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북부의 주인 (5)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에일은 느닷없이 벌어진 상황에 당황했다.
6대 길드 철십자의 길드장이자, 세계 랭킹 2위의 랭커가 네슈아와 친남매 사이였다니.
‘어쩐지 왠지 모르게 익숙한 인상이더라니…….’
이렇게 둘을 동시에 보니 왜 그런 느낌이 들었던 건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림자 교단에 몸을 담은 탓에 말을 할 수 없는 네슈아는 대답 대신 양피지를 끄적였다.
시르는 그런 동생을 한심한 눈초리로 바라봤다.
“대체 그런 이상한 컨셉의 교단엔 뭣 하러 들어간 건지.”
침묵의 페널티.
그녀에겐 광기로 유명한 빛의 교단보다도, 네슈아가 몸을 담고 있는 그림자의 신도들이 훨씬 더 이상하게 보였다.
실제로 몸을 담은 유저들의 수도 그림자 교단이 가장 적었으니, 비단 그녀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여긴 왜 쫓아왔어?」
인상을 찡그린 네슈아가 따지듯 적었다.
“왜냐니. 이유야 뻔하지.”
시르는 간단히 답했다.
“네가 가지고 있는 성물을 내놔.”
스릉!
시르가 그들을 향해 검을 겨눴다.
“…….”
“설마 동생이라고 봐줄 거라 생각하진 않겠지?”
단번에 형성된 살벌한 분위기.
가장 앞에 서 있는 시르는 물론이거니와, 뒤에 서있는 길드원들조차 최소 준랭커급 이상의 플레이어였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봤자 빠져나갈 방도가 없는 상황.
「알았어」
누나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네슈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두 팔을 들어 올린 그는 순순히 다가가 성물을 넘겨주려 팔을 뻗었다.
그리고 성물 파편을 주고받는 두 손이 맞닿는 순간.
휘릭!
네슈아의 단검이 빛을 발했다.
날카로운 검은 서리가 칼날에 머금어졌고, 안쪽으로 바짝 파고든 그는 시르의 목을 노렸다.
콰악!
“……!”
단검을 찌르던 네슈아의 손목이 꼼짝없이 붙잡혔다.
그리곤 그의 몸이 공중에 붕 떠오르더니 반대편으로 기울어졌다.
콰앙!
바닥이 박살 나며 네슈아는 찌그러지듯 처박혔다.
그를 단숨에 메다꽂은 시르는 제압된 네슈아의 멱살을 잡고는, 벌떡 일으켜 세워 벽에 몰아붙였다.
“또 까분다.”
“…….”
똥 씹은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린 네슈아.
말만 하지 않을 뿐 속으로 온갖 욕을 곱씹는 듯한 모습이었다.
네슈아가 이렇게 다채로운 표정을 지어보인 건 에일이 알기론 처음이었다.
타악!
그의 손에 쥐어졌던 성물 파편을 시르가 낚아챘다.
어렵사리 얻은 핵심 아이템을 누나의 손에 빼앗긴 네슈아는 그를 허탈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잠깐… 철십자에서 성물을 노리는 이유가 뭐지? 유저 길드에서 가져가 봐야 쓸모가 없을 텐데. 6대 길드가 돈 몇 푼을 얻자고 하는 것도 아닐 테고.”
에일이 나서 의문을 제기했다.
친형제가 없는 에일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남매간의 싸움에 당혹스러웠지만, 지금 성물의 핵심 파편이 시르의 손에 들어간 이상 확실하게 상황을 따져 봐야 했다.
“음, 좋아. 이참에 확실히 설명해 두는 편이 좋겠지. 대륙 안쪽에 있던 너희는 몰랐겠지만, 북부에선 이전부터 성물에 대한 단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어. 성물이 나타날 거란 조짐은 이번 일이 터지기 전부터 보였다는 셈이지.”
검을 거둔 시르가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댔다.
“물론 신앙이 없는 우리에게는 별 쓸모가 없겠지. 하지만 성물은 지금 세간에 알려진 것 이상으로 큰 가치가 있어. 핵심 파편을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 훌륭한 카드가 될 수 있다는 거지. 이건 어떤 방식으로든 신격들이 목을 맬 수밖에 없는 물건이거든.”
[‘생명의 어머니’가 오만한 인간의 태도에 불쾌감을 드러냅니다.]
[‘은밀한 탐구자’가 그녀에 대해 깊은 흥미를 갖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던 신격들의 반응도 볼만했다.
최소한 그녀가 저번처럼 거짓을 늘어놓는 건 아닌 듯했다.
