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격동하는 대륙 (3)
경매장에서 구매한 녹터눔들이 인벤토리 한쪽에 가득 찼다.
에일은 그것들을 모두 안전한 창고로 옮겨 보관했다.
‘투자야 좋지만… 아무래도 문제는 전쟁이지.’
창고를 빠져나온 에일이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의 정황이나 전조로 볼 때, 큰 전쟁이 벌어질 거란 추측은 확실해 보였다.
이번 투자 역시 갑자기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애초에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거의 전 재산을 투자하는 기행을 벌일 에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6대 길드 간의 전쟁이란 건 훌륭한 돈벌이 수단 정도로 넘길 만큼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워낙 거대한 충돌이라 어떤 파급 효과가 있을지, 그조차도 쉽사리 짐작하기 어려웠다.
여타 길드나 교단 같은 세력들은 물론, 개개인에게도 얼마든지 불똥이 튈 수 있었다.
‘전쟁이 정확히 언제 일어날지도 아직은 알 수가 없으니…….’
콰직!
그때 갑자기 무언가 커다란 것이 에일의 앞에 떨어져 내렸다.
찌그러진 갑옷 사이로 보이는 건, 피를 토해 내는 남자의 시체.
성채의 높은 성벽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린 경비병 NPC였다.
“이게 무슨……?”
당황한 에일이 흠칫 물러났다.
급히 경비병이 떨어진 성벽 위를 바라봤지만, 누군가의 형체는 찾아볼 수 없었다.
“허…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지? 도둑질하다 들키기라도 한 건가?”
“아무리 그래도 여명의 경비를 죽이다니…….”
경비병의 시체 주변에 유저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어떤 간 큰 유저가 6대 길드의 NPC를 건드리는 대형 사고를 친 건지, 많은 이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다른 영지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경계를 하거나 달아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여명 길드의 거점지인 만큼 아무도 걱정을 하지 않았다.
누군가 그들의 영지에서 깽판을 칠 수 있는 경우는 아예 없다고 봐도 좋으니까.
‘이거 예감이 좋지 않은데…….’
에일은 어딘가 드는 불길한 예감에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모여드는 구경꾼들 사이를 헤치며 현장을 빠져나가려 했다.
설마 하는 생각이 계속해서 그의 머릿속을 맴도는 가운데.
콰아아앙!
이번엔 성문 쪽에서 요란한 폭음이 들려왔다.
귀가 멍멍해질 정도의 큰 소음이었고, 성채 안에 있던 모두가 순간 휘청일 정도였다.
으아아악!
성벽 위에서 경비병의 비명이 들려왔다.
늘어진 시체 하나가 아래로 더 떨어져 내렸고, 그제야 성채 안에 있던 다른 유저들도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무… 무슨 일이야?”
‘이런…….’
대번에 상황을 파악한 에일은 인상을 찌푸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범죄 행각을 발각당한 플레이어가 막무가내로 경비병을 공격하는 일 정도는 흔했다.
하나 이젠 유저 개인의 일탈 정도로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여명의 성채는 갑작스러운 습격을 당했다는 것.
그리고 이런 짓을 벌일 상대는 같은 6대 길드뿐이었다.
‘설마 그 시점이 지금일 줄이야.’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은 에일은 서둘러 현장을 빠져나가려 했다.
성채 양쪽에 위치한 성문을 제외하고도 빠져나갈 구멍은 있었다.
다른 유저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통로.
접경 지역에 위치한 거점지인 만큼, 달아날 정도의 시간은 벌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상대의 움직임은 그의 예상도 아득히 뛰어넘었다.
“나… 나이트메어다!”
“전쟁이야! 도망쳐!”
순식간에 성채 내부로 침투한 나이트메어의 길드원들이 방어를 무력화시키기 시작했다.
여명 길드의 소속이라면 NPC와 유저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베었다.
안전하다 생각했던 성채 내부는 단숨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전쟁을 피해 달아나려는 유저들이었지만, 성문 쪽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이곳 슈드라펠 성채는 접경 지역에 위치한 것이 감안되었고, 정예병을 포함해 충분히 많은 병력이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들이닥친 나이트메어의 길드원들에게 속수무책으로 쓸려나갔다.
애초에 이곳을 단숨에 밀어 버릴 심산으로 찾아온 자들이었기에, 성채 방어를 맡은 여명의 산하 길드원들조차 상대가 되지 않았다.
