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강의 폭군 (2)
[월드 이벤트가 발생하였습니다!]
“…….”
신격 바하무트가 움직인 월드 이벤트가 모두의 앞에 나타났다.
목표가 된 곳은 대륙의 서부 끝자락에 위치한 아홉 거점들.
대륙의 경계 밖 오지인 사막 지역에 인접한 데다가, 6대 길드인 아폴리온와 켈베로스 사이의 접경 지역이기도 했다.
‘극서 구역.’
지도로 위치를 확인한 네슈아가 이름을 떠올렸다.
서부 끝자락에 위치한 30여개의 중소 거점들을 통틀어 묶는 명칭이었다.
근방에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접근이 불리해 지리적 위치도 영 좋지 않은 곳.
그 탓에 다른 곳에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12강이나 6대 길드도 비용을 감수하며 손을 뻗지 않았다.
하나 워로드의 영지란 막대한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고, 영지가 없던 다른 수많은 대형 길드들이 치열한 전투를 벌여가며 차지하려 했다.
그렇게 모두를 물리치고 영지를 얻어낸 길드는 단 두 곳.
블랙번과 혈맹 길드.
치열한 경쟁 끝에 다수의 영지를 차지한 그들은 극서 구역을 절반씩 차지해 나누고 있었다.
‘확실히……. 월드 이벤트의 표적으로 삼기엔 안성맞춤이군.’
동원된 신도의 숫자로 보나, 노려진 거점의 수로 보나.
빛의 교단이 움직였을 때보다 더 큰 규모인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12강 길드를 상대했던 것보단 오히려 더 쉬운 상대였다.
악마와 내통한 영주를 징벌하기 위해 교단을 움직인 루와 다르게, 바하무트는 그런 명분에 매달리지 않은 덕이었다.
선택지가 더 넓으니 머리를 굴린 바하무트가 비교적 약한 세력의 영지들을 노리고 교단을 움직였다.
‘게다가 표적이 된 장소는 모두 블랙번의 영지뿐, 그들로서는 버티지 못하겠지.’
이번 월드 퀘스트에서 지정된 거점들은 오직 블랙번 길드의 소유뿐이었다.
인접한 혈맹 길드의 영지들은 대상에서 모두 제외되어 있었다.
바하무트가 두 길드를 동시에 상대하는 일 없도록 영악하게 머리를 굴린 것이다.
물의 교단 측에선 안 그래도 대립하고 있는 두 길드의 관계를 이용하기에 딱 좋은 상황이기까지 했다.
터억!
네슈아가 왼손에 들려 있던 남자의 목을 바닥에 내던졌다.
잘린 목은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갔고, 곧 목이 없는 싸늘한 시체와 부딪혀 멈췄다.
원래 목이 붙어 있던 몸통이었다.
‘이번 수를 막으려면 싸움만으로는 안 된다.’
물의 교단 측 사제를 붙잡아 정보를 빼낸 네슈아.
그는 이번 수확으로 무언가 냄새를 맡았고, 더 정보를 캐낼 필요성을 느꼈다.
[‘어둠 속 관조자’가 침묵을 지킨 채 당신을 주시합니다.]
네슈아를 지켜보고 있는 신격의 메시지가 스쳐 지나갔다.
* * *
은둔자의 관문.
워로드 극서 구역에 위치한 조그만 소형 거점 중 하나였다.
방랑자의 마을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해 원래 큰 수요가 있는 거점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적대 세력의 큰 공격을 받고 있었다.
콰과과광!
연달아 양쪽에서 쏟아지는 마법에 숲이 쉴 새 없이 흔들렸다.
“어떻게든 막아 내!”
“여기서라도 승기를 잡아야 한다!”
블랙번의 길드원들이 고함을 치며 바하무트의 신도들과 맞섰다.
거점의 방어 시설이야 어차피 미미했고, 거점 내 시설들이 피해를 입기 전에 미리 숲으로 요격하러 나선 것이다.
하지만 이곳을 비롯한 길드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겨우 버티고 있다고는 하나, 수많은 신도가 한데 모인 물의 교단에게 밀리는 중이었다.
아직 싸움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는 걸 생각하면 상당히 암울한 상황이었다.
