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성물 (5)
“후아!”
겨우 성역을 빠져나온 에일이 한숨을 돌렸다.
온통 불타고 있는 성역 속에서 에일이 네슈아를 찾아 향했을 땐, 그는 이미 보스 몬스터를 쓰러뜨린 상태였다.
물론 그로서도 굉장히 힘든 싸움 끝에 쓰러뜨리긴 했다.
혼자서 녀석의 남은 체력의 30퍼센트를 모조리 공략해 낸 것이다.
역시나 대단한 실력.
그러나 보스를 쓰러뜨려 놓고도 네슈아는 이미 사방을 삼킨 성화 속에서 죽을 뻔한 위기에 처했다.
마침 에일이 절묘한 타이밍에 등장해 겨우 살아남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성역 안에서 백색 불꽃을 사용할 만한 이라고는 에일밖에 없었다.
“…….”
등 뒤에서 느껴지는 따끔한 눈총.
“상황상 어쩔 수 없었다니까…….”
「아무 말도 안 했어.」
‘그야 당연히 아무 말도 안 했겠지.’
네슈아의 눈초리에 에일은 땀을 삐질 흘렸다.
말도 없이 반대편에서 불을 질러 둔 탓에 꼼짝없이 성화에 구워질 뻔했으니, 원망을 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곧 어깨를 으쓱인 네슈아는 양피지를 끄적였다.
「싸움은 이걸로 마무리되겠지.」
“그래.”
바하무트가 꾸민 월드 이벤트.
이번 수까지 그들에게 저지당한 이상, 더 이상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강대한 신격이라고 해도 영향력 없이는 지상에 관여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비장의 수인 성물까지 탈취당했으니 완전히 끝이 났다고 봐야 했다.
「그러면 더 이상 볼일은 없어. 나는 먼저 간다.」
“어디로 가게?”
「하던 일을 계속해야지.」
“아직 그쪽은 해결이 안 된 건가. 하긴…….”
그의 말에 에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던 일이라 하면 다크 엘프와의 분쟁을 말하는 것일 테고, 한 세력과의 다툼이란 쉽게 끝날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6대 길드가 직접 나섰으니 곧, 쉽게 끝나겠네.”
어둠 숲의 다크 엘프들은 이번 월드 퀘스트에서 오른 왕자 측과 깊숙이 연관되어 있었다.
오른 왕자는 6대 길드를 쓸어버린 뒤 대의회의 의견을 자신의 쪽으로 돌리려 했고, 그 사실은 최근 에일에게 발각되어 당사자들에게 그대로 알려졌다.
즉, 그와 함께하던 세력이라면 이번 월드 퀘스트에서 6대 길드를 적으로 돌리게 된 셈.
하지만 네슈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곤 종이에 마지막 메시지를 끄적이고는 휙 던진 뒤 등을 돌렸다.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에일은 방금 얼결에 받은 종이를 펼쳐 내려다봤다.
「이번 월드 퀘스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이게 무슨 말이지……?’
월드 퀘스트가 끝나지 않았다니.
에일은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았다.
6대 길드가 모조리 나선 상황에, 왕자 측이 움직이는 외부 세력들 정도를 저지하지 못할 리는 없었다.
그런데 모두 끝난 게 아니라니, 단순히 시간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 건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었다.
스윽.
길을 걷던 네슈아는 물건을 품속에서 꺼내 들었다.
“…….”
8번째 성물 파편.
에일이 얻었던 6번째, 7번째 파편과는 또 다른 성물의 조각이었다.
이곳 성역에 있던 파편은 사실 2개가 아니라, 총 3개의 조각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수색 중이던 신도들은 물론, 에일을 통해 성역을 지켜보던 다른 신격들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성물을 얻고 함께 바깥으로 빠져나온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신격이 모든 것을 내려다볼 수는 없다 하더라도 같은 공간을 주시하고 있는 신격들의 눈을 속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네슈아는 그것이 가능했다.
굳은 침묵을 대가로 얻는 그림자의 힘.
고요와 어둠, 침묵의 신인 ‘힌’의 특별한 가호가 있었기에.
[신격, ‘어둠 속 관조자’가 자신의 사도를 바라봅니다.]
