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북부의 주인 (3)
깊게 이어진 어두운 던전의 안.
길었던 사냥을 끝낸 파티원들이 횃불을 걸어 두고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 혹시 에일 님은 괜찮을까요?”
리아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새로운 퀘스트로 인해 에일이 홀로 북부로 떠난 지 적잖은 시간이 흘렀지만, 북부의 악명은 그녀조차도 익히 들어 왔던 바.
듣기로는 보통 험지 정도가 아니었다.
최상위권의 유저조차도 아차 하는 순간에 목숨이 끊어질 수 있는 곳.
하지만 로덴은 너털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하하,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굳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거기다 제가 북쪽에 인맥이 있어서 슬쩍 챙겨 달라고 부탁을 해 놨거든요.”
“인맥이라면……?”
“제가 아르메니아 온라인 출신이잖아요.”
“아……!”
그의 말을 이해한 알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북부에 진출하고 있는 철십자 길드와 로덴은 같은 게임을 플레이 하던 출신이었다.
“그렇다면 철십자의 길드장과도…….”
“그렇죠. 제가 처음 결투에서 져 봤던 상대도 바로 누님이었으니까.”
철십자의 시르와 로덴은 이미 서로 잘 알고 있는 사이였다.
같은 길드 소속은 아니었지만, 개인 랭커로 활동하던 로덴이 이것저것 길드 바깥일들을 맡아 주며 교류가 있었다.
시르와는 따로 현실에서도 한 번 만난 적 있을 정도였다.
“신기하네요. 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아르메니아 유저들 사이에선 정말 유명하던데.”
알리사가 호기심이 동한 듯 말했다.
6대 길드의 수장인 것만으로도 설명이 필요하겠냐마는, 듣기로 굉장히 대단한 플레이어였다.
아르메니아 시절 랭킹 1위를 차지함은 물론, 당시 라이벌이자 현 6대 길드인 켈베로스조차도 누르고 철십자 길드를 최고의 위치에 끌어올린 장본인.
워로드가 막 시작되었을 때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녀가 랭킹 1위를 차지할 것이라 생각할 정도로 유력 후보이기까지 했다.
“대단하죠. 랭킹 1위를 차지하지 못한 걸 보고 깜짝 놀랐을 정도로. 갑자기 듣도 보도 못 한 녀석이 나타나서 그 자리를 차지할 줄이야.”
아무도 예상 못 했던 아폴리온 길드와 크루거의 등장.
이전에 플레이 했던 출신 게임조차 없는 길드와 플레이어가 워로드 최강의 자리에 가장 가까워질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들의 이야기가 나오자 알리사의 표정은 묘하게 변했다.
“뭐, 그 얘긴 됐고. 제가 직접 말해 뒀으니 잘 챙겨 줬을 거예요.”
로덴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예 성물을 찾는 걸 직접 도와 달라고 하는 건 무리라도, 어느 정도 챙겨 주기는 했을 것이다.
사람들에겐 쌀쌀맞다고 알려져 있긴 해도, 정작 자기 쪽 사람들에겐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이는 그녀였으니까.
로덴의 예상으로는 아마 에일이라면 충분히 그녀의 마음에 들었을 터였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리아가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
내심 계속 신경 쓰이던 부분이었는데, 로덴이 이 정도로까지 말하니 걱정을 거둘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또 알아요? 에일 님이라면 북부도 엘트리스처럼 만들어 놨을 지도.”
“하하… 설마요.”
* * *
혹한의 추위가 감도는 북부는 분명 다른 곳보다도 험난한 곳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은 아니었다.
굳이 북부 설원이 아니더라도 각 오지엔 극한의 환경에서도 적응해 살아남은 이들이 있었다.
물론 왕국 안쪽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수이긴 했지만, 에일은 좌표를 쫓아 깊숙이 들어가며 여러 강인한 전사 부족들과 만날 수 있었다.
갈수록 식수를 비롯한 물품들을 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아지는 탓에 그들에게서 물자를 얻어야 했다.
