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성물 (4)
[루의 중위 권속 ‘에포나’가 강림하였습니다!]
찬란한 빛과 함께 나타난 루의 권속.
보주를 사용한 에일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그녀가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두 쌍의 날개를 펼쳤다.
백색의 검과 갑옷을 두른 발키리.
‘이것이 여신의 권속…….’
앞에 나타난 에포나의 모습에 에일이 넋을 잃고 바라봤다.
하나 바하무트의 권속인 아그리아는 그녀의 등장을 반기지 않았다.
“다시 사라져라!”
콰드드득!
그녀가 서리가 담긴 창을 휘둘렀다.
어느새 200레벨을 넘어선 아그리아의 창격은 굉장한 위력을 띠고 있었고, 엄청난 냉기가 그들을 향해 뻗어졌다.
창격에 닿을 모든 것을 얼려 버릴 기세.
스릉!
무표정한 에포나가 검을 뽑아 들었다.
불꽃이 튀며 검집에서 뽑힌 그녀의 검은 강렬한 성화를 방출했다.
콰아아아!
크게 휘둘러진 불꽃의 검.
폭발하는 화염이 그들을 집어삼키려던 냉기를 모조리 상쇄시켜 버렸다.
그로 인한 후폭풍에 주위의 신도들이 모두 휩쓸려 날아갔고, 에포나는 두 쌍의 날개로 에일을 감싸 피해를 받지 않도록 보호했다.
“큭…….”
“에일 님, 수고하셨습니다.”
그를 보호하느라 가까이 다가서게 된 에포나가 말을 건네 왔다.
그러자 에일은 화들짝 놀라 그녀를 바라봤다.
권속이 자신에게 존대를 하다니.
아무리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사도라도, 그들에 비하면 결코 그런 지위가 아니었다.
교단을 대표하는 집행관의 경우 조금 더 대우를 해주었지만, 그렇다 해도 지상을 초월한 그들이 더욱 상위의 존재임은 변하지 않았다.
“여신께선 에일 님을 특별한 분이라 하셨습니다. 그분을 모시는 자로서 당연히 갖춰야 할 자세지요.”
그녀가 에일의 기색을 눈치챈 듯 말했다.
‘혹시 최초의 사도라서 그런 건가…….’
루가 영향력에 허덕였을 때부터 사도로 지정받아 활약해 온 에일이었으니, 어쩌면 그에게 조금 더 대우를 해주는 것일지도 몰랐다.
이 추측이 맞다면 묘하게 뿌듯해질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한가하게 그런 걸 생각하고 있을 만큼, 지금의 상황이 그리 좋진 않았다.
“날 막기엔 이미 늦었다. 중위 권속인 네 놈이라면 더더욱!”
아그리아의 검은 눈이 스산한 기운을 내비치며 빛났다.
그녀의 힘이 발산되었고, 창에 맺힌 서리와 주변을 얼렸던 얼음들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훨씬 더 강한 기운을 지닌 한기가 공간 전체를 장악했고, 날개를 펼쳐 보호하던 에포나를 통째로 얼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그 말대로야.’
주변을 둘러싸는 핏빛 얼음에 에일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그리아는 적응기를 갖추며 200레벨대에 진입한 데 반해, 에포나는 이제 막 지상에 현신한 상태였다.
심지어 둘은 권속으로서의 격조차 차이가 나는 상황.
긴 의식까지 치러가며 대교구장의 몸에 현신한 상위 권속 아그리아와 비교가 될 리 없었다.
인제 와서 루의 권속을 소환해 냈다 해도, 상황이 극적으로 뒤바뀌기 바라는 건 무리였다.
하지만 담담한 표정의 에포나는 얼음을 비집고 날개를 서서히 펼치기 시작했다.
“이제 저에게 맡기시면 됩니다. 조금 과격해지겠지만…….”
두 손에 힘을 모은 에포나가 보호의 힘이 담긴 빛을 그에게 건넸다.
빛은 곧 둥글게 형상을 띠었고, 에일을 감싸며 방어막을 만들어 냈다.
쩌엉!
네 날개를 완전히 펼친 에포나가 얼음을 깨고 나왔다.
서리의 창과 불꽃의 검이 부딪혔고, 충격파가 터져 나와 에일을 튕겨냈다.
