다.
“걸린 현상금이 얼마나 되길래?”
“이만오천 골드다.”
“꽤 되잖아……? 하긴 신격의 원한을 샀으니 당연한 건가.”
자신에게 현상금이 걸릴 수 있다는 건 이미 고려해 뒀던 바.
하지만 예상 이상으로 높게 걸린 금액에 제법 놀랐다.
‘일단 상대는 교단이 건 돈을 노린 현상금 사냥꾼 길드일 테고, 딱히 눈에 띄는 얼굴은 없네.’
우연히 마주친 적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신을 노리고 온 유저는 상대할 때 분명 주의가 더 필요했다.
대처법이나 전력을 대강이나마 가늠하고 왔다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껏 대지 교단의 추적자들이 찾아와 장렬히 산화했던 것처럼, 정말 그럴싸한 대처법과 전력을 갖추고 오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직접 랭커급 실력의 유저와 마주해 본 경험이 있는 이는 매우 적은 탓이었다.
지금껏 인원수를 뒤집을 만한 상대와 싸운 적이 없었고, 에일에 대해서도 편집된 영상 속에서나 봤으니 대부분은 객관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것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네.’
아주 높은 레벨처럼 보이지도 않고, 인원수도 달랑 넷.
눈에 띄는 네임드 플레이어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감사히 일용할 양식이 그의 앞에 찾아들었다.
* * *
화르르륵!
타오르는 이단의 시체가 나무에 묶여 흔들리고 있는 아래.
에일은 심판당한 이단의 시체를 이용해 정체 모를 조형물들을 만들어 보았다.
형벌 집행 스킬 덕에 시체 이외의 다른 재료들은 쉽게 조달할 수 있었다.
딴에는 후발 주자들을 위한 이정표를 만들어 본 것이지만, 워낙 손상이 심해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 바닥엔 그들의 새빨간 피로 그려놓은 빛의 교단의 문양이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었다.
“음… 하다 보면 늘겠지?”
스스로 보기에도 심히 기괴한 느낌.
하지만 그런 느낌을 노리기도 한 것이니 상관은 없었다.
이곳 남부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릴 지점 중 하나일 테니, 이런 흔적을 남겨 놓는 것은 곧 여신의 영향력 증대로 이어졌다.
[‘빛의 심판자, 루’가 예술품을 향해 박수를 보냅니다!]
[빛의 교단 공헌도 +100]
역시나 루는 대만족을 한 듯 후원까지 보내왔다.
누가 봐도 조약하고 고약한 물건이었지만, 그녀가 보기엔 심오한 뜻을 담고 있는 예술품 이상이었다.
[‘생명의 어머니’가 이를 갈며 바닥을 내려칩니다.]
이번에도 암살이 실패로 돌아가자 프레이아는 분한 반응을 보였다.
‘확실히 골치가 아프긴 한데…….’
솔직히 말해 에일의 입장에서 아주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최소한 그녀와 척을 지고 나서 스탯 만큼은 확실히 오르는 중이었다.
어느새 에일의 신앙심 900대에 달했고, 광기 스탯 역시 650을 넘어서 있었다.
다른 중요한 수치인 공헌도와 총애도도 지속적으로 수급되었다.
언제 공격을 받더라도 대처할 수 있도록 주의를 해야 했지만, 그 부분이라면 원래부터 자신이 있는 분야였다.
물론 이 늪지에서의 추적이란 꽤 골치가 아팠지만.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역시 짭짤하단 말이지.”
에일은 새까맣게 타들어 간 시체에서 아이템을 모두 회수했다.
고가의 장비 아이템들이 여럿 떨어져 있었다.
그 뒤에 우선적으로 챙긴 것은 역시나 식량과 생존 물자들.
여기저기서 달려들어 주는 덕에 다른 유저들과는 달리 물자 걱정은 거의 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 성물 쪽은 어떻게 한다…….’
좌표에 찾아와 습격자 아홉을 태워 버린 그였지만, 성물 파편을 수색하는 원래의 임무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이렇다 할 진전 없이 답답하게 막힌 상황이었다.
‘시간도 상당히 많이 잡아먹었고,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지도… 조금 생각을 바꿔 봐야 하나.’
그가 과거 가상 현실이 아닌 다른 게임을 플레이할 때도 이런 경험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렇게 퀘스트가 꽉 막혀 해결되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무언가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다.
잠시 자리에 멈춰 생각에 빠졌던 에일의 머릿속에 순간 무언가가 번쩍하고 스쳐 지나갔다.
‘맞아, 그러고 보니 높이에 대해선 안 나와 있잖아.’
웨이 스톤에 주어진 좌표는 X와 Y 좌표만 기록되어 있었다.
평면으로 이루어진 지도로 봤을 때, 한 점을 찍을 수 있는 좌표.
하지만 높이를 가리키는 Z축 좌표는 따로 없었다.
‘그렇다면 혹시 그 아래쪽인가……?’
가장 유력한 후보는 지하.