하지만 금화나 보석 같은 건 그들에게 소용없었다.
그러면서 보인 것이 바로 꺼지지 않는 불꽃, 성화.
신성력을 매개로 하는 힘이었기에 그 어떤 추위와 거센 바람에도 끄떡 않는 불꽃이었다.
북부에선 대부분의 날씨에 불조차 유지하기 힘든 추위와 바람이 도사리고 있었기에 많은 불편이 따랐고, 에일이 보인 것은 생각 이상으로 엄청난 것이었다.
난생 처음 보는 백색의 불꽃.
항상 추위와 싸우던 부족민들에게 이는 신의 기적과도 같았다.
‘반응이 좋을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예상보다 일이 훨씬 잘 풀렸단 말이야.’
당장 에일조차도 북부의 추위를 견디는 동안 성화를 유용하게 활용해 왔던 바.
성화를 원하는 부족들에게 그는 믿음을 갖도록 설득했다.
물론 성화를 사용할 수 있는 건 이단심판관뿐이었고, 아예 부족의 전사들을 이단심판관으로 육성시킬 생각으로 지니고 있던 성서들을 건네주었다.
물론 그들을 모두 직접 지도하기엔 시간이 많이 소모되는 탓에 한 부족만을 집중적으로 전도했고, 그는 보기 좋게 성공했다.
하지만 그들과 교류하던 다른 부족들도 성화를 발견해 서서히 퍼져 나가는 중이었다.
이런 곳에 기반 시설을 짓거나 교단의 전력으로 활용하기에는 무리겠지만, 이런 미개척지에서 이루어지는 선교는 큰 영향력의 증대를 가져왔다.
“가끔은 이렇게 바깥바람을 쐬는 것도 좋구나. 천상에만 틀어박혀 있다 보면 상당히 답답하단 말이지.”
에일의 어깨에 올라타 있는 하얀 고양이가 기분 좋은 듯 꼬리를 살랑거렸다.
고양이의 정체는 무려 빛의 여신인 루의 현신.
“정말 아무 용건도 없이 나타나신 겁니까?”
“그대가 일을 워낙 잘해 주는 덕이지. 이 정도로는 내가 가진 힘에 기별도 가지 않는구나.”
“그나저나 여신님의 상징은 하얀 늑대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소모되는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이 모습을 취한 것이거늘, 커다란 늑대의 모습을 하면 무슨 소용이겠느냐.”
루가 도도한 표정으로 답했다.
화산의 지배자, 라자갈 역시 화룡의 상징과 모습으로 유명한 신격이었지만, 지금의 루처럼 간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낼 때는 조그만 도마뱀의 모습을 한다고 한다.
자신의 상징 동물을 제외하고도, 각자가 선호하는 모습은 또 다르게 지닌 모양.
‘으음, 뭐 어쨌든…….’
원래의 목적을 상기한 에일이 시선을 옮겼다.
눈앞에 펼쳐진 지도.
웨이 스톤에게서 나온 좌표들을 토대로 성물의 흔적을 찾고 있던 에일은 지금도 거친 설산을 넘고 있었다.
다행히 지금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씨는 아니라 이동에 큰 지장은 없었다.
‘확실히… 지도 덕에 훨씬 빨라지고 있어.’
에일이 만족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지도를 바라봤다.
철십자 길드가 건네줬던 좌표와 자세한 지도 정보 덕에 예상보다 훨씬 시간이 단축되는 중이었다.
지형을 알고 지나는 것과 모르고 무작정 좌표를 쫓는 것과는 아주 차이가 컸다.
하지만 옅은 미소를 띠는 에일의 얼굴을 본 루는 한마디를 슬쩍 뱉었다.
“그 여자와 너무 가까이하진 말거라.”
“시르 말입니까?”
“그래.”
“뭔가 수상한 점이라도…….”
“아니, 그냥 마음에 들지 않는다.”
“…….”
아무래도 그녀의 발언을 아직도 마음에 담아 둔 모양이었다.
대놓고 이상한 종교라고 말을 했으니 신격의 입장에서는 그럴 만도 했다.