그를 지키는 빛의 힘 덕에 충격을 입지는 않았지만, 주변의 신도들은 이미 싸움의 여파만으로 전멸한 지 오래였다.
쩌억!
에포나의 주먹이 아그리아의 얼굴에 꽂혔다.
그리곤 주먹을 한차례 더 밀어붙여, 휘청이는 상대를 그대로 바닥에 꽂아 넣었다.
콰앙!
아그리아가 꽂힌 바닥이 둥글게 박살 나며 커다란 흔적이 남았다.
거대한 괴수가 날뛰면서도 결코 부서지지 않던 성지의 바닥이 맥없이 산산조각 난 것이다.
급속도로 줄어든 아그리아의 체력.
그야말로 엄청난 괴력이었다.
조금 전 무기를 겨룰 때부터 에포나 쪽이 점점 밀어붙이더니, 전투를 완전히 압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떻게……?”
창을 휘둘러 간신히 거리를 벌린 아그리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처음 예상과는 다르게 상황이 좋지 않았다.
“설마…….”
‘그렇게 된 거였나.’
놀랍도록 발현된 그녀의 힘에 그들은 동시에 상황을 눈치챘다.
바하무트의 계획하에 아그리아가 지상에 내려온 방식은 성물의 힘을 빌렸음에도 간단하지 않았다.
영구적으로 지상에서 활동하기 위한 실체를 얻은 뒤에 이루어진 현신이었다.
그렇기에 대교구장의 육체를 희생양으로 쓴 것을 비롯해, 더욱 복잡한 의식 과정과 긴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나 지금 앞에 나타난 에포나는 일시적인 현신일 뿐.
임의로 활동할 육체를 만든 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사라질 육신이었다.
그런 방식으로 현신한 권속은 지상에서 오래 버티지 못했다.
하지만 그 덕에 상황은 바뀌었다.
필멸자의 몸을 빌리지도 않았고, 지상에 맞는 몸을 억지로 짜 맞춘 것도 아니었다.
적응의 시간이 전혀 필요가 없다는 것.
지상으로 강림할 때 거쳐야 할 필수적인 약간의 제약을 제외하면, 스스로 가진 본연의 힘을 온전히 가진 채 내려왔다는 뜻이다.
콰악!
날카로운 창격에 에포나의 왼팔이 잘려 나갔다.
하지만 그녀의 팔은 순식간에 재생되었다.
아직 완전하지도 않은 아그리아의 힘으로 그녀를 소멸시킬 힘을 발휘하긴 무리였다.
“그 모습으로는 몇 분도 버티지 못할 거다!”
이미 본연의 형상을 하고 있는 에포나와 달리, 아그리아는 아직 인간의 몸에서 진체를 드러낼 수조차 없었다.
만약 힘이 제대로 자리 잡을 때까지 시간을 끌며 버티기만 한다면, 결국엔 아그리아가 에포나를 압도할 것이다.
하지만 그걸 막기 위해 내려온 것이 바로 그녀였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콰아앙!
막대한 성화가 쏟아지며 전방을 휩쓸었다.
창을 들어 올린 아그리아는 간신히 그 충격을 흡수해 냈다.
하지만 그 틈에 날개를 펼쳐 코앞까지 다가선 에포나는 단숨에 그녀의 두 팔을 잘라냈다.
꼼짝없이 팔이 떨어져 나간 탓에 그녀는 창을 놓쳐 버렸고 큰 빈틈이 생겼다.
콰악!
뻗어진 에포나의 손이 아그리아의 목을 움켜잡았다.
당장에라도 부러질 듯이 우드득 소리가 났다.
“커헉… 조금만 더 있으면……!”
아그리아가 고통스럽게 신음을 흘렸다.
목이 부러지지 않게 버티며, 어떻게든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비틀고 발버둥 쳤다.
하지만 모두 부질없는 일.
그녀를 높게 들어 올린 에포나는 양팔을 뻗었다.
“끄아아아악!”
두 손에 힘을 가한 에포나는 아그리아를 반으로 찢었다.
맨손으로 이루어진 처형.
정체 모를 붉은 핏덩이들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멀찍이서 지켜보던 에일조차 순간 기겁했을 정도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정작 피를 온통 뒤집어쓴 에포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그 여신에 그 권속이라는 건가…….’
아름답고 잔인해 손속에 자비가 없었다.
발키리의 모습을 띤 권속다웠다.
