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북부의 주인
바난 요새에서 최초의 성물이 발견된 이후.
성물의 흔적을 쫓던 에일은 왕국의 국경을 넘어 북부 설원에 들어섰다.
마차와 비행선 같은 교통수단은커녕 제대로 된 길조차 없으니 무작정 걷는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이종족들도 몸서리치는 왕국 밖 오지에 위치한 만큼, 더 강한 몬스터들이 계속해서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단의 낙인을 찍을 수 있는 상위 몬스터가 많아 스펙을 올리는 데에는 훌륭한 장소이긴 했다.
하지만 오지는 그만큼 위험천만했다.
전체적으로 레벨이 높고 스펙과 패턴도 까다로워, 조금이라도 긴장을 늦췄다간 목숨이 위험했다.
무엇보다 북부 설원에서 맞이하는 고난은 전투가 끝이 아니었다.
“으으, 추워!”
에일이 한껏 몸을 움츠리며 소리쳤다.
왕국 밖 설원에서는 생존도 몬스터 이상으로 큰 문제였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혹한의 추위에 에일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출발 전 고가의 최고급 방한용 망토를 구비하긴 했어도, 북부의 맹혹한 추위를 모두 막아 내기엔 무리였다.
허기와 갈증, 체온 조절 어느 하나라도 조절에 실패하면 꼼짝없이 사망하게 되는 워로드인 만큼, 지금의 눈보라는 어떤 몬스터들보다 위협적이었다.
‘국경 바깥은 지옥이나 다름없다고 이야기야 항상 들어 왔지만… 직접 겪어 보니 장난이 아니네.’
에일이 한숨을 푹 내쉬며 발걸음을 내디뎠다.
휴식처나 식량을 구하기에도 변변찮은 환경.
발이 푹푹 꺼지는 눈밭 탓에 체력 소모도 많았다.
마을이나 성채처럼 왕국 내에는 널려 있는 평범한 거점들도, 이곳에는 터무니없이 적었다.
그 탓에 에일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몬스터의 시체를 해체하고, 쉴 곳을 찾아가며 자급자족하는 중이었다.
하루 이틀 만에 돌아다닐 만한 곳도 아니었고, 이미 북부에 들어선 뒤 적잖은 시간이 소모되어 미리 준비한 물자 정도로는 부족했다.
‘그래도 무턱대고 돌아다니는 건 아니니까. 그나마 다행이지.’
에일은 지도를 활성화해 자신의 위치를 확인했다.
기밀 서고의 자료들을 모조리 뒤져 본 결과, 그는 의심 가는 몇 가지 지점들을 추측할 수 있었다.
특히 이번 성물이 오랫동안 숨겨져 있던 성지 내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아무런 연관도 없는 장소에서 잠들어 있을 리는 만무했다.
때문에 각 유적지나 성지들을 우선으로 두고 수색 작업에 나섰다.
‘하지만 평범한 지도 정보로는 역시 한계가 있어.’
에일이 자신의 지도를 바라봤다.
대부분의 지형이 밝혀지지 않고 검게 물들어 있는 모습.
국경 외 대륙 북부 지역만을 표기하고 있는 지도였으나, 정작 표기되어 있는 정보는 매우 적었다.
북부의 지리가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보니 알 수 없는 장소에 대해선 검게 표시되어 있는 것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북부 설원을 비롯한 각 오지의 끝이 어디쯤인지조차 짐작하지 못했다.
그나마 각종 정보 사이트에 발을 걸치고 있는 에일은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편이었다.
“드디어 도착인가…….”
목적지의 앞에 다다른 에일이 아래를 내려다봤다.
얕게 갈라진 협곡 사이에 위치한 옛 도시.
눈보라 사이에 사람의 흔적은 전혀 없어 거점이라고는 볼 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가 찾던 장소가 맞았다.
촤아아악!
즉시 경사를 내려간 에일은 유적지의 앞에 섰다.
이런 버려진 장소에서 몬스터들이 도사리고 있는 건 비일비재한 일.
입구 앞에서 미리 장검을 뽑아 든 채, 유적지 안으로 진입했다.
낡고 독특한 옛 양식의 건물이었지만, 세월에 무너진 것들은 극히 적었다.