“그나저나 대지의 여신 쪽은 어찌할 생각이냐?”
“대지의 여신이라면… 프레이아 말입니까?”
“그래. 성물의 중요성을 모르는 것은 아닐 테지. 아무리 멍청한 그녀라도 이번 성물을 얻고 나면 더 이상 그대의 결정을 기다려 주지 않을 거다. 성물과 함께 개종하거나 아예 적으로 돌아서야 한다는 선택지를 던져 주겠지.”
“그건……!”
루의 적나라한 말에 깜짝 놀란 에일이 주변을 돌아봤다.
프레이아도 이쪽을 훤히 내려다보고 있을 텐데, 이런 주제로 이야기했다간 들통이 날 게 뻔했다.
“다른 신격들의 시야라면 이미 차단해 뒀으니 걱정 말거라.”
“아, 그렇군요…….”
그녀의 말에 에일은 그제야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보는 눈이 없다면 이런 주제라도 거리낄 것 없었다.
“아무래도 그때 가서는 해결을 봐야겠죠. 정말 성물의 핵심 파편을 넘길 수는 없을 노릇이니.”
“미래가 뻔히 보인다마는… 나중에 감당할 수 있겠느냐?”
“뭐, 어떻습니까. 결국엔 경쟁자인데.”
신격과 대놓고 척을 지게 된다는 건 절대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쪽과 깊은 계약을 맺고 편을 서게 된 이상, 어차피 다가올 일이었다.
더군다나 에일은 이미 극서 지역에서 바하무트와 결판을 낸 적이 있어 크게 두렵다거나 하진 않았다.
“잠깐.”
무언가를 느낀 루가 멈칫했다.
“왜 그러십니까?”
“불청객들이 나타났구나. 그럼 이 곳은 그대에게 맡기겠다.”
파앗!
그 말을 마지막으로 새하얀 빛이 번쩍였다.
에일의 어깨에 올라타 있던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
콰아아앙!
바닥 아래로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꼼짝 없이 튕겨져 나간 에일은 한참을 굴러 떨어져 눈 속에 파묻혔다.
날아든 투사체도 없고, 사각에서 접근한 것도 아니었다.
눈 속에 은밀히 그려져 있던 함정형 마법진.
플레이어가 오갈 것을 알고 누군가 미리 길목에 준비해 둔 함정이라는 것.
“그래, 이제 시작이라는 건가…….”
눈을 털어 낸 에일이 허리춤의 장검을 빼 들었다.
다행히 마법 저항 패시브 덕에 대미지 자체는 크게 입지 않을 수 있었다.
[‘화산의 지배자’가 갑작스러운 개입에 불만을 토해 냅니다!]
[‘생명의 어머니’가 그녀의 알량한 수작을 비웃습니다!]
[아무리 수작을 부린다고 한들 사도의 마음엔 변화가 없을 것임을 공언합니다.]
[‘빛의 심판자, 루’가 콧방귀를 뀝니다.]
루의 모습이 사라지며 간섭이 끝나자 강제로 연결이 끊겼던 신격들의 아우성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런 쪽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누가 걸려들었어!”
“바로 연락해!”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
추위를 피해 작은 동굴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마법사 무리가 나타났다.
모두 로브를 쓴 마법사인 데다가 특이한 뱀의 문양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지식의 신인 레녹스의 신도들이라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은밀한 탐구자’가 기대에 찬 눈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마침 레녹스의 메시지가 번쩍 떠올랐다.
에일이 북부의 성물을 찾아나선 자신의 신도들과 싸우게 될 상황인데도 묘한 기대감을 보이고 있었다.
정확히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동료들까지 있는 모양인데 빨리 끝내야겠어.’
연락하라는 말이 들려왔던 걸 보아 동료들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었고, 증원이 올 만큼 긴 시간을 끌리는 건 좋지 않았다.
파칭!
그들의 머리 위에 이단의 낙인이 번쩍 떠올랐다.
“다음 목적지로 가기 전에 몸이나 좀 데울 수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