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격동하는 대륙 (4)
6대 길드 간의 전쟁.
워로드 전역을 뒤흔든 새로운 소식에 세계가 요동쳤다.
모든 플레이어들의 시선이 그리로 쏠림은 물론, 워로드를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들조차 전쟁 소식을 지겹도록 접할 정도였다.
뉴스란에 각종 특집 기사가 쏟아졌고, 관련 방송에서도 이번 전쟁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스케일 자체가 다른 거대한 격돌.
이미 선발대 간의 전투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음은 물론, 각지에서 6대 길드 아래의 수많은 산하 길드와 병력들이 집결 중이었다.
그리고 그와는 반대로, 접경 지역 주변에 있던 유저들은 대거 피난길에 올랐다.
“에휴, 겨우 모아서 도시에 길드 건물을 세워 놓으니까 이런 일이 다 터지네.”
“그러게 좀 안전한 곳에 마련해 놓자 했잖아요.”
“그나마 제일 땅값이 싼 걸 어쩌라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도시가 멀쩡하길 바라야지. 그나저나 사람 진짜 많네.”
투덜거리며 떠나고 있는 그들의 뒤로는 다른 유저들의 행렬도 길게 이어졌다.
수많은 유저들이 숲속에 나 있는 길을 통해 줄줄이 이동하고 있었다.
그간 활동하던 터전을 버리고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반길 이는 없었지만, 전쟁에 휘말려 죽고 싶지 않다면 몸을 피해야 했다.
거기다 이런 혼란한 상황을 가장 좋아하는 건 악독한 PK길드들이었다.
전쟁을 피해 달아나는 이들은 노리기 가장 쉬운 대상이었고, 이렇게 다른 사람들의 행렬에 겹쳐가는 편이 안전했다.
“저것 봐! 전장의 예술가 길드야!”
한 남자가 앞을 가리키며 외쳤다.
건너편에서 다가오는 플레이어 무리.
워로드의 유명 용병 길드 중 하나인 전장의 예술가였다.
가장 선두에 선 남자는 용병단의 길드장인 하츠.
유명 길드와 네임드 플레이어의 등장에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레벨 정예로 구성된 용병 길드인 만큼, 하나같이 상위 장비들을 두르고 있는 모습이었다.
“저, 저기 쇼크웨이브도 있어.”
옆을 지나는 또 다른 길드에 감탄을 내뱉었다.
이번 전쟁을 치르기 위해 고용된 각지의 유명 용병 길드들.
그중 나이트메어에게 고용된 용병 길드들이 이동하는 중이었고, 전장으로 향하는 용병단은 엇갈려 그들을 지나쳐갔다.
“하이팀과 파괴본능 길드는 여명 쪽에서 움직이는 중이라고 하던데.”
“대륙의 이름 있는 용병단들은 죄다 움직이는군. 진짜 제대로 한판 붙을 작정인가 본데?”
단순히 전해 듣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다르기 마련.
절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유저들이 수군거렸다.
나이트메어와 여명 길드.
워로드의 판도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6개의 길드 중 두 거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양측에서 움직이는 용병 세력만 해도 굉장한 규모를 자랑했다.
‘역시 엄청나네.’
무리에 섞여 있던 에일이 그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여기까지 건너오는 동안에만 벌써 네 번째로 목격하는 세력의 이동이었다.
두 길드 사이에 맞닿은 전선이 굉장히 길다는 걸 생각해 보면, 규모가 얼마나 커질지 감히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안 그래도 12강 길드끼리 치고받던 중이었는데, 대륙 남동쪽은 사실상 전쟁터나 다름없이 되어 버렸어.’
지금 이 순간에도 접경 지역 곳곳에서 국지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직 양측의 본대가 맞닿아 전면전이 일어난 게 아님에도, 큰 규모의 전투가 연달아 벌어지는 중이었다.
‘그래도 일단 돈은 확실히 벌었지.’
에일이 예상했던 대로 광산이 타격당했다.
재빠르게 행동을 개시한 나이트메어 덕에, 우선적으로 노려졌던 녹터눔 광산 지대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로 인해 여명이 생산하던 녹터눔의 공급이 사실상 중단되었고, 자연스레 가격이 상승 중이었다.
