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여섯 번째 집행관 (4)
220레벨의 필드 보스 몬스터, 키루나.
어지간한 유저들이라면 가까이 다가서지도 못할 레벨대인 건 물론, 동레벨대의 필드 보스 중에서도 굉장히 까다롭기로 유명했다.
놈은 무려 체력 상황에 따라 4개의 페이즈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거체를 이끌고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마지막 패턴은 어지간한 숙련도의 공격대라면 도저히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녀석도 최고의 공격대 앞에선 소용없었다.
빙해의 최고 전력을 자랑하는 1군 레이드팀.
그중엔 29위의 하이 랭커이자 길드장인 테온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이탈자는 0명. 클리어 타임은 33분 21초로 약 4분가량이 단축됐습니다. 전반적으로 공격대의 움직임도 훌륭했고, 드랍 아이템이 잘 나온 덕에 저번에 비해 2배 이상의 수익이 예상됩니다.”
길드원이 가벼운 목소리로 결과를 브리핑했다.
난이도가 높은 보스임에도 사망자가 단 한 명도 없는 데다가, 중간에 발생한 예상 밖 변수에도 당황하지 않고 능숙한 대처를 보이며 레이드를 끝마쳤다.
미리 숙지해 둔 대로 호흡도 완벽했고, 누구라도 감탄할 만한 흡족한 결과였다.
하지만 정작 테온은 뚱한 표정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출발은 얼마나 남았지?”
“방금 전, 해체 작업을 비롯해 아이템 회수가 모두 끝났습니다.”
“좋아, 지체하지 않고 출발한다. 녀석들이 도시에 가까워졌다던데, 우리가 늦어 버리면 안 되지.”
테온이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스마이어와 솔스티드 지역에서 몰려든 루의 신도들은 조금 전에 모두 집결했고, 한데 모여 도시를 향해 진격 중이었다.
그것도 눈에 보이는 이단들을 모조리 태워 버리는 기행을 벌여가며 말이다.
모두가 겁에 질려 그들이 향하는 경로를 피해 달아나고 있었지만, 테온은 그들을 놓칠 생각이 없었다.
아니, 자신이 도착하기 전에 먼저 부하들이 처리해 놓는 것조차 곤란했다.
어떻게든 직접 놈들을 쳐부수고, 에일이라는 루키의 목을 쳐야 성미가 풀릴 것 같았다.
다시는 굴러들어 온 놈들이 빙해를 우습게 보지 못하도록 묵사발을 내놓을 작정이었다.
“다들 암스텔로 이동한다!”
“기, 길드장!”
길드원이 허겁지겁 그를 부르며 달려왔다.
무언가 급한 일이 생긴 듯한 기색이었다.
“무슨 일이지?”
“말들이 모두 죽어 있습니다! 말을 지키고 있던 길드원도요!”
“뭐야?”
그의 말에 자리에 있던 모두가 놀랐다.
공격대원들이 이동할 때 타고 다니던 말들.
레이드에 돌입하기 전, 몬스터가 없는 숲 구석에 묶어 뒀었는데 모두 죽어 있다는 것이다.
“몬스터의 소행인가?”
“아닙니다. 유저의 짓입니다.”
‘지키고 있던 길드원까지 죽였다면, 우리 길드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말을 지키고 있던 이가 그들과 같은 1군의 정예는 아니었지만, 엄연히 빙해의 일원