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강의 폭군
‘여기도 어느새 많이 바뀌었네.’
노움의 도시에 들어선 에일이 주변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지상의 전쟁을 피해 아래로 내려온 지 벌써 한 주가 넘게 지난 지금.
그가 성장을 하러 바쁘게 뛰어다는 동안에도, 여신을 향한 엘트리스의 맹목적인 신앙은 더더욱 깊어져만 갔다.
당장 이 도시만 해도 벌써 세 번째 루의 신전이 세워졌다.
‘이쪽엔 여태 제대로 된 신이 없어서 그런가, 한 번 믿기 시작하니까 엄청나단 말이지.’
지하의 모든 종족이 열렬히 숭배에 힘을 쏟고 있는 상황.
거기다 엘트리스의 노움들은 지상에서의 인간처럼 가장 개체수가 많은 종족이었다.
비교적 덩치가 작긴 하지만, 손재주가 좋은 덕에 루를 기리기 위해 아름다운 예술품과 웅장한 건축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터엉!
건물 안으로 들어선 에일은 괴물의 목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놨다.
검은 피가 묻어 긴 탁자에 얼룩이 졌지만, 그 앞에 앉아 있던 작은 노움은 그를 반기며 벌떡 일어났다.
“오셨군요!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여기 의뢰했던 녀석의 목입니다.”
“예, 확실히 확인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에일 님!”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보상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보상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좋았어.’
이번 퀘스트를 완료하며 에일은 160레벨을 달성했다.
그 말은 즉, 16번째 스킬을 배울 때가 왔다는 것.
“여기 이번 의뢰의 보상입니다!”
커다란 책들을 지고 뒤뚱뒤뚱 걸어온 노움이 순간 비틀거렸고, 에일은 서둘러 그에게 다가가 책을 받아 주었다.
붉은빛이 깃든 스킬북 3권.
어중간한 보스 하나 잡아낸 것치고는 괜찮은 보상이었다.
평소에 그가 상대하던 보스들에 비하면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던 수준이기도 했고.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조심히 가세요!”
손을 흔드는 노움을 뒤로하고 에일은 건물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곤 그동안 퀘스트를 깨고, 보스 잡으며 착실히 모아 뒀던 스킬북들을 인벤토리에서 꺼내 들었다.
얼마 전, 150레벨을 달성한 뒤에 공란이 생겼던 15번째 스킬이야 이미 확보해 둔 상태였다.
남은 스킬북의 개수도 넉넉하고, 16번째 스킬 하나만 확실히 확보하면 되는 상황.
파아앗!
‘버리고, 버리고, 이것도 필요 없어…….’
연달아 사용되는 스킬북들이 빛을 발산하며 사라졌다.
에일은 계속해서 나오는 스킬들을 배우지 않고 넘어가기만 했다.
‘어중간한 기술은 스킬창만 차지할 뿐이야. 스킬북 수급이 더 곤란했던 저레벨 때도 아니고, 큰 효과가 없는 스킬을 배워 놓으면 오히려 손해지.’
그는 희귀나 상급은 물론, 영웅 등급의 스킬이 등장했음에도 과감히 포기하고 넘어갔다.
불의 세례와 겹치는 애매한 포지션의 광역기가 나온 탓에, 오히려 희귀급 패시브보다도 못한 선택지였다.
그리고 그렇게 상위 등급의 스킬북을 10개 넘게 소모했을 때 즈음.
하나 남은 보랏빛 스킬북이 빛을 발하며, 드디어 에일의 손이 멈췄다.
[징벌(유일)]
“나왔다……!”
에일은 주저 없이 스킬을 확정 지으며 새로운 기술을 획득했다.
유일 등급의 스킬.
그것도 강력한 피해량을 지닌 공격계 신성 마법이었다.
보유하고 있던 다른 스킬과 겹치는 역할도 없는 데다가, 마침 나와 줬으면 했던 분야의 스킬이었다.
[‘은밀한 탐구자’가 당신에게 깊은 흥미를 보입니다.]
새로운 스킬의 등장에 가장 큰 관심을 드러낸 것은 레녹스.
근접 계열 직업인 이단심판관이면서도, 자신의 전문 분야인 마법을 익히자 에일에게 흥미를 가진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망캐가 되었을 뿐이겠지만, 에일은 달랐다.