“이건 역시…….”
무엇보다도 고대 엘프어가 빼곡히 적혀 있는 벽들의 존재.
그의 예상대로 지금은 에스마이어 지역의 하얀 숲에 있는 하이엘프들의 조상이 거주하던 유적지였다.
지금은 이렇듯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 되었지만, 한때 북부의 엘프들이 터를 잡았던 곳.
‘이번이 벌써 여섯 번째, 이번엔 흔적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자신이 찾고 있던 후보 장소가 맞다는 걸 확신하자, 에일이 내부를 수색하며 더욱 깊숙이 들어갔다.
성물을 찾아 헤맨 뒤, 이번이 벌써 여섯 번째로 들른 유적이었다.
지금까지는 몬스터나 시체들만 발견했을 뿐, 단서조차 찾지 못했기에 이번은 다르길 바랐다.
‘하지만 아무래도 성역은 없는 것 같네.’
안을 뒤지던 에일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바난 요새의 성지도 모두가 모르게 숨겨져 있던 만큼, 꽤 오랜 시간을 투자해 유적지를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아직 특별한 것이 발견된 바는 없었다.
[‘화산의 지배자’가 지루한 듯 하품합니다.]
[‘생명의 어머니’가 당신의 결정을 촉구합니다.]
상황이 다소 늘어지자, 그를 지켜보고 있던 프레이아가 어김없이 재촉해 왔다.
그동안 종적을 감췄던 성물들이 대륙 각지에서 나타나고, 교단들의 움직임이 심화되자 에일의 빠른 결정을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에일은 지금 답을 할 수는 없었다.
‘여기서 말했다간 뒤집어질 테니… 성물 찾는 것도 바쁜데 사건을 또 늘릴 수야 없지.’
그에게 된통 당한 바하무트를 제외하면, 라자갈을 비롯한 다른 신격들도 최초의 사도인 에일을 탐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탐내는 수준일 뿐, 이미 루와 계약을 맺은 자인 데다가 경쟁자가 많아 그 가능성이 아주 크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단순히 재미 혹은 견제에 더 큰 의미를 두고서 그를 관찰하는 것이었다.
하나 프레이아는 그가 자신에게 올 것을 당연하다는 듯 확신하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가장 강대한 세력을 가진 여신인 탓에 루조차 앞서고 있다고 여기는 것.
츠츠츠!
그때 유적지 구석에 위치한 한 건물의 내부에서 수상한 소리와 함께 녹색 빛이 흘러나왔다.
마지막으로 확인하려 했던 건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런 빛이 없었지만, 그와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반응한 것으로 보였다.
그를 발견한 에일은 마침 곤란함을 느끼던 차에 곧장 그리로 달려갔다.
[‘웨이스톤’을 발견하였습니다!]
[고대의 돌에 새겨진 특수한 힘이 작동됩니다!]
“이건…….”
건물 한가운데에 큼지막하게 박혀 있는 수수께끼의 돌.
돌로부터 흘러나오던 녹색 빛이 에일의 몸을 휘감았고, 특정 장소의 좌표가 머릿속으로 저절로 들어왔다.
그러자 에일은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생겨난 좌표가 바로 성물이 잠들어 있을 만한 위치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쿠구구구!
그때 급격히 떨리기 시작한 발밑의 대지가 요란하게 요동쳤다.
“갑자기 무슨……?”
[‘화산의 지배자’가 쾌재를 부릅니다!]
[‘은밀한 탐구자’가 새로운 상황에 흥미를 보입니다.]
[‘생명의 어머니’가 눈빛을 빛냅니다!]
당황한 에일과 다르게 신격들은 새로이 터진 사건을 반겼다.
대답을 원하던 프레이아조차도 그를 까맣게 잊고서 눈을 빛낼 정도였다.
쿠우우웅!
거대한 괴물이 굉음과 함께 땅을 뚫고 나타났다.
쩍 벌린 입으로 건물을 통째로 삼켜 버린, 270레벨의 필드 보스.
‘프로스트 웜’이었다.
“미, 미친……!”
북부 설원에서만 서식하는 포악한 괴수.