“빠져나가지 못하게 모두 붙잡아!”
“무기를 버려라!”
나이트메어는 조금이라도 반항하려는 유저들은 그 즉시 베어 버렸고, 순순히 무기를 버린 유저들도 모두 제압했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유저들을 성채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죽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여명 길드나 그 산하 길드원이 아닌지 알아내기 위해 따로 조사가 필요했다.
에일이 피하고 싶은 귀찮은 과정도 바로 그것이었다.
난리가 난 현장을 슬쩍 빠져나온 그는 지하로 내려섰다.
타악!
앞으로 펼쳐진 기다란 통로.
빛이 거의 없어 굉장히 어두웠지만, 그래도 일자로 이어진 단순한 구조 덕에 길 정도는 쉽게 찾아갈 수 있을 정도였다.
이 길만 따라간다면 귀찮은 과정 없이 성채를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그리 쉽지 않았다.
“잠깐…….”
앞에서 나타난 사람의 형체.
에일은 순간 머뭇거리는 사이, 어둠 속에서 날아든 검은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빗겨 나갔다.
후웅!
‘이런……!’
달아나던 에일이 맞닥뜨리게 된 것은 나이트메어의 길드원이었다.
그는 진작부터 이 통로를 지키고 있었고, 그건 곧 나이트메어에서도 이 통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검을 휘두른 길드원은 수상쩍은 통로로 나가려는 에일을 여명 측의 인물로 보고 단숨에 숨통을 끊으려 했다.
카가각!
에일은 순식간에 다가온 검을 겨우 쳐냈다.
“잠……!”
휘익!
뺨을 스치고 지나간 검.
길게 그어진 상처에서 피가 튀었고, 차마 말할 틈도 없이 연격이 치고 들어왔다.
레벨과 장비, 스킬, 실력까지 모두 갖춘 실력자.
그것도 진심으로 덤벼드는 상대였기에, 까닥하는 순간 죽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 보인 하나의 빈틈.
한껏 다가온 남자에 에일은 그대로 응수하며 어깨치기를 먹였다.
빠악!
스킬이 정확히 꽂혔고, 충격과 함께 강력한 스턴이 들어갔다.
하지만 그것이 상대가 노리던 수였다.
순식간에 사용된 상태이상 해제기.
스턴이 꽂히자마자 놀라운 반응 속도로 사용해, 아예 스턴에 걸린 적이 없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끝이다!’
그대로 막힘없이 뻗어온 남자의 검.
하지만 에일의 목을 관통하려던 그의 공격은 마지막 순간 무언가에 가로막혔다.
쩌엉!
남자의 손에서 튕겨 나간 검이 땅바닥을 굴렀다.
“기, 길드장님?”
“그만하면 됐어.”
나이트메어의 길드장, 카린.
중간에 끼어든 그녀가 둘을 떼어냈다.
파앗!
거치대의 횃불이 켜졌고, 그제야 통로에 환한 빛이 생겨났다.
“아무리 이런 곳이라도 얼굴 정도는 눈치챘어야지.”
“죄송합니다.”
상황을 파악한 길드원이 급히 사과하며 물러섰다.
빛의 교단 측 네임드 플레이어인 에일이 여명의 관계자일 리는 없었다.
물론 어둡기 짝이 없는 통로 속에서 동료도 아닌 이의 얼굴을 쉽게 알아볼 수 없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전원이 최소 준랭커급 유저인 나이트메어의 일원으로서는 큰 실책이었다.
물론 그렇다 해도 카린도 더 이상 그를 질책할 생각은 없는지, 고갯짓을 하여 물러가게 했다.
통로에 둘만이 남게 되자, 그녀는 먼저 입을 열었다.
“이런 식으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에일.”
“카린…….”
에일이 그녀를 바라봤다.
레벨에 맞춰 장비가 바뀐 걸 제외하면, 메디아에서 협상 자리에 앉았던 그때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은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는 모습.
성채 공략에 전면에 나서 적잖은 사람들을 베어낸 모양이었다.
“뒷모습이 눈에 익길래 쫓아와 봤는데,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군.”
“나이트메어의 길드장까지 나서 여명의 거점을 공격하다니… 선전포고도 없이 전면전이라도 하려는 건가?”
“마땅한 대가를 받아낸 것뿐이야. 누군가가 빙해의 시선을 끌어서 틈을 만들어 준 덕이기도 하고.”
카린이 재미있다는 듯 에일을 응시했다.