[‘화산의 지배자’가 바하무트의 한심한 실패에 기쁨을 참지 못합니다!]
[‘은밀한 탐구자’가 즐거운 여흥이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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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판난 승부에 신격들의 반응이 올라왔다.
다른 이도 아니고 신격의 상위 권속을 지상에 영구 소환하려 했다니.
성공했다면 이번 월드 이벤트를 뒤집는 것은 물론, 권속까지 전력에 추가하며 큰 성과를 챙겼겠지만, 욕심이 과했다.
다른 신격들이 모두 바하무트를 경계했던 것도 이해가 갔다.
[공용 공헌도 +4,000]
[공용 공헌도 +1,500]
[공용 공헌도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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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격들이 제각각 보낸 공헌도 후원 메시지.
바하무트와 원수지간인 라자갈은 보상을 약속했던 대로 무려 4천 포인트나 건넸고, 에일이 자신의 사도가 될 거라 굳게 믿는 프레이아도 큰손을 보였다.
“빛을 따르는 첫 번째 사도여, 성물을 회수해 교단에 가져가십시오. 새로운 장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으니.”
에포나가 그를 향해 마지막 말을 전했다.
그녀는 찬란한 빛과 함께 사라졌고, 빛이 사라진 자리에서 성물의 파편이었던 보주가 스르륵 떨어져 내렸다.
타악!
에일의 손에 쥐어진 보주.
[바하무트의 상위 권속 ‘아그리아’를 저지하였습니다!]
[여신의 총애 +10.00% (현재 139.72%)]
[빛의 교단 공헌도 +25,000]
[신앙심 스탯 +25]
[광기 스탯 +25]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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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들의 향연.
직접 해치운 것이 아님에도 굉장히 많은 보상이 주어졌다.
특히 총애도는 100퍼센트를 초과하면서 갈수록 올라가는 수치가 적어지기 시작했는데, 이번은 무려 10퍼센트가 한 번에 올라갔다.
‘레벨도 한 번에 4나 올라갔고, 고생은 했지만 그 이상으로 대박인걸. 무엇보다 아직 가장 큰 게 남아 있으니…….’
에일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처참히 죽어 있는 아그리아에게서도 회수할 아이템이 있었다.
[고대 성물의 여섯 번째 파편을 발견하였습니다!]
[사도 ‘에일’의 발견으로 신격 ‘빛의 심판자’가 막대한 영향력을 획득하였습니다!]
또 다른 성물 파편.
이번엔 하얗게 빛나는 단검 모양의 아이템이었다.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파편… 원래 하나였던 성물은 오래전 유일신이 사라지며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고 했었지.’
성물을 내려다본 에일이 기억을 상기시켰다.
하지만 그 이상의 이야기는 그다지 알려진 바 없었다.
단지 워로드에 흔히 넘쳐나는 헛된 전설로 생각해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던 정보인 데다가, 자세히 알아보려 해도 정보가 워낙 한정되어 있었다.
“흐음…….”
화르르륵!
그사이, 느닷없이 성화의 불길이 엉망이 된 홀 내부로 들이닥쳤다.
에포나가 쏟아낸 불길은 그녀가 사라지며 함께 모습을 감춘바.
시간을 벌기 위해 에일이 성수까지 뿌려 가며, 곳곳에 지펴 놓은 성화들이 이곳까지 번진 것이다.
이곳까지 들이닥쳤다는 건, 사실상 성역 전체가 불타는 중이라는 것.
‘그래도 급할 건 없지.’
에일에게는 아무런 걱정도 없었다.
자신이 지른 성화는 그에게 아무런 위해도 끼칠 수 없었다.
느긋하게 걸어 나가도 불타 죽을 걱정은 없다는 것.
오히려 남아 있던 물의 교단 잔당들을 모조리 태워 버린 뒤엔 알아서 잠잠해질 것이니 더 나았다.
“마, 맞다! 그러고 보니…….”
순간 생각이 번뜩 떠오른 에일이 그 자리에서 굳었다.
정신없이 싸우느라 까맣게 잊고 있던 네슈아.
처음 진입했을 때 소리로 파악해 둔 바에 따르면, 이곳 반대편에서 보스와 격렬히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둘이서도 애를 먹던 상대였는데 혼자서 상대하기엔 더욱 어려웠을 터.
얼굴이 창백해진 에일은 그가 있을 방향으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