“젠장, 여기서도 이렇게 숫자 차이가 나는 건가.”
조금씩 밀리는 상황에 블랙번의 간부가 이를 갈았다.
그를 포함해 관문으로 이어지는 길목의 방어를 맡았던 블랙번 측 길드원은 총 80여 명.
그에 반해 상대는 130명 가까이 되는 수가 길목 확보를 위해 본대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그만큼 다른 전장이 유리해진다면 모를까, 다른 곳이라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전체적으로 밀리는 상황은 사실 당연한 것이었다.
대지 교단, 불의 교단, 그리고 물의 교단.
원래 이 세 교단이 바로 워로드의 3대 메이저 교단이었다.
단지 빛의 교단이 치고 올라오며 굳건했던 세 번째 서열로서의 위치가 흔들렸을 뿐.
이제는 4번째 규모긴 해도 물의 교단의 규모가 줄어든 게 아니라, 빛이 교단이 급격히 세력을 불린 것뿐이었다.
여전히 큰 규모를 자랑하는 바하무트의 신도들은 두 개 이상의 지역에서 소집되었고, 유저가 아닌 NPC들까지 동원되었다.
‘거기다 총애도의 보너스가 생각보다 큰 차이를 만들어 낸다.’
기본적으로 세력 간 다툼의 전장에서는 다수가 맞부딪히는 만큼, 필연적으로 장기적인 싸움이 이어졌다.
그리고 물의 교단은 그런 싸움에 임할 때 상당히 좋은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신격의 총애도에 따라 치유, 재생력에 보너스를 받는다는 것.
총애도 관리를 개판 쳐 놓은 게 아닌 이상, 모든 신도들이 그에 대해 보너스를 받고 있었고 전투 지속력에 굉장히 뛰어났다.
이런 혼란한 대규모 전쟁에서 회복력은 굉장히 큰 강점이었다.
치유 포션들도 물의 교단 제는 따라잡을 수가 없기로 유명했고, 싸움이 길어질수록 유리한 고지에 서는 것이 바로 물의 교단의 군세가 가지는 큰 이점이었다.
“커헉……!”
“젠장!”
관문을 맡았던 블랙번 측의 길드원은 벌써 서른 명 가까이 쓰러졌다.
승산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간부의 입에서 퇴각 명령이 떨어지기 직전.
콰과과과광!
느닷없는 대형 마법이 전장 한가운데를 휩쓸고 지나갔다.
화염계 공격 마법, 파멸의 불씨가 숲 한쪽을 집어삼킨 것이다.
이번 관문 방어 임무를 나선 블랙번의 길드원 중에 저런 마법을 배워둔 자는 없었을 터.
콰악!
“끄아악!”
전장에 난입한 두 남자가 바하무트의 신도들을 공격하며 휩쓸었다.
간결한 동작과 민첩한 움직임으로, 창과 검이 휘둘러지며 유혈이 낭자하는 모습.
처음 보는 이들의 등장에 깜짝 놀란 간부는 그들을 바라봤다.
빛의 교단 최고의 네임드 플레이어, 에일.
거기에 아르메니아 출신의 전 하이 랭커, 로덴까지.
두 명의 유명 플레이어는 상황을 빠르게 반전시켜 나갔고, 다른 편에선 또다시 거대한 마법이 날아들었다.
콰과과광!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유성우’.
절묘한 위치에 내리꽂힌 운석이 폭발하며, 미처 범위에서 피하지 못한 바하무트의 신도들을 모조리 쓸어 버렸다.
무려 유일 등급의 대형 공격 마법.
거기다 캐스팅에 엄청난 시간을 요구하는 만큼, 적중했을 때 입힐 데미지야 말할 것도 없었다.
“이게 무슨…….”
간부가 벙한 채 자리에 멈춰섰다.
한 번 시전하는 것만 해도 벅찰 대형 마법들을 연달아 쏘고 있는 말도 안 되는 상황.
심지어 그녀는 여태 얼굴도 전혀 알려지지 않은 정체불명의 플레이어였다.
“제, 젠장! 저 마법사부터 노려!”