그동안 에일이 북부에서 수색을 하며 레벨이 올랐다고는 하나, 아직 184레벨에 불과했다.
이 정도 레벨 차이라면 일반 몬스터도 버거운데 필드 보스가 나타났다니, 도저히 상대가 안 될 적이었다.
키에에에엑!
땅을 뚫고 나타난 프로스트 웜이 마구 날뛰었다.
육중한 덩치와 엄청난 힘을 통해 고대 도시를 온통 박살 내며 휘저었다.
울음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고 무너진 파편이 사방에 떨어지며, 조용했던 유적지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이게 대체…….’
몸을 숙이며 달아나던 에일이 녀석을 올려다봤다.
괴물의 난데없는 등장에 당황했지만, 녀석이 날뛰는 움직임 자체는 그를 노리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단지 어떠한 이유로 인해 무척이나 화가 난 듯한 모습이었다.
‘뭐지?’
프로스트 웜의 상태창을 자세히 살펴본 에일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상하게도 녀석의 체력이 불과 10퍼센트도 남아있지 않았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녀석이 온몸에 큰 상처들을 입고 있음을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굉장히 특이한 일이었다.
아무리 인간들에겐 지옥이나 다름없는 북부 설원이라 할지라도, 270레벨의 저런 어마어마한 괴수를 상대로 큰 상처 입힐 녀석은 거의 없었다.
콰과과광!
그때 갑작스럽게 울려 퍼진 폭음.
날뛰던 프로스트 웜에게 마법 폭격이 떨어진 것이었고, 커다란 폭발들이 녀석을 휘감았다.
단숨에 5퍼센트 이하까지 떨어진 프로스트 웜의 체력.
놈의 막대한 체력을 감안하면 정말 엄청난 위력이었다.
‘이 정도 마법이라면 설마…….’
에일의 시선이 마법이 날아든 쪽으로 향했다.
협곡 위에서 나타난 여러 명의 유저.
전원이 붉은 장식이 새겨져 있는 하얀 망토와 갑옷을 두르고 있는 모습이었다.
열 명도 채 되지 않아 공격대라고 하기도 뭐한 인원이었지만, 프로스트 웜을 사냥 중인 자들이었다.
아무래도 프로스트 웜이 수세에 몰리자 레이드 도중에 땅을 파고 달아나는 도주 패턴을 보인 모양이었다.
‘북부에서 저런 괴물을 사냥하고 있을 유저들이라면 그곳뿐이지. 설마 벌써부터 마주칠 줄이야.’
철십자 길드.
2세대 게임인 아르메니아에서부터 이어져 온 유명 명문 길드였다.
6대 길드 중 유일하게 국경 밖 오지 개척을 시도한 길드이자, 북부의 지배자라 불리는 강대한 세력.
눈보라 탓에 십자의 길드 마크까지 보이진 않았지만, 특유의 복장을 보아 그들이 확실했다.
키에에에엑!
분노를 토해낸 프로스트 웜이 협곡 위를 향해 달려들었다.
녀석의 덩치가 워낙에 커, 위쪽에 서 있는 철십자의 길드원들을 얼마든지 노릴 수 있었다.
하지만 입을 쩌억 벌린 녀석이 마주한 것은 협곡 위에서 마주 뛰어든 여성이었다.
괴수의 정면으로 뛰어든 그녀는 검을 치켜든 채 스킬을 발동했다.
촤아아악!
빛이 번쩍이며 후두둑 떨어진 검은색 핏덩이들.
정면에서 뛰어든 그녀는 프로스트 웜의 기다란 거체를 단숨에 반으로 갈라 버렸다.
반으로 나뉜 괴수의 시체가 유적지를 또 한 번 파괴하며 나뒹굴었고, 뛰어올랐던 여성은 가뿐히 바닥에 내렸다.
철컥!
에일의 앞에 착지한 여성이 부드럽게 검을 거뒀다.
“당신은…….”
잿빛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아름다운 여성, 도저히 모를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그녀의 정체는 시르.
세계 랭킹 2위의 하이 랭커이자, 6대 길드 철십자의 길드장이었다.
“플레이어인가? 북부엔 뭐 하러 온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