영향을 받는 스탯 구조 자체를 바꿔 버리는 ‘구도자의 열성’이라는 전설급 스킬을 지니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생명의 어머니’가 당신의 행운에 축하를 보냅니다.]
[공용 교단 공헌도 +200]
프레이아가 보내온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녀는 에일에게 어느 교단에서든 사용할 수 있는 공용 공헌도를 200이나 건네주었다.
아직 본인의 사도도 아닌 자에게 직접 후원까지 하다니.
역시나 워로드에서 가장 부유한 영향력을 가진 신다웠다.
[‘빛의 심판자, 루’가 당신을 후원합니다.]
[빛의 교단 공헌도 +201]
‘…….’
그에 질세라 루가 후원을 해왔다.
그녀 역시 월드 이벤트를 마치고 막대한 영향력을 벌어들인 뒤였다.
직접 보이지 않음에도 두 여신 사이에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생명의 어머니’가 당신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고 전합니다.]
[그녀는 서둘러 당신이 미약한 옛 신을 버릴 것을 원합니다.]
저번 에일의 발언 탓인지, 프레이아는 상당히 자신감에 찬 모습이었다.
벌써부터 그가 갈등하며 흔들리고 있으니, 결국엔 무조건 자신을 택할 거라 생각하는 듯했다.
하나 지금 같은 상황에 에일이 대지 교단을 선택할 일은 없었다.
뒤늦게 그녀가 사실을 깨닫게 될 때, 뒷감당이 살짝 걱정될 정도였다.
물론 어차피 밝혔다 해도 바뀌었을 문제도 아니고, 지금 걱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이용할 수 있을 때 최대한 뽑아먹어야지.’
그렇게 에일이 신격을 상대로 호구 잡을 궁리를 하며 걷고 있는 사이.
그는 최근 건설된 이단심문소의 앞에 도착했다.
엘트리스 지부에 신설된 이단심문소.
교단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시설 중 하나인 만큼, 노움들이 심혈을 기울여 가며 건설했다.
그에 걸맞게 놀랍도록 웅장한 모습을 띠고 있었다.
집행관이자 심문소장으로서 엘트리스 지역의 책임자인 에일이 상주하고 있어야 할 시설이기도 했다.
하지만 교단의 집행관들이 늘 그렇듯이 외부에 나도는 일이 더 많았고, 그가 부재할 동안 실질적으로 모든 일 처리를 맡는 ‘대사제’가 신전과 심문소를 바쁘게 오가곤 했다.
“돌아오셨군요, 집행관님.”
“아, 대사제님.”
마침 이단심문소의 앞에서 마주치게 된 둘은 반갑게 서로에게 다가갔다.
교단의 대사제, 록히드.
겉보기엔 그저 인상 좋고, 누구에게나 친절한 중년의 사제였다.
하지만 대사제가 되었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신실한 믿음으로 루의 뜻을 따랐다는 것.
교리를 거스르는 이단에게만큼은 피도 눈물도 없는 이였고, 에일을 대신해 맡는 일들의 일 처리도 확실했다.
“엘트리스에서의 일은 좀 어떠십니까?”
“이제 막 새로운 지역에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중이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쁩니다. 아마 신도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았으면 잠잘 시간도 없었을 겁니다.”
“제가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하는 건데, 저 때문에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런 말씀 마시지요. 여신의 선택을 받아 집행관이 되었다는 것은 위대한 사명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 그런 사명을 행하는 집행관님을 한곳에 붙잡아 두는 것은 저희가 범할 가장 큰 죄악이나 다름없습니다.”
대사제가 인자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아, 집행관께서는 최근 지상에서의 일에 대해 들으셨습니까?”
“물론입니다. 쉽사리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더군요.”
지금 언급될 지상에서의 일이라면 하나뿐이었다.
나이트메어와 여명의 전쟁.
전쟁이 시작된 이후 일주일이 넘게 지났지만, 가라앉기는커녕 점점 더 과열되어 가고 있는 상태였다.
소극적인 국지전 따위가 아닌, 길드의 명운을 건 전면전의 연속이었다.
