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강의 폭군 (3)
“교구장을 노린다니… 정말 저 속으로 들어가려고요?”
로덴이 깜짝 놀라 물었다.
방금 나온 에일의 발언 때문이었다.
“지금 상황을 뒤집으려면 어쩔 수 없으니까요.”
바하무트의 교구장.
빛의 교단과는 다른 구조를 지니고 있는 물의 교단 내에서 간부 격의 중요 직책이었다.
NPC까지 동원된 이번 원정에 당연히 여럿 포함되어 있었고, 신도들을 통솔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그들은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전장에선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아마 지금도 후방에서 소환수들을 불러내고 있겠지.’
빛의 교단에 이단심판관이 있듯, 교구장을 비롯한 물의 교단의 전용 직업은 소환에 강점을 지닌 직업이었다.
물론 일곱 교단의 전문 직업 중 하나답게 전투력도 출중하게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교구장들은 지휘도 겸하고 있었기에, 후방에서 계속해서 소환수를 불러낸 뒤 전장에 투입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교구장쯤 되는 이들이 의식까지 겸해 불러내는 고레벨 소환수들은 상대하는 입장에선 굉장히 큰 골칫거리였다.
그렇기에 에일은 놈들을 칠 생각이었다.
직접 전선에 뛰어드는 것이 아닌, 바하무트의 군세가 자리한 후방으로 파고들어 놈들을 제거하려는 것.
적진 한복판에 들어서는 것이니 위험할 것임은 당연했다.
하지만 로덴은 그것에 대해 놀란 게 아니었다.
“설마 이번 이벤트를 정말 저지할 생각이었어요? 당연히 저는 어느 정도 방해만 하다가 빠질 생각인 줄 알았는데…….”
이곳으로 함께 찾아와 바하무트와 맞서는 것은 이미 합의된 사항이었다.
하지만 정말 월드 이벤트 자체를 진심으로 막아설 생각일 줄은 몰랐다.
최대한 물의 교단의 힘을 빼놓고, 거점이 함락되는 시점을 지연시키는 것이 목적일 거라고 생각했던 로덴이었다.
이렇게 대규모 PVP에서 활약하며 얻을 수 있는 보상도 상당했으니, 적당한 선에서 벗어난다 해도 충분한 이득을 챙길 수 있어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다.
“저도 이번 선택은 의외네요.”
알리사도 옆에서 거들었다.
지금의 전력 차는 누가 보더라도 뒤집기가 힘들었다.
심지어 전력의 차이뿐만 아니라, 주변 상황도 방어 측 길드를 도와주지 않았다.
바로 옆에 위치한 혈맹 길드에서 돕는다면 모를 일이었지만, 그들이 가만히 있어도 경쟁 길드를 무너뜨릴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어… 저희 공격을 막으러 온 거 아니었나요?”
그 와중에 리아만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파티원들을 번갈아 돌아봤다.
아직 상황 파악에 서투른 그녀는 오히려 이번 이벤트를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온 듯했다.
“저는 교단에 몸을 담은 입장이라서 말이죠. 사정이 있어 어떻게든 블랙번 측이 무너지지 않도록 막아 내야 합니다. 어느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 하죠.”
“하지만, 교구장들을 쓰러뜨리는 것만으로 상황이 급변하지는 않을 거예요.”
알리사가 말했다.
틀린 것 없이 전적으로 맞는 말이었다.
고레벨의 소환수를 계속해서 보내오는 게 골치 아프긴 했지만, 그걸 막는다고 해도 전황 자체가 뒤바뀔 묘수는 아니었다.
분명히 도움이야 되겠지만, 당장 싸움의 규모가 워낙 큰지라, 그 정도 수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게… 따로 생각 중인 게 있습니다.”
소환을 막기 위함도 있지만, 에일이 교구장을 잡아내려는 진짜 이유는 그들에게서 정보를 캐내기 위함이었다.
‘수상쩍은 부분이 있어.’
당장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교구장을 붙잡아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잘만 하면 전황을 뒤집을 수 있는 정보.
궁금증을 참지 못한 로덴이 빼액 소리쳤다.
“아, 궁금한데 그냥 저희한테도 말해 줘요!”
“괜히 보채지 마세요. 뭔가 생각이 있으시겠죠.”
피식 웃은 알리사가 그를 진정시켰다.
그동안의 신뢰와 무언가 또 보여 줄 거라는 기대감에 묘한 웃음이 그녀의 입가에 지어졌다.
“하하… 나중에 확신이 생기면 말해 드리죠. 그럼 전 먼저 움직여 보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가장 급한 몰락자의 성채 쪽을 부탁드릴게요.”
“음? 저희는 같이 안 가나요?”
“이런 잠입에서 여럿이 다니는 건 오히려 방해만 되니까요.”
리아의 물음에 알리사가 설명을 해주듯 말했다.
바하무트의 광신도들로 가득 차 있을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인 만큼, 인원은 가급적 적은 편이 좋았다.
괜히 돕는다며 우르르 몰려다니다간 발각당하기 마련이었다.
“그럼…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 * *
빽빽한 식물들로 가득한 울창한 숲속.
수풀 속에서 튀어나온 에일이 순찰 중이던 신도의 목을 찔렀다.
콰악!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쓰러진 신도가 바닥에 엎어졌다.
목격자는 단 한 명도 없었고, 에일은 그의 시체를 끌어 수풀 속에 숨겼다.
‘그냥 지나치자니 아쉽긴 하지만, 요란하게 시선을 끌 수는 없지.’
에일은 미련 없이 곧바로 자리를 옮겼다.
적진 사이로 진입한 뒤 그동안 기척을 죽이며 다니고 있는 동안, 수많은 바하무트의 신도를 마주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 후방에도 상당한 수의 신도들이 가득했다.
‘당장 공격을 막아 내는 것만 해도 벅찬 상황인데, 후방에서도 이 정도 규모라면… 블랙번 길드만으로는 절대 버틸 수 없어.’
더 깊은 곳까지 찾아와 목격함으로써 보다 더 확실해졌다.
블랙번의 힘만으로는 절대 방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만약 일이 뜻대로 안 풀리면… 아예 빛의 교단이 개입하지 않는 이상, 막아 내지 못하겠어.’
하지만 빛의 교단이 개입하는 일은 가급적 피하고 싶었다.
교단과 교단의 대결로 번지면, 상당한 피해를 보는 건 불가피했다.
특히 싸움이 길어지며 전력이 소모될수록, 지켜보고 있는 다른 교단에게 좋은 일을 해주는 꼴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눈치 싸움만 하고 있다가 손을 놓게 된다면, 결국 바하무트가 아무런 방해도 없이 선두로 치고 나가게 되는 셈.
일이 복잡해지지 않으려면 자신의 선에서 끝내야 했다.
‘교구장을 서둘러 찾아야지.’
발걸음을 재촉한 에일은 계속해서 강과 샘이 있는 곳을 위주로 숲을 돌아다녔다.
그들이 벌이는 소환 의식에 도움이 될 만한 위치.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물이 많은 곳에 자리 잡았을 터였다.
그리고 바쁘게 뛰어다니며 마주한 폭포 아래.
드디어 소환 의식을 치르고 있던 교구장을 목격했다.
집중을 위해서인지 마침 주변에 호위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에일은 곧장 투척 단검을 던졌다.
카앙!
눈치챈 교구장이 스태프를 휘둘러 단검을 튕겨냈다.
아무런 데미지도 주지 못했지만, 그가 치르고 있던 소환 의식은 방금 완전히 취소되어 무위로 돌아갔다.
“거의 다 끝나 가던 참이었거늘… 고작 사람 하나 보낸다고 날 쓰러뜨릴 수 있을 줄 알았나!”
그가 외치며 스태프를 내리찍었다.
그러자 뒤편에서 폭포의 물이 일렁이며 솟아났다.
콰아아아!
떠오른 대량의 물줄기는 한데 뭉쳐졌고, 곧 완전한 거인의 형상을 띠었다.
소환된 물의 정령의 주먹이 에일에게로 향했다.
콰과광!
주먹 한 방에 땅이 뒤집히며 파편을 튀겼다.
급히 몸을 피한 에일은 단숨에 녀석의 스펙을 가늠했다.
상당히 강한 소환체.
‘하지만 할 만해!’
지금 나타난 물의 정령은 오랜 의식을 통해 소환된 것이 아닌, 단지 스킬을 통한 나타난 녀석이었다.
그동안 전장에 보내졌던 보스급 소환수는 아니라는 것.
화르륵!
에일의 검에서 하얀빛의 성화가 피어올랐다.
그를 본 교구장은 그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챘다.
“네놈, 루의 이단심판관이었나! 어째서 우리를 방해하는 거냐!”
“심판관이 움직일 이유야 하나뿐이지.”
에일은 교구장을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네가 이단이니까.”
[이단으로 지정되었습니다!]
파칭!
이단지정으로 인해 생겨난 이단의 낙인이 교구장과 정령의 머리 위에 생겨났다.
에일은 곧바로 발을 박차 거리를 좁혔다.
돌진기를 사용한 것도 아니었음에도, ‘비정한 추적자’ 패시브의 효과로 순식간에 접근할 수 있었다.
급히 움직인 물의 정령이 에일을 저지하려 팔을 뻗었다.
하지만 에일은 역극을 통해 단숨에 놈의 뒤로 향했다.
콰과과과!
내리찍힌 일섬이 정령을 관통했다.
검격이 등에 기다란 상처를 남겼고, 불꽃이 녀석을 휘감았다.
하지만 정령의 체력을 확인하자 기대했던 것만큼 강력한 데미지를 주진 못했다.
‘역시… 속성 때문인가.’
물의 정령을 휘감았던 성화는 어느새 크게 약해져 있었다.
원래의 위력만큼 제대로 된 데미지를 주진 못하는 모습.
콰아아아!
그때 옆에서 빠르게 뻗어져 온 거대한 파도가 에일을 휩쓸었고, 그는 충격에 한참을 나가떨어졌다.
시간이 끌린 사이, 교구장이 쏘아낸 강력한 공격 마법이었다.
물의 교단의 전용직업인 ‘파도술사’.
파도술사 특유의 폭넓은 수속성 마법과 소환 마법은 워로드 내에서도 굉장히 독특한 구성을 가지고 있었다.
파아앗!
교구장이 또다시 캐스팅을 시작했다.
다음 공격 마법을 시전하기 위함이었다.
그러자 에일은 주문을 견제하기 위해 검을 휘둘러 불의 세례를 뿜어냈고, 강력한 성화가 그를 집어삼키려 뻗어졌다.
하지만 교구장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치이이익!
앞을 막아선 정령의 팔에 불의 세례가 간단히 막혔다.
분명 성화는 루의 축복이 담긴 신성한 불꽃.
물을 끼얹는다 해도 보통의 불처럼 쉽게 꺼지지 않는다.
하지만 상대가 조종하는 파도 역시 보통의 물이 아니었다.
콰아아앙!
아무런 방해 없이 캐스팅이 끝난 그의 마법이 막대한 물을 뿜어냈다.
전방을 가득 메울 만큼 거대한 파도가 뻗어져 나왔고, 에일은 겨우 몸을 구르며 피했다.
“이런……!”
“포기해라! 불꽃은 파도를 이길 수 없다!”
교구장이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바하무트의 가호가 깃든 파도가 다른 불꽃에 밀릴 리는 없었고, 이미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일의 입가엔 가소롭다는 웃음이 걸렸다.
“미안하지만… 난 빛의 교단이지, 불의 교단을 따르는 게 아니거든.”
콰악!
그가 거꾸로 치켜든 검을 바닥에 힘껏 내리찍었다.
하늘 위에 생겨난 눈부신 빛.
유일 등급의 신성 마법, ‘징벌’이었다.
콰아아아!
빛이 모여 만들어진 거대한 징벌의 검이 아래로 찍혔다.
피할 새도 없이 빛의 검에 꿰뚫린 정령은 단번에 형체를 잃고 사라졌다.
버틸 수 없는 막대한 데미지.
에일이 지닌 스탯 중 가장 높은 ‘신앙심’을 바탕으로 한 공격 스킬이었다.
그가 가진 유일한 유일급 공격 스킬이기도 했다.
“이… 이단심판관이 어째서 이만한 신성 마법을……?”
믿기지 않는 광경에 교구장이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들이 신성 마법을 보조 수단을 사용하는 것쯤이야 알고 있었다.
허나 지금 벌어진 일은 그의 상식을 벗어난 일이었다.
“그게… 어쩌다 보니 잡캐가 되어 버려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