이번 거래의 차익으로 벌어들일 엄청난 이득이 눈에 선했다.
‘문제는 두 길드가 움직였으니, 다른 넷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텐데.’
그동안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뤄 대치하던 워로드의 거대한 판도가 요동치는 중이었다.
에일이 월드 퀘스트를 수행한 것만으로도 갖가지 연쇄 작용이 터져 나오고 있었으니, 다른 쪽도 어찌 될지 몰랐다.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전쟁이 잠시도 끊이지 않던 워로드의 초창기 당시로 돌아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월드 퀘스트 쪽은 확실히 처리해 줬으면 하는데 말이야.’
중요한 건수가 걸려 있는 왕가의 월드 퀘스트.
믈론 치명적일 수 있는 정보를 건네줬음에도, 똑바로 대처하지 못할 만큼 6대 길드가 멍청한 집단은 아니었다.
어련히 알아서 해결하겠지만, 그래도 확실히 해결해 줬으면 했다.
‘뭐, 일단 지금 내가 해야 할 건 하나뿐이지.’
바로 이 정신없는 분쟁 지역을 서둘러 빠져나가는 것.
이전에 나이트메어와의 순탄한 거래가 있었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대가가 오간 거래일 뿐이었다.
괜히 나서 한쪽의 편을 들어줄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사이에 껴서 휘말리는 일이 없도록 잘 대처해야 했다.
슬쩍 피난자 무리 속에서 빠져나온 에일은 미리 점찍어 뒀던 깊은 숲속으로 향했다.
여태까지 걷던 길은커녕, 인적이 아예 없을 만큼 깊은 숲이었다.
파악!
멈춰선 에일의 앞에서 난데없이 땅바닥이 치솟았다.
땅에 생긴 구멍 안에서 불쑥 머리를 내민 래터.
“끽끽! 마중 나왔다, 인간!”
“좋은 타이밍인데? 고마워.”
“종족의 은인에게 받을 감사 따윈 없다! 끽!”
어서 다가오라며 래터가 손짓했고, 에일은 누군가 보기 전에 래터들이 미리 파놓은 땅굴 속으로 들어갔다.
엄청나게 깊은 이 땅굴은 지하 세계 엘트리스가 있는 곳까지 곧장 향했다.
역시나 지금으로선 엘트리스의 사냥터가 가장 좋은 선택지였다.
아무리 효율이 좋은 사냥터라도 유저 간의 경쟁이 전혀 없는 데다가, 미해결 퀘스트도 넘쳐났다.
처음엔 기겁해 어서 빠져나가고 싶다던 로덴이나 리아도 결국 엘트리스에 남아서 파티 사냥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광기에 찬 지역이라 해도, 효율이 워낙 좋으니 유혹을 거부하기 힘들었다.
‘나도 일단 엘트리스에서 레벨이나 올리고 있으면 되겠지…….’
위쪽에서 무슨 난리가 벌어지든, 아무런 상관이 없는 지하 세계.
역시 이런 정보를 독점하고 있다는 건 엄청난 강점이었다.
하나 지금 격동하고 있는 건 유저들의 세상만이 아니었다.
* * *
쿠워어어!
거대한 괴물이 팔을 휘두르며 포효했다.
온몸의 살점이 누더기처럼 떨어져 나간 언데드 몬스터.
녀석이 발을 구르며 날뛰자 주변의 땅이 마구 갈라지며 솟구쳤고, 사방으로 튄 파편이 에일을 노렸다.
보스가 보이는 위협적인 패턴.
하지만 지금의 행동은 그저 마지막 발악일 뿐이었다.
촤아아악!
괴물의 뒤를 돈 에일이 장검을 휘둘러 등을 갈랐다.
섬광과 함께 뻗어져 나간 일섬이 괴물의 몸을 단숨에 관통했고, 녀석은 강렬한 성화에 휩싸였다.
[이단을 처단하였습니다!]
[형벌 집행의 효과로 스탯 보너스가 두 배로 늘어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후.”
