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강의 폭군 (4)
푸욱!
“커허억……!”
날카롭게 파고든 에일의 검이 복부를 관통했다.
긴 싸움의 끝, 성화를 머금은 장검에 배가 뚫려 버린 교구장은 힘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꼼짝없이 빈사 상태에 빠진 그는 에일에게 완전히 제압당한 상황이었다.
“생각보다 까다로웠어. 자, 이제 알고 있는 걸 다 말해 줘야겠는데.”
“꺼… 져라.”
교구장은 단칼에 거절했다.
신앙심으로 똘똘 뭉친 자들답게 역시나 쉽사리 말할 리가 없었다.
입을 꾹 닫은 그의 모습은 어떠한 고문을 해도 흔들리지 않을 굳건한 신념을 내보이는 것만 같았다.
물론, 그것은 어느 정도의 범주일 때의 이야기.
“이런 걸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쿠웅!
에일은 곧바로 형벌 집행 스킬을 발동했다.
루의 문양이 새겨진 화형대가 바닥에서 솟구쳤고, 그는 창백하게 질린 교구장을 사슬에 묶은 뒤 불을 놓았다.
어떻게든 달아나려 발버둥 쳤지만, 부질없는 몸부림일 뿐이었다.
“끄아아아악!”
일렁이는 불꽃.
가득한 비명 소리.
성화에 휩싸인 교구장은 극심한 고통에 빠져 격렬히 죽어 갔다.
하지만 이 정도야 에일에게는 늘상 겪는 일상일 뿐.
그리 편하게 죽게 내버려 두진 않았다.
파아아앗!
교구장을 감싼 치유의 빛.
에일이 가진 지속 치유 효과의 신성 마법이었고, 구도자의 열성 스킬을 얻은 뒤 위력이 훨씬 강해진 스킬이기도 했다.
목숨이 끊어지려던 그의 생명력이 다시 차올랐다.
지속 치유에 상처가 아물고, 다시 녹아내리기를 반복했다.
역시 바하무트의 신도.
그것도 교구장쯤 되는 자라 그런지 치유 효과가 엄청나게 잘 적용됐다.
거기다 아슬아슬하다 싶을 땐, 회복 포션까지 먹여 주며 그를 치유해 주었다.
그는 죽지도 못하고 끝없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럼…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말하라고.”
에일은 마음 편히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이대로 교구장의 생각이 바뀌는 것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 * *
[이단을 처단하였습니다!]
비명을 지르다 못해 지친 신음과 함께 기나긴 고문이 이루어졌다.
역시 아무나 교구장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인지, 그는 좀처럼 쉽게 정보를 털어놓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끝없는 고통 속에서 한계가 있기 마련.
끝내 버티지 못한 교구장은 자신이 알고 있는 교단의 정보를 모두 토해 냈다.
그러고 난 뒤에야 에일은 그에게 죽음을 허락했고, 이렇게 새까만 시체만 남게 되었다.
절그럭!
화형대에 다가간 에일은 그의 시체를 끌고 가 강 속으로 내던졌다.
쇠사슬에 묶여 가라앉는 교구장의 시체.
‘시간이 조금 오래 걸렸어. 역시 이런 쪽은 영 안 맞는다니까.’
무언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에일은 갑자기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의식이 끝날 시간인데도 소환수가 나타나지 않자, 물의 교단 측 신도들이 상태를 확인하러 온 것이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가오는 신도들.
에일은 서둘러 무성한 수풀 속으로 빠져 몸을 숨겼다.
“교, 교구장님!”
“어디 계십니까!”
폭포 아래에서 의식을 치르고 있어야 할 교구장은 감쪽같이 모습을 감춘 뒤였다.
심지어 곳곳에 격렬한 전투의 흔적까지 남아 있는 상황.
신도들이 주위를 수색하며 한적하던 폭포 아래는 떠들썩해졌다.
‘그나저나 역시 바하무트는 혈맹 길드의 영지까지 노리던 거였어.’
숨을 죽인 에일은 교구장이 뱉어낸 정보들을 머릿속에 새겼다.
이번 월드 이벤트의 목표는 메시지에 나타났던 9개 영지뿐만이 아니라는 것.
