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강의 폭군 (5)
“교단의 집행관이 여기는 어쩐 일로 찾아왔지? 블랙번의 용병 노릇을 하러 온 건 아닐 테고…….”
혈맹의 길드장, 지옥혈검 듀크.
협상 자리의 한가운데에 앉은 그가 에일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 옆에 자리한 자는 혈맹의 부길드장, 사자법사 볼튼.
처음 접하는 이들은 이상하게 느낄 수 있겠지만, 오래전부터 쭉 불려 온 별칭이라고 한다.
린에이지의 랭커들로도 유명한 그들을 마주하게 된 에일은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이번 월드 이벤트에서 의심이 갔던 정황부터 다음에 노려질 목표 그리고 그들을 막아 내려면 함께해야 한다는 것까지.
교구장에게서 얻은 지령서까지 내놓으며 사실을 전했다.
물론, 그들의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겠는데… 이걸 어떻게 믿지?”
듀크는 받아 들었던 지령서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극서 구역의 모든 영지를 공격할 것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긴 했지만, 위조해 만들어진 문서라고 의심하는 것이었다.
특별한 장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 내용의 지령서야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물론, 이 정도는 충분히 예상 범위 안이었다.
“난 블랙번 길드와 아무 관계도 아니야. 내가 뭘 위해서 거짓말을 하겠어?”
“그야 경쟁 교단을 막기 위해서겠지.”
듀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무리 내가 교단의 관계자가 아니더라도, 그 정도 분간도 하지 못할 것 같았나?”
최근 교단 간에 경쟁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쯤은 그 역시 알고 있었다.
갑자기 이쪽 지역까지 찾아온 이유도 경쟁자의 입장에서 물의 교단을 방해하기 위해 온 것일 터.
그렇다면 바하무트의 월드 이벤트가 성공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를 속이려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아니, 오히려 그쪽에 더 무게가 실렸다.
혈맹을 속여 이용한다면 훨씬 수월하게 그들의 행동을 저지할 수 있을 테니까.
“메시지에 분명히 적혀 있었듯이, 놈들이 노리는 건 어디까지나 블랙번의 영지다. 설령 정말 우리까지 노린다 해도 블랙번을 상대하느라 힘이 빠진 상태에선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어. 오히려 월드 이벤트의 보상까지 받겠지.”
‘하아…….’
에일이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바하무트가 노리는 것도 바로 그런 생각이었다.
아홉 영지가 무너진 뒤 정말 그들이 신도들을 막아 낼 수 있다 해도, 바하무트는 이미 첫 번째 월드 이벤트의 성공을 통해 영향력을 더 얻은 상태일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 시점까지 가 버린다면, 다른 지역의 신도들까지 추가로 불러 모아 혈맹 길드를 밀어 버리는 것쯤은 일도 아닐 것이다.
아직 신격과 영향력에 관해서까지 아는 이는 아주 극소수였고, 교단의 일원도 아닌 듀크 역시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최근 네가 큰 길드들과 거래하고 다녔단 소식은 들었다. 꽤 신뢰성이 있던데… 혹시 모르니 당장은 병력을 물리는 것 정도는 가능해. 하지만 그 이상은 무리한 요구다. 고작 그런 이유로 경쟁 길드를 위해 두 팔 걷고 나설 순 없지.”
용건이 끝났다는 듯 듀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말대로 블랙번은 그간 혈맹과 전쟁도 몇 차례나 치러 온 경쟁 길드였다.
그런 놈들을 무너뜨릴 절호의 기회에, 단지 외부인인 에일의 말만을 믿고서 길드를 움직일 순 없었다.
느닷없이 블랙번과 손을 잡는다면 길드원들의 반발도 엄청날 터.
‘역시, 이 정도로는 안 통한다는 건가.’
어찌 보면 그들의 입장에서는 믿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모든 유저에게 목표 지역이 뜬 이상, 당연히 급한 상황을 모면하려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엮여 있는 이해관계 탓에 자신이라도 쉽사리 믿지 못했을 상황.
이미 답을 정해 놓은 상대를 설득하기는 무리였다.
듀크가 회의장을 나서기 전, 에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에일’ 님이 결투를 신청하였습니다! (Y/N)]
“무슨…….”
듀크의 앞에 떠오른 하나의 메시지.
뜬금없는 일대일 결투 신청에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뭐 하자는 거지?”
“이대론 답도 안 나올 텐데. 길게 말할 것 없이 깃발이나 꽂자는 거지.”
“나와 결투라도 하자는 건가?”
“아니, 그것하고는 조금 다르지.”
에일이 원하는 것은 평범한 결투가 아니었다.
결투의 결과에 따라 캐릭터의 존폐를 거는 플레이어 간의 진정한 승부.
“캐삭빵이나 붙자고.”
“뭐, 뭐야……!”
그를 언급한 에일의 말에 볼튼이 깜짝 놀라 두 눈을 치켜떴다.
기본적으로 ‘결투 신청’ 시스템을 통해 플레이어 간에 합의된 결투는 승패가 가려지기만 할 뿐, 사망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캐삭빵의 경우 이야기는 180도 달라졌다.
결투에서 패배한 쪽이 캐릭터를 아예 삭제하게 되는 결투.
단순히 죽음을 통한 사망 페널티가 아닌, 스스로 캐릭터를 삭제해 그동안 쌓아 온 모든 것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캐삭빵의 무게란 아무 때나 함부로 꺼내 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 이길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있을 때 혹은 깊은 원한 관계에 찼을 경우에나 벌어지는 일.
“지금 장난하는 건가?”
듀크는 불쾌해하는 기색도 없이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최근 실력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에일이라 해도, 아직 상위권 플레이어들에 비하면 레벨이 부족했다.