* * *
[월드 이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바하무트의 음모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신도들에 맞서 방어에 성공한 플레이어들에게 큰 보상이 주어집니다!]
[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대량의 골드를 획득하였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상위 권속 아그리아가 소멸된 이후.
그간 끈질기게도 공격하던 물의 교단은 단번에 뜻을 단념하고 물러났고, 방어 측의 월드 이벤트는 성공적으로 끝나게 되었다.
퀘스트에 동원된 대부분의 신도가 격파되고, 투자했던 막대한 영향력까지 소실되었다.
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심한 타격이었고, 바하무트는 당분간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못할 것이다.
전쟁을 당한 블랙번 길드도 피해를 많이 입긴 했지만, 이번 월드 이벤트의 보상으로 대부분 피해는 벌충이 가능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에일님!”
이벤트가 끝나 떠날 시간이 다가오자, 블랙번의 길드장이 직접 나서 에일에게 인사를 전해 왔다.
그들이 권속이나 성지 등에 대해선 아직도 모르고 있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에일 덕에 완전히 뒤바뀐 전황에 대해서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물의 교단의 공격이 시작된 뒤, 버거운 적을 맞이한 블랙번이 아무런 행동도 안 했던 게 아니었다.
그동안 무슨 소리를 해도 협상이 통하지 않던 혈맹 길드를 에일이 설득해서 돌아왔으니, 블랙번 측에선 큰 은혜를 입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에일뿐만 아니라, 전투를 도와준 로덴이나 다른 파티원들까지 길드장이 직접 찾아가 여러 차례 감사를 전할 정도였다.
게다가 블랙번뿐만이 아니었다.
대규모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자 불만이 터진 물의 교단 내부에서 유저들의 정보가 조금씩 유출되었고, 거기엔 혈맹 길드의 영지마저도 모두 칠 것이었다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자 혈맹 길드 측 관계자도 뒤늦게 에일에게 사과와 감사 인사를 전하러 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하지만 괜히 생색낼 필요야 없지.’
성물을 손에 넣은 지금.
에일에게 굳이 남들의 시선을 끌면서 오래 남아 있을 생각은 없었다.
가급적 빨리 교단에 복귀하려는 생각뿐이었다.
띠링!
그때 시스템 알림이 도착했다.
‘벌써 팔렸구나!’
메시지를 확인한 에일은 곧장 거점의 경매장으로 달려갔다.
싸움이 끝난 뒤 거래소에 등록해 두었던 녹터눔의 판매가 이루어졌다는 알림이었다.
그동안 나이트메어와 여명 길드 간의 전투로 인해 시세는 오를 만큼 오른 상태였고, 이제 새로운 변수가 발생하기 전에 안전하게 익절을 놓을 타이밍이었다.
[아이템, ‘녹터눔’의 판매금이 수령되었습니다!]
[수령할 골드의 양이 너무 많아, 자동으로 창고로 전송되었습니다!]
‘엄청나잖아…….’
그의 수중에 들어온 돈은 무려 ‘55만 골드’.
처음 투자한 수만 골드의 단위가 한방에 바뀌는 마법이었다.
블랙번 길드에서 본인들의 거점에서는 경매장의 길드 수수료도 면제해 준다고 한 덕에, 10퍼센트에 달하는 수수료를 아낄 수 있었다.
‘이제 이걸 어떻게 쓴다. 감사를…….’
에일이 침을 꼴깍 삼켰다.
설마 자신이 이런 돈을 만지게 될 줄이야.
현물로 따졌을 때 억 단위를 넘은 돈을 들고 있자니, 진땀이 삐질 흐를 정도였다.
‘오래간만에 고기도 사 먹고… 이만하면 방 정도는 바꿔도 괜찮겠지……?’
머릿속으로 이루어지는 행복한 상상.
왠지 헛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 * *
어둠이 가라앉은 깊은 숲속.
칙칙한 분위기의 장소와 맞지 않는 귀족적인 옷차림을 망토 아래 가린 남자가 나타났다.
신발에 묻은 진흙에 남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나를 이런 곳까지 불러내다니.”
그의 정체는 무려 왕국의 왕자인 오른.