좌표상 몇 미터 아래 정도야 이미 에일을 비롯한 다른 유저들도 모두 꼼꼼히 살펴본 점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아래쪽에 있는 거라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당장 에일이 겪은 것만 해도, 엘트리스 지역의 선례가 있었으니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다만 지하세계 엘트리스를 암시하는 이야기가 에스마이어 지역에 몇 가지 퍼져 있던 것에 비하면, 그 어떤 전설과 설화 속에서도 남부 지역에 지하 세계가 있을 거란 이야기는 없었다.
‘하지만 그건 지상의 이야기고… 엘트리스라면 무언가 단서가 있을 지도 몰라.’
에일은 재빨리 메신저 창을 띄웠다.
* * *
까악까악-!
커다란 까마귀가 하늘을 가르며 날아왔다.
에일의 팔에 사뿐히 내려앉은 녀석은 엘트리스로부터 전해져 온 편지를 그에게 건넸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군.’
에일은 엘트리스의 노움들에게 이번 일에 대한 조사를 부탁했다.
그러자 지하의 거의 모든 서고 속 자료들을 털어 가며 조사를 마친 노움들이 그에게 서둘러 답장을 보내온 것이다.
촤르륵!
에일은 기다란 편지를 펼쳐 들었고, 내용을 읽어 내려가는 그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퍼졌다.
그의 예상이 적중한 것이다.
엘트리스로부터 멀리 떨어진 남쪽과 동쪽에 또 다른 지하 세계가 존재한다는 옛 전설.
남부와 동부 오지의 지하를 뜻하는 것이 확실했다.
단순한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인 데다가, 성물과의 연관성에 대해선 언급 자체가 전무했기에 확실하게 무언가를 생각할 단계는 아니었다.
하지만 성물 파편이 거기에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답답하게 진행이 막힌 상황에서 이런 단서가 들어왔다는 것만으로도 단번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렇다면 그리로 향하는 방법에 대해서가 문제인데…….’
쭉쭉 내용을 읽어 내려간 에일은 서둘러 편지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
영원의 호수의 가장 깊은 바닥 아래에, 또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입구가 위치해 있을 거라고.
노움들이 고문서까지 뒤져 가며 얻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영원의 호수라면……!’
다행히 그가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남부 늪지대는 워낙 광활한 탓에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지역들로 가득했다.
그러나 먼저 습격해 온 유저에게서 빼앗은 지도 정보 사이에 영원의 호수라는 이름을 본 적이 있었다.
‘다행히 여기서 멀지 않아!’
에일은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 * *
“가장 깊은 바닥이란 말이지…….”
에일이 호수 속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전설 속 이야기를 따라 영원의 호수 앞에 도착한 그였지만,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넓고 깊은 호수를 마주했다.
바깥에서는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어 직접 들어가서 찾아보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럼…….”
에일이 인벤토리에서 찰랑이는 포션병을 들어 올렸다.
알리사가 보내 준 특제 수중 호흡 포션.
희귀 재료를 추가해 만들어 더 긴 지속 시간을 지녔고, 이걸 마시면 물속에서 숨을 쉬지 않고도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수중 호흡 포션의 효과가 적용됩니다!]
에일이 포션을 모두 마시자 화면 한편에선 수중 호흡 포션의 지속 시간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서두르자.’
호수 안으로 헤엄쳐 들어간 에일.
이 중에서 가장 깊은 바닥을 찾아야 했고, 호수의 넓이를 생각하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서자 호수는 바깥에서 보던 것보다도 훨씬 깊었다.
‘미친… 안으로 들어왔는데도 중심 쪽은 바닥이 보이지가 않네.’
어찌나 깊은지 중심부 쪽엔 시꺼먼 어둠이 가라앉아 있었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오금이 저려 바깥으로 뛰쳐나올 만한 광경이었지만, 이미 접속기에 갇혔을 적에 더한 경험도 한 에일은 개의치 않고 그리로 나아갔다.
점점 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 내려가는 에일.
후우우웅!
그때 놀랄 만큼 거대한 수중 몬스터가 그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심해에서나 살 법한 흉측한 생김새의 괴물.
정보창에 보이길 무려 300레벨의 필드 보스 몬스터였지만, 다행히 그를 공격해 오진 않았다.
숨을 죽이던 에일은 진땀을 삐질 흘렸다.
‘이게 개고생이 아니길 바라야지.’
스스스.
그는 이제 빛이 아예 닿지 않는 곳으로 들어왔다.
실제 물과는 조금 다른지 깊이에 비해 빛이 금방 사라지긴 했지만, 그걸 감안하고도 굉장히 깊숙이 들어왔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여전히 바닥이 닿을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무언가 결심한 에일은 장검을 빼들었다.
화르르륵!
장검에 나타난 성화의 불길.
물속에서도 멀쩡한 성화 덕에 에일의 시야가 밝혀졌고, 환하게 밝혀진 주위를 볼 수 있었다.
그동안 곁에 있는지도 몰랐던 거대한 수중 몬스터들의 모습.
물론 여전히 바닥은 보이지 않았다.
‘하… 살아나갈 수는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