더군다나 린에이지 최강의 유저로 불리던 듀크는 무려 240레벨대의 준랭커급 플레이어.
그 레벨 차이를 메꾸는 건 무슨 일이 있어도 불가능했다.
당연히 승패야 뻔한 일.
미치지 않고서야 그의 입장에서 먼저 제안을 해 올 수 없었다.
하지만 에일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장난 아닌데.”
에일은 이곳에 오기 전부터 진심으로 승부수를 던질 생각이었다.
본래 캐삭빵은 유저들 간의 합의일 뿐.
시스템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신뢰도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만약 패한 쪽이 져 놓고도 캐릭터를 삭제하지 않고 도망간다면, 시스템적으로 무언가 제제를 가할 수는 없었다.
물론 도망간 쪽이 두고두고 주변에 망신을 당하긴 하겠지만, 캐릭터가 더 소중하다는 이도 많아 종종 볼 수 있는 일이었다.
하나 지금은 달랐다.
듀크는 최근 이름을 떨치고 있는 대형 길드의 마스터였고, 에일 또한 빛의 교단을 대표하다시피 하는 네임드 플레이어였다.
버틴다고 해도 캐릭터를 삭제하는 것만 못할 만큼 심각한 이미지 타격을 입게 되고, 어지간해서는 약속을 어길 수 없었다.
자신의 목숨뿐만이 아닌 한 집단을 책임지고 있는 입장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내가 그런 내기를 받아 줄 이유가 있나? 방해할 생각이라면 당장에라도 여기서 제압하면 그만인데.”
듀크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이곳은 혈맹 길드의 본거지.
그것도 경쟁 길드와 살벌한 전쟁을 치르기 위해, 한데 모인 길드원들로 가득한 곳이었다.
여기서 그가 손짓 한 번이면 에일의 목은 저항할 것도 없이 단숨에 날아갈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에일은 오히려 과감한 말을 던졌다.
“말도 제대로 못 알아듣더니, 결투에 자신이 없나 보지? 하긴 아이템 떡칠이나 해 대는 길드의 수장이라 이상할 건 없지.”
빈정거리며 던져진 가벼운 도발.
그를 들은 듀크와 볼튼의 표정이 일순간에 굳어졌다.
혈맹의 길드원들은 전체적으로 경제력이 뛰어나 항상 많은 자본을 투자했고, 다른 유저들에겐 장비발이라며 좋지 않은 눈총을 받았다.
물론 에일은 듀크가 상당한 실력을 지닌 유저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워로드에서 단순 재력이나 장비발만으로 실력을 뽐내는 건 불가능한 이야기.
단순히 위력을 더해 주고 전투에 도움이 되는 정도일 뿐, 결국엔 본인의 실력만큼 중요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에일은 린에이지 시절에서부터 그런 여론이 계속해서 그들을 괴롭혀 왔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은연중에 가지고 있을 콤플렉스를 긁어 준다.
“왜? 아이템에 레벨 차까지 겸하고도 이길 자신이 없나? 원한다면 장신구라도 빼놓고 싸워 줄 수도 있어.”
“이 개자식이……!”
길드장인 듀크를 바라보며 건넨 말.
하지만 오히려 지켜보고 있던 볼튼이 탁자를 뒤집으며 다가섰다.
“볼튼, 뭐 하는 거냐?”
“고작 저딴 녀석한테 길드장이 나설 것도 없습니다. 나와라! 혈맹의 힘을 똑똑히 가르쳐 주마!”
발끈한 볼튼이 이성을 잃고 회의장을 나섰다.
그는 여태 피도 안 마른 애송이들이 되도 않는 소리를 하며 도발을 해 올 때마다 가차 없이 깔아뭉개 왔다.
다신 발컨들이 되도 않는 편견으로 자신의 혈맹원들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이번의 경우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겨우 저런 도발에 걸려 주다니…….”
듀크는 밖으로 뛰쳐나간 볼튼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그리고 에일을 향해 말했다.
“처음부터 저 녀석을 도발한 거겠지?”
“글쎄…….”
피식 웃은 에일은 무기를 챙겨 들었다.
그의 말대로 듀크가 아닌 볼튼이 나설 것까지 모두 예상 범위 안이었다.
대형 길드의 중요 인물에 대한 성향쯤이야 당연히 손쉽게 파악할 수 있었고, 볼튼이 먼저 나설 거라는 걸 예상하기란 아주 쉬운 일이었다.
“협상을 하러 와서 갑자기 결투라니…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볼튼을 도발한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분명 그가 처음 겨냥했던 듀크에 비해 한참 못 미치는 게 맞았다.
만약 그대로 듀크가 결투를 수락했다면, 에일은 어떠한 승산도 찾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볼튼이 약한 유저라는 건 아니었다.
200레벨을 넘는 강력한 마법사 유저인 동시에, 결투에도 충분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자였다.
일반적으로 캐스팅 시간이 필요한 마법사는 일대일에 절대적으로 불리한 직업인 것은 기본 상식이었다.
하지만 소규모 교전이나 결투에 충분히 신경 써 둔 스킬 트리를 짜 맞춰 둔 경우, 이야기는 달라진다.
대응력을 높이고 근접 클래스를 견제하기 위한 즉발 캐스팅 및 저코스트 마법들.
볼튼이 바로 그런 스킬들 위주의 세팅을 해 둔 마법사였고, 충분한 대비를 해두었음은 물론, 오히려 근접의 카운터 격인 세부 직업군의 소유자였다.
투기장 고레이팅 보유자이기도 했으니 실력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에일은 조금도 그런 상대를 껄끄러워하지 않았다.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
그들은 간과하고 있었지만, 플레이어가 활용할 수 있는 무기는 스펙과 실력뿐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