오른은 이 너저분한 장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질척한 바닥과 볼썽사납게 부러진 나무.
이렇다 할 수행원도 없이 찾아올 곳이 아님은 물론, 지금처럼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결코 발도 들이지 않았을 곳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무슨 소리를 하려고 온 거냐?”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자에게 오른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얼굴을 가리려 후드를 뒤집어쓴 여성.
그녀의 보랏빛 로브엔 초승달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오래간만에 보는 얼굴인데 너무 그러지 마시죠, 오른 왕자님. 잘생긴 얼굴이 구겨집니다.”
결사단의 일원, 뮤트.
그녀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오른을 반겼다.
“어서 용건이나 말해라. 너 따위와 농담이나 주고받을 기분은 더더욱 아니니까.”
“그러시다면야… 뭐, 왕자님도 아시다시피 상황은 좋지 않습니다. 6대 길드가 움직인 뒤부터 거의 모든 움직임이 차단되었으니까요.”
“그래, 그거야 당연히 그렇겠지.”
오른이 코웃음을 치며 빈정거렸다.
잠시 경멸 섞인 표정을 지은 그는 뮤트가 입을 떼기 전에 곧장 말을 이었다.
“나는 네놈들에게 금지된 마법에 대한 탄압을 멈추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리고 반항적인 이종족 녀석들에겐 왕국이 가하던 제약을 풀어 준다고 내 인장까지 찍어 주었지. 이게 다 왕위를 얻어 주겠다는 너희의 말을 믿고서 기꺼이 위험을 감수한 거다. 그런데 이제 와서 어떻게 됐지?”
그녀에게 한발 다가선 오른은 크게 소리쳤다.
“상황은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어! 아니, 오히려 세이아 그 가증스러운 년이 나를 압박해 들어오고 있다! 지금이라도 왕위를 포기하면 목숨은 살려 주겠다고! 직접 말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협박이나 다름없어. 자, 이제 나에게 뭘 더 요구할 거지? 악마와 계약이라도 하라고 할 거냐?”
쩌렁쩌렁 숲이 울린 뒤에도 오른의 화가 가라앉지 않은 듯, 씨익거리는 숨소리가 이어졌다.
6대 길드가 결사단의 움직임을 알아챈 이후, 모든 게 틀어졌다.
그들이 꾸미던 모든 음모가 족족 막히고, 상황을 움직이기 위해 매수했던 외부 세력들은 하나둘 궤멸되는 중이었다.
아무리 6대 길드라 해도 혐의만으로 왕족을 직접 건드릴 수는 없는 일.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의 수족을 다 도려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네놈들이 그깟 일 처리 하나 제대로 못 해서……!”
“너무 흥분하지 마시고 진정하세요, 왕자님. 기껏 우리 모두에게 좋은 소식을 가져왔는데 말입니다.”
팔을 들어 올린 뮤트는 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좋은 소식이라고……?”
스륵.
그때 누군가 그림자 속에서 나타났다.
후드를 쓴 남자.
그가 후드를 벗자 얼굴이 드러났다.
“너… 너는……!”
기겁한 오른이 주춤 물러섰다.
아폴리온의 길드장, 크루거.
아폴리온이라면 그 유명한 6대 길드 중 하나, 그것도 대륙 동부의 대다수 영지를 장악해 가장 강대한 세력을 뽐내는 길드였다.
무엇보다 크루거는 워로드 랭킹 1위로서 최고의 명성을 누리고 있는 자였다.
워로드의 유저들뿐만 아니라, 왕족인 오른에게조차도 명성이 자자한 최고의 플레이어.
오른의 얼굴은 한순간에 창백해졌다.
그의 길드를 무너뜨리려 했으니, 당장 이 자리에서 자신을 해하려 들지도 몰랐다.
어지간한 세력이라면 왕족인 자신을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즉시 궤멸되겠지만, 아폴리온 길드라면 달랐다.
그를 죽이지만 않는다면, 공주를 등에 업는다는 가정하에 뒷수습도 충분히 가능했다.
하지만 정작 크루거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정반대였다.
“6대 길드를 무너뜨릴 만한 음모라니… 진작 말을 하지 그러셨소? 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