쓰러진 괴물의 목을 참수하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성공적으로 레이드를 끝마친 에일은 가볍게 숨을 돌렸다.
끈적한 피가 묻은 장검을 성화로 한 번 깨끗하게 쓸어 준 뒤, 무기를 거두었다.
그리곤 무릎을 꿇고 여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신앙심이 한층 더 깊어짐을 느낍니다.]
[신앙심 스탯 +0.1]
[광기 스탯 +0.1]
[‘빛의 심판자, 루’가 당신의 멋진 전투에 존중을 표합니다.]
[빛의 교단 공헌도 +50]
이젠 일상처럼 되어 버린 루의 메시지가 나타났다.
그러자 에일은 묘한 장난기가 발동해, 어디선가 보고 있을 루를 향해 엄지를 슬쩍 치켜올렸다.
[‘빛의 심판자, 루’가 당신에게 건방 떨지 말 것을 요구합니다.]
[그녀의 싸늘한 눈빛이 당신에게 닿습니다.]
“아, 죄송…….”
[‘빛의 심판자, 루’가 당신을 후원합니다.]
[빛의 교단 공헌도 +120]
‘…….’
전부터 줄곧 느껴오는 것이었지만, 여신의 변덕이란 손쉽게 헤아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뭐 어찌 됐건…….’
해체용 칼을 빼든 에일은 아이템을 루팅한 뒤, 쓰러진 괴물의 시체를 가르기 시작했다.
분명 알리사를 비롯한 파티원들은 그가 지상에서 월드 퀘스트를 진행할 때부터 줄곧 엘트리스에 남아 활동했다.
하지만 엘트리스의 던전에 들어온 에일이 이런 곳에서 홀로 사냥을 하고 있는 이유가 있었다.
‘다른 파티원들은 인던을 공략 중이라고 하니까. 당분간 혼자서 레벨을 올리는 수밖에.’
원래대로라면 합류해 함께 사냥을 진행할 예정이었으나, 우연히 인스턴스 던전을 발견한 일행은 공략 도중에 바깥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워낙 거대한 던전을 예기치 않게 발견해, 밖으로 빠져나오기까지 꽤 오래 걸릴 것 같다고 전했다.
물론 솔로 플레이라고 타격이 있는 건 당연히 아니었다.
적당한 퀘스트와 보스 사냥을 병행해 가며, 차질 없이 성장해 나가는 중이었다.
콰악!
마지막 뼈를 가르며 보스의 시체 해체가 끝났다.
에일은 드랍된 부산물들을 챙기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퀘스트도 하나 끝냈고. 이제 돌아가 볼까.’
그렇게 발길을 옮기려는 순간.
[신격, ‘생명의 어머니’가 당신의 존재를 눈치챘습니다.]
“뭐……?”
소스라치게 놀란 에일이 자리에 뻣뻣이 굳었다.
그의 앞에 나타난 건 불과 짤막한 메시지 하나였지만, 순간적으로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 신격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상, 부정할 여지는 없었다.
루와 동격인 워로드의 일곱 신격 중 하나.
‘생명의 어머니. 이 이명은…….’
풍요와 대지, 죽음의 여신. 프레이아.
그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빛의 심판자, 루’가 신격의 등장을 경계합니다!]
루까지 격한 반응을 보이며 새로운 신격을 경계했다.
‘다른 신격이 직접 메시지를 보내오다니……. 설마 프레이아도 완전히 잠에서 깨어났다는 건가?’
에일은 순간 카린이 자신에게 전했던 말이 떠올랐다.
다른 교단에서 큰 움직임을 취할 기미를 보이고 있다는 것.
6대 길드의 길드장이 제대로 된 증거나 확신도 없이 말했을 리는 없었고, 그에 대해 에일도 여러모로 생각해 두었다.
하지만 정말 중요했던 언급은 바로 그 뒤편에 있었다.
머지않아 신격들의 개입이 본격화될 거라는 말.
‘그게 설마 벌써일 줄이야.’
[신격, ‘화산의 지배자’가 적막을 깨고 포효합니다.]
[신격, ‘은밀한 탐구자’의 교활한 눈빛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이런 건 예상 못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