에일은 그녀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눈치챘다.
슈드라펠 성채는 여명과 나이트메어가 서로 단단히 방비를 해둔 접경지대 중에선 그나마 취약한 부분이었다.
그 이유가 바로 빙해 길드의 존재였다.
빙해는 나이트메어와 여명 길드 사이에 자리 잡은 길드로, 이곳 성채는 빙해의 영지를 사이에 둔 채 나이트메어와 떨어져 있었다.
‘빙해의 영지를 통해 건너온 거군.’
이번 습격이 여명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상황에 이루어질 수 있던 이유.
직접 맞닿은 거점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사이에 낀 빙해의 영지를 통해 몰래 접근해 온 것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러한 움직임을 빙해 길드가 알아채야 했겠지만, 최근 벌어진 전쟁들로 인해 여념이 없는 빙해에서 뭔가 대응을 하기엔 무리였다.
‘아마 지금쯤이면 이 주변 영지들은 모조리 초토화됐겠지.’
이런 기회를 놓칠 나이트메어가 아니었고, 빙해와 인접한 거점이라면 동시다발적으로 기습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방어가 취약한 부근에서부터 공격을 시작한 것.
길드장까지 직접 나선 이상, 여명과의 전면전이 시작될 것이었다.
“오른 왕자가 6대 길드를 뒤집으려 한다는 이야기는 못 들은 건가?”
“전해준 정보는 잘 확인했어.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 걱정해 줄 필요는 없어. 이미 따로 길드들을 움직여 놨거든. 왕가가 직접 나선 것도 아니고, 외부 세력을 움직이는 정도로는 우습지도 않아.”
그녀의 말에 에일은 수긍했다.
완전히 방심해서 당한다면 모를까, 이렇게 정보가 들어온 이상 그런 수에 당해 줄 이들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두 길드가 싸움에 전념한다 해도, 자신들을 노리는 월드 퀘스트를 다른 6대 길드가 가만히 구경하고 있을 리 없었다.
“그쪽 이야기하고는 별개로, 우리 쪽에서도 한 가지 정보를 주지.”
“정보?”
솔깃한 에일이 그녀를 바라봤다.
6대 길드의 수장이 가지고 있을 정보의 양과 질이라면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이번 월드 이벤트로 빛의 교단이 선두를 잡긴 했지만… 조만간 다른 교단에서도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일 거야. 도시 하나를 불태운 것 이상으로 큰 움직임을.”
“새로운 월드 이벤트를 말하는 건가……?”
“그래, 머지않아 신격들의 개입도 본격화되겠지. 너희의 여신인 ‘루’가 깨어났던 것처럼.”
[‘빛의 심판자, 루’가 흥미로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봅니다.]
‘신격이 깨어난 것까지 알고 있었다니…….’
언제 눈치챈 건지는 모르겠지만, 카린은 루가 잠에서 깨어난 사실까지 인지하고 있었다.
그녀의 언급에 루조차도 놀라움을 표하며 관심을 보일 정도였다.
그사이 이야기를 나누며 통로를 다시 빠져나온 둘은 다시 성채로 나왔다.
“이쪽은 먼저 돌려보내.”
카린의 한마디.
바람 한 줌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던 살벌한 분위기였지만, 길드장의 비호를 받은 에일은 아무런 제지 없이 나설 수 있었다.
그는 꼼짝없이 붙잡힌 유저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으며 바깥으로 향했다.
어느 틈에 부순 건지 성문은 이미 통째로 뜯겨 나가 있었다.
‘역시 살벌하네.’
헛웃음을 흘린 에일이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뒤편에서 카린이 말을 건네 왔다.
“혹시 일이 잘못되어서 길드가 필요하게 된다면, 우리 쪽으로 찾아와도 좋아. 네가 내킨다면 말이지.”
“영입 제안이라니… 의외인데.”
설마 6대 길드, 나이트메어의 길드장이 직접 제안을 할 줄이야.
다른 길드원들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워로드에 들어서 그녀가 누군가에게 직접 영입 제안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당분간 접경 지역에서는 벗어나 있는 게 좋을 거야. 휘말리고 싶지 않다면.”
“명심하지.”
고개를 끄덕인 에일은 등을 돌려 성채를 빠져나갔다.
두 거대 길드 간의 대전쟁이 대륙을 덮을 것이었고, 주변에 얼쩡거리고 있어서 좋을 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