“지금까지 교단은 그저 길드에 들지 않은 개인 유저들이 택할 수 있는 선택지 정도의 위치였지. 하지만 내 예상이 맞다면, 게임 내에서 차지하는 신격들의 비중은 조금씩 늘어날 거야.”
휙!
시르는 잡고 있던 네슈아를 그가 있는 방향으로 밀쳤다.
그러자 비틀거리며 쓰러질 뻔한 네슈아를 에일이 붙잡았다.
“그래서 미리 성물을 쥐고 있겠다는 거군. 언제든 교단과의 관계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도록.”
“정확해.”
“그럼 당장 여기서 해결하는 건 어때?”
“아, 협상을 하자는 건가?”
시르의 입가가 슬며시 올라갔다.
에일에 대한 정보라면 그녀도 이미 잘 알고 있는 바.
최고위직인 집행관이라면 충분히 교단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 있었다.
「잠깐 나하곤 상의도 안 하고…….」
“죽기 싫다면 조용히 해.”
네슈아가 시르에게 따지려 들었지만, 돌아오는 건 타박뿐.
안타깝게도 그의 상황은 에일과 다소 달랐다.
네슈아도 두 번째 사도의 길을 걷고 있는 중이었지만, 교단 내의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빛의 교단과 달리, 적극적으로 앞으로 나서지 않은 그림자 교단 특성상 이렇다 할 조건을 내놓기 쉽지 않았다.
“그럼 장소부터 옮기지.”
“음… 미안.”
면목 없다는 듯 사과한 에일이 시르의 뒤를 따랐다.
의도치 않은 상황이었지만, 먼저 도착한 네슈아만 억울하게 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성물은 이미 시르의 손에 넘어가 버렸고, 쥐도 새도 모르게 다른 교단에게 넘어가기 전에 어떻게든 회수해야 했다.
네슈아로서는 불가능한 이야기.
“…….”
감시역과 함께 방 안에 덩그러니 남겨진 네슈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곤 시르에 대한 원망을 곱씹으며, 바닥에 쪼그려 앉아 글씨를 끄적였다.
* * *
“이걸로 끝인가.”
에일이 얼떨떨하게 말했다.
핵심 성물 파편을 가운데 놓은 상태에서 양측의 거래 조건들이 오갔고, 협상은 무사히 완료되었다.
당장 이행해야 하는 조건은 아니니, 다른 성물을 찾는 것에 방해가 되거나 급할 건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내세운 건 굉장히 특이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전혀 예상 밖인데. 어째서 그런 조건을… 철십자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 아니었나?”
“전쟁이 시작된 뒤로, 돌아가는 워로드의 판도는 그리 단순하지 않거든. 조만간 알게 될 거야. 그리고 앞으로 잘 부탁하지.”
시르가 손을 뻗었고, 에일은 그 손을 맞잡았다.
어쨌든 방금의 거래로 빛의 교단은 철십자와 함께 반동맹 관계가 되어 버렸다.
아니, 정확히는 긴밀한 협력 관계라고 하는 편이 더 나았다.
그가 단독으로 처리할 만큼 가벼운 건은 아니었지만, 루의 허락도 있었으니 그 점은 걱정 없었다.
타악!
에일에게 건네진 북부의 성물 파편.
핵심 성물 중 하나가 그의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갑자기 주변 공간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콰드드득!
방 안의 바닥에서 자라나는 커다란 나무줄기.
난데없이 등장한 줄기들은 한데 뭉치더니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주변 공간은 시간이 멈춘 듯 모두가 행동을 멈추었고, 오직 에일만이 자리에서 움직일 수 있었다.
“반갑구나, 나의 사도여.”
“당신은…….”
줄기가 뭉쳐 만들어진 차분한 인상의 여인.
녹색 빛의 머리칼이 허리 아래까지 흘러내렸고, 싱그러운 미소가 입가에 담겨 있었다.
그녀의 정체는 프레이아.
풍요와 대지, 죽음의 여신. 동시에 대지 교단의 신격이었다.“훌륭하게 성물 조각을 찾아냈구나. 나를 섬길 자격은 충분하리니, 이제 때가 되었다. 그대의 결정만이 남았을 뿐.”
성큼 다가온 프레이아는 에일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예상대로 그녀는 에일이 성물을 회수해 내는 데 성공하자, 그의 결정을 들으려 직접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핵심 파편의 중요성이야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 더 이상 대답을 늦추며 시간을 끄는 것은 불가능했다.
즉, 결정의 때가 왔다는 것.