그동안 워로드에서도 이 정도의 충돌은 보기 어려웠기에 유저들은 훨씬 뜨거운 반응을 보였고, 직접 그 세계를 살아가는 워로드의 NPC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영상으로 봤을 때 정말 장난이 아니었지…….’
전 세계를 강타한 빅이슈인 만큼, 이번 전쟁에 대해 수많은 영상이 올라왔다.
전략적인 문제 탓에 길드나 게임사 차원에서 정식으로 영상을 찍어 올리는 짓 같은 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영상을 얻으러 간 유저나 전문 취재진들이 멀찍이 찍어 올린 영상들만으로도 전율이 느껴질 정도였다.
‘아직 내 선에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빠르게 이루어진 자기 객관화.
그뿐만 아니라, 평소 분노조절장애를 앓던 이들도 가뿐히 분노조절잘해로 만들어 버릴 광경이었다.
언제 또 다른 쪽에서 사건이 터져 나올지 모르니, 당분간 엘트리스 쪽에 있는 편이 안전해 보였다.
하지만 모든 일이 계획대로만 되지는 않기 마련.
쿠구구구!
요란한 소리와 함께 메시지가 떠올랐다.
[월드 이벤트가 발생하였습니다!]
[순환의 고리 - 대륙 서부에 전란의 기운이 감돕니다.]
[멸망의 신격이 오랜 침묵을 깨고 일어났습니다. 계시를 받은 거대한 군세가 신의 뜻을 향해 진격합니다. 융성한 시기가 있다면 멸망의 때도 있는 법. 신도들은 지역 내에 자리 잡은 모든 것을 무로 돌려놓기 위해 몸을 내던질 것입니다.]
[대교구장 ‘멜리아’의 지휘하에, 신의 뜻을 받은 모든 신도들이 집결합니다.]
[목표 지역 - ‘바난’, ‘아겔른’, ‘방랑자의 마을’, ‘버나도스’, ‘에르베’, ‘헤안젤’, ‘포스터스’, ‘아마라’, ‘몰락자의 성채’]
[신격, ‘강의 폭군’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생명의 어머니’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은밀한 탐구자’가 불쾌감을 드러냅니다.]
[‘빛의 심판자, 루’가 ‘강의 폭군’의 담대한 움직임을 경계합니다.]
‘이… 이건…….’
떠오르는 신격들의 아우성.
예상 못 한 순간에 던져진 새로운 월드 이벤트는 그들의 격한 반응을 이끌어 냈다.
순환과 물, 멸망의 신. 바하무트.
그동안 에일의 앞에도 나타나지 않았던 그가 본격적인 움직임을 드러낸 것이다.
[‘화산의 지배자’가 당신의 행동을 촉구합니다!]
특히 바하무트와 원수지간인 라자갈은 어떻게든 그를 막으라며 난리였다.
당장 속성만 보더라도 완전히 상극인 불의 신과 물의 신이었으니, 둘의 사이에 대해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신도가 아닌 에일에게 매달리는 이유.
직접 신탁을 내려 그들의 교단을 움직이기엔 부담이 가니, 간단하게 움직일 수 있는 에일이 막아 주길 바라는 것이었다.
‘규모가 엄청나다.’
목표 지역들을 확인한 에일이 미간을 좁혔다.
그가 전에 공략했던 암스텔처럼 핵심 거점인 도시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당장 노려지는 거점들은 빛의 교단이 보였던 규모를 뛰어넘었다.
이 정도라면 근방의 유저들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물의 교단 소속의 NPC들까지 함께 움직일 것이다.
‘영향력을 엄청나게 쏟아부었겠지. 물론 성공했을 때 거둬들일 영향력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바하무트가 상황을 단번에 뒤집을 승부수를 던졌다는 것.
경쟁자로서는 반드시 막아야 하는 수였다.
[‘화산의 지배자’가 당신을 후원합니다!]
[불의 신격이 당신에게 더 큰 보상을 약속하며, 바하무트의 움직임을 반드시 막아 주길 바랍니다!]
[공용 교단 공헌도 +2,000]
“집행관님……?”
연달아 나타나는 메시지들에 에일이 말을 멈추고 우두커니 있자, 대사제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하지만 에일은 말없이 장검을 집으며 어디선가 보고 있을 루를 바라봤다.
[‘빛의 심판자, 루’가 고개를 끄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