그렇지 않아도 에일은 블랙번 길드 하나 밀어 버리는 데, 이 정도 병력을 동원하는 것은 조금 과한 감이 없잖아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한 가지 가설을 세웠었다.
욕심 많은 바하무트가 아예 극서 지역 전체를 노리고 있을 수 있다고.
악명 높은 멸망의 신격답게 일부가 아닌 구역 전체를 쓸어버리려는 속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방금의 자백을 통해 에일의 그런 예상은 적중했다.
‘블랙번과 혈맹 길드는 경쟁 관계다. 하지만 처음부터 두 길드를 모두 쓸어버린다며 월드 이벤트를 띄웠다면 힘을 합쳐 대항했겠지.’
두 길드가 연합하게 된다면 골치가 아파질 것은 당연한 일.
그렇기에 바하무트는 목표의 일부만을 우선 띄워 놓은 것이다.
그리곤 블랙번의 아홉 영지를 먼저 격파한 뒤, 극서 구역의 남은 영지와 함께 혈맹 길드까지 쓸어버릴 셈이었다.
‘두 길드가 힘을 합치게 만들어야 해. 하지만 최소한의 물증은 있어야겠지.’
에일은 교구장을 쓰러뜨리고 얻은 아이템을 확인했다.
[교구장의 첫 번째 지령서]
교단의 계획이 담겨 있는 지령서.
이는 그중 첫 번째 문서로 월드 이벤트에 참여한 신도들의 수와 대략적인 계획에 관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정작 에일이 원하는 정보에 대해선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이번 원정에 참여한 교구장들이 각자 지령서를 가지고 있다고 했어. 그중에 하나겠지.’
혈맹 길드를 조금이라도 설득하기 위해선, 다음 목표 지역에 대해 적혀 있는 지령서를 챙겨야 했다.
‘남은 교구장 수는 여섯이라고 했지. 신도들이 공격받고 있다는 걸 눈치채기 전에 빨리 끝내야 하는데.’
교구장들이 노려지고 있다는 걸 눈치채면 심각한 지장이 생길 터.
과연 혼자서 시간 안에 교구장들을 모두 쓰러뜨리는 게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부스럭!
수풀을 헤치고 네슈아가 나타났다.
물의 교단이 아닌 그림자 교단의 신도.
너무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당황한 에일은 너무나도 당당히 서 있는 네슈아를 끌어당기려 했다.
“일단 몸부터 숙… 저쪽은 언제 처리한 거야?”
에일이 비참히 널브러진 시체들을 바라봤다.
폭포를 수색하던 신도들은 모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암살당했다.
심지어 에일은 그가 놈들을 처리하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동안에도 인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자신의 감각이 이전보다 훨씬 발전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놀라운 그의 솜씨였다.
“여긴 어쩐 일이야? 너도 이번 월드 이벤트를 막으러 온 건가?”
에일의 물음에 네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침묵’의 페널티를 지고 있어, 말을 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분명 자신을 배신한 다크엘프들을 상대하고 있던 그였지만, 바하무트가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움직임을 보이자 에일처럼 이벤트를 막기 위해 찾아왔다.
“그렇다면 잘됐네. 녀석들을 막기 위해 날 좀 도와줘야겠어.”
그의 말없는 대답에 에일이 화색을 보였다.
은신과 암습에 능숙한 도적 클래스인 네슈아가 도와준다면 일이 훨씬 쉬워질 것이다.
하지만 그가 교구장들의 지령서에 대해 미처 설명하기도 전.
「지령서라면 이미 찾았다.」
양피지에 글씨를 끄적인 네슈아는 이미 모아 둔 6개의 지령서를 인벤토리에서 쏟아냈다.
그중엔 교구장의 마지막 지령서까지 있었고, 바하무트가 내린 진짜 목적에 대해 적혀 있었다.
“허…….”
단숨에 상황이 일단락되자 에일이 황당하게 그를 바라봤다.
이걸 모았다는 건 다른 교구장 여섯을 모두 큰 소란도 없이 암살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
역시 이런 쪽으로 전문인 ‘그림자 파수꾼’ 클래스답게 엄청난 모습이었다.
‘어쨌든 이걸로 기본적인 증거는 찾아낸 셈이네… 물론 이것만으로 믿어 줄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없는 것보단 나을 테니.’
「어서 돌아가지.」
“그래.”
고개를 끄덕인 에일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당장 소환수를 불러내던 일곱 교구장을 모두 제거했으니, 전장의 상황도 이전보단 훨씬 나아질 것이었다.
이제 다시 돌아가 방어 측에 서도록 혈맹 길드를 설득할 일만 남았다.
‘협상이 원만히 잘됐으면 하는데… 어쩌면 조금 과격해질지도 모르겠어.’
* * *
“놈들이 몰려왔다!”
“전투 준비!”
성채에 틀어박혀 방어에 전념하던 블랙번 길드엔 또다시 비상이 걸렸다.
물의 교단과는 또 다른 새로운 세력이 병력을 이끌고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유저 사이에서 펄럭이는 붉은 깃발.
그 가운데에는 혈맹 길드의 강렬한 문양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런… 벌써 시작된 건가?”
적진을 빠져나와 ‘몰락자의 성채’로 돌아온 에일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막 거점에 다 도착했던 참이었는데, 그를 반긴 건 두 군세가 험악하게 맞물려 있는 광경이었다.
“단결!”
“단결!”
공성을 준비 중인 무리에서 들려오는 외침소리.
바하무트의 신도들이 정비를 위해 잠시 물러선 것과 대비되어, 혈맹의 길드원들이 한데 모여 진을 치고 있었다.
역시 이번 기회를 살려 경쟁자인 블랙번을 완전히 무너뜨리려는 속셈이었다.
‘이대로 부딪쳤다간 답도 없어진다.’
두고 볼 수 없는 상황에 에일은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여기 잠깐 기다리고 있어. 지령서는 내가 가져간다.”
「어떻게 하려고?」
“대화로 해결해야지.”
성큼성큼 나아간 에일은 주저하지 않고 혈맹 길드 쪽으로 다가섰다.
신원도 확실하지 않은 이가, 한창 전쟁을 준비 중인 길드에 다가서는 건 목숨이 걸렸을 만큼 위험한 일.
첩자로 의심받았다간 당장에라도 목이 날아갈 수 있었다.
당연히 혈맹 측 길드원이 아닌 에일은 그를 막아선 길드원들에게 위협적인 제지를 받았다.
하지만 에일은 창으로 둘러싸인 상황에서 오히려 당당히 그들의 길드장을 보러 왔다고 전했다.
“어디서 본 거 같은 얼굴인데…….”
“맞다, 빛의 교단의 에일이잖아?”
네임드 플레이어인 에일의 얼굴을 알아본 혈맹 측 길드원들이 수군거렸다.
소식을 전한 길드원들은 곧 그를 길드장에게 데려갔고, 워로드에 얼굴이 알려져서 손해 볼 일은 없다는 것을 새삼 체감했다.
물론 그것만으로 길드장을 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에일은 더 이상 단순한 네임드 플레이어가 아닌, 빛의 교단의 최고위직인 집행관이었다.
대형 길드의 수장이라 해도 결코 쉽게 볼 수 없는 위치.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건 물론이고, 찾아온 것만으로 직접 길드장이 나와 봐야 할 만한 건수였다.
‘역시 다들 장비가 상당한데.’
에일은 안으로 들어가며 지나치는 혈맹의 길드원들을 슬쩍슬쩍 살펴보았다.
혈맹은 2세대 가상현실게임인 ‘린에이지’ 출신 유저들이 뭉쳐 조직된 길드였다.
다소 나이대가 높은 길드원이 많고, 보통의 유저들보다 끌어올 수 있는 재력이 있어 고가의 장비를 착용한 자들이 많다더니 정말 그 말 그대로였다.
최근 급격히 힘을 불리며 극서 지역의 영지들까지 얻더니, 지역 강자 수준의 세력으로 치고 올라가는 중이라는 길드.
길드원들의 단합력과 재력 덕에 급성장한 그들의 상승세는 꽤나 놀라울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 상황에서 물의 교단을 이용해 블랙번과 적대하는 건 그들 입장에서도 치명적인 악수였다.
‘만약 대화로 안 된다면, 어떻게든 말을 듣게 할 수밖에.’
은근한 긴장감 속에 에일은 발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