“뜻은 정해 두었겠지?”
“그렇습니다.”
결심한 듯한 에일의 말에 프레이아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아주 약간의 영향력를 투자하는 것만으로도 수준급의 사도를 고스란히 손에 넣을 수 있다니.
프레이아는 에일의 뺨을 한차례 쓰다듬었다.
“자, 성물의 조각을 가져오너라. 나와 함께 가자꾸나.”
“전 가지 않을 겁니다.”
“음……?”
뺨을 쓸던 프레이아의 손이 우뚝 멈췄다.
“방금 무언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저는 앞으로도 빛을 섬길 거라 말했습니다.”
“하하… 아니, 무언가 착오가 있는 모양이로구나.”
그럴 리가 없다는 듯 웃음을 흘린 프레이아가 주춤 물러났다.
대지 교단의 사도를 맡을 거라고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점이라,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인지부조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믿기지 않는 듯한 얼굴을 한 프레이아에게 에일은 마지막 결정타를 날려 주었다.
“역시 빛의 교단이 가장 좋은 선택지인 것 같아서요.”
[신격, ‘죽음의 여신’의 분노가 당신에게로 향합니다!]
“네놈이……!”
콰드드득!
분노한 프레이아에게서 스산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검은 뿌리들이 바닥을 마구 뚫으며 나타났고, 방 안을 가득 채워 에일을 질식시킬 기세로 몰려들었다.
“감히 나를 배신해!”
“크윽……!”
당황한 에일이 주춤 물러선 그때.
콰아아아!
천장을 뚫고 눈부신 빛이 그들에게로 내리꽂혔다.
새하얀 빛은 방 안을 잠식한 스산한 기운을 몰아냈고, 뻗어져 나오던 뿌리들을 모조리 불태웠다.
프레이아를 가로막은 루의 개입.
파앗!
[신격의 개입이 사라져 공간의 뒤틀림이 잦아듭니다!]
“후…….”
땀을 삐질 흘리며 숨을 내쉰 에일.
대강 예상은 했던 반응이었지만, 이런 경험은 쉽사리 적응이 되지 않았다.
“갑자기 왜 그러지?”
방금의 상황을 보지 못한 시르가 물어왔다.
하지만 그가 설명을 할 새는 없었다.
드드드드!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한 바닥.
아니, 이곳 지하 무덤 전체가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뭐… 뭐지? 설마 성물이?”
신격의 존재를 모르는 철십자 길드원들은 성물 파편으로 인한 이벤트인 줄 알고 반응했다.
하나 이는 성물이 아닌 신격이 행동에 나선 것이었다.
분노한 프레이아의 움직임.
옆방에서 급히 뛰어온 네슈아도 그를 직감한 듯 무기를 뽑아들었다.
키이이이!
검은 안개가 사방으로 퍼졌고, 뒤틀린 시체들이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전투로 인해 쓰러졌던 천상 교단의 마법사들이나 몬스터는 물론, 얌전히 잠들어 있던 시체들까지도 관을 열고서 일어났다.
하필이면 그들이 위치한 장소도 지하 무덤인 탓에, 죽음의 여신인 프레이아가 개입하기 딱 좋은 곳이었다.
[프레이아의 하위 권속 ‘수확자’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츠츠츠츳!
공간이 비틀리며 나타난 거대한 사신.
긴 낫을 든 채 얼굴이 가려진 섬뜩한 외양을 띠고 있었다.
하위 권속인 수확자를 무려 둘이나 보낸 프레이아.
그들은 불완전한 현신을 취한 것이 아니었고, 유저로서는 범접하기 어려운 힘을 가지고 있었다.
후웅!
미끄러지듯 에일의 코앞까지 다가온 수확자 둘이 긴 낫을 휘둘렀다.
접근하기까지 선행 동작조차도 없는 빠른 움직임이었다.
뒤늦게 반응하려 해봤지만 어느새 발밑에서 솟아난 시체 하나가 그의 발목을 잡은 상황.
‘이런……!’
큰 피해를 감수한 에일은 이를 악물고 장검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정작 수확자들의 공격을 막아 낸 것은 그의 장검이 아니었다.
쩌엉!
카드드득!
교차된 채 떨리고 있는 세 갈래의 무기.
시르의 장검이 수확자의 두 낫을 막아서고 있었다.
위태롭게 떨리고 있다고는 하나, 놀랍게도 그녀는 두 수확자의 완력을 한 몸에 받아내고 있었다.
“이제 막 거래를 맺었는데, 벌써 죽어 버리면 곤란하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