갑작스런 개입에 혼란에 빠졌던 신도들이 정신을 차렸다.
바하무트 측 암살자가 스킬을 사용해 모습을 감춘 뒤, 단숨에 리아가 서 있는 쪽으로 달려들었다.
아무리 뛰어나도 한들 후방의 마법사라면 근접전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폭격기나 다름없는 그녀를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하지만 그조차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휘릭!
빠악!
알리사의 스태프에 맞아 튕겨져 나간 암살자.
대강 상황을 눈치챈 블랙번의 길드원들이 서둘러 다가와 그를 처리했다.
“이쪽 마법사님을 보호해!”
“잠깐, 저기 뒤쪽……!”
퍼억!
은신술을 활용해 뒤편에서 달려든 또 다른 도적.
하지만 이번에도 알리사에게 턱을 얻어맞고는 한참을 나가떨어졌다.
물의 교단 측에선 어떻게든 리아를 쓰러뜨리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그 옆의 힐러인 알리사가 오히려 달려든 신도들을 간단히 제압해 가며 그녀를 보호했다.
“믿기지가 않는군…….”
고작 한 파티 단위밖에 안 되는 4명의 유저로 이루어진 증원.
하지만 그들의 실력은 이루 말할 것 없이 놀라웠다.
에일을 비롯해 그동안 쌓아올린 팀원들의 스펙은 더 이상 앞서 시작했던 다른 유저들과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았다.
물론 준랭커나 그에 근접한 상위권 유저들에 비하면 아직 갈 길이 멀었다.
하지만 아이템과 스킬을 고려하면 대형 길드의 일원들을 대상으로 평균을 따져도 밀리지 않을 수준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실력’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서걱!
달려들던 전사 둘의 목을 동시에 벤 로덴이 창을 빙글 돌렸다.
“하하, 샛길이라 그런지 빡센 상대는 없는 것 같고. 이제 한 마흔 정도 남았네요.”
“그러면…….”
콰악!
에일이 뒤편에서 다가온 무도가를 단칼에 베었다.
“빠르게 마무리하죠.”
* * *
숲속에 가득 널브러진 신도들의 시체.
한때 치열했던 싸움은 일행의 개입 이후 순식간에 마무리되었다.
‘역시 같이 올 수 있었던 건 운이 좋은 거였어.’
에일이 느긋하게 잡담 중인 파티원들을 돌아보며 생각했다.
원래 월드 이벤트를 목격한 그는 곧장 홀로 극서 구역으로 향하려 했다.
하지만 마침 인던을 끝낸 파티원들이 그와 합류할 수 있었고, 기꺼이 그를 도와주려 함께 전장에 찾아왔다.
이런 유의 월드 이벤트가 발생한 경우, 교단이나 상대 세력에 아무런 상관이 없는 유저라 해도 반대 측에 합류할 수 있었다.
활약에 따라 그만큼 큰 보상이 주어졌기 때문에, 어지간한 퀘스트 이상으로 보상을 챙길 수도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막아 낼 수 있을 때의 이야기.
‘하지만…….’
전투를 승리했음에도 에일의 표정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 온 뒤로 바하무트가 동원한 신도들의 전력에 대해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숫자가 너무 많아…….’
물의 교단 측 NPC까지 일부 동원되어 엄청나게 모인 신도들.
방금의 전투에서 활약하며 압도적인 모습을 보인 것은 맞았다.
하지만 이곳은 그저 소규모 전장일 뿐이었다.
이곳 은둔자의 관문도 단순히 길목의 역할만 할 뿐, 이전에 봤던 나이트메어의 칼페아 관문과는 상대도 안 될 만큼, 극히 조그마한 거점이었다.
제대로 많은 병력이 모여 노린 것도 아니고, 단지 길목 중 하나를 차단한 것에 불과했다.
이번 월드 이벤트는 블랙번 길드가 감당하기는 벅찬 스케일이었고, 전선 전체가 밀리고 있는 상황.
에일과 파티원들이 끼어든다고 해도 크게 변할 건 없었다.
‘단지 전장에 끼어 싸우는 것만으로는 상황을 뒤집을 수 없다. 이걸 해결할 방법이라면… 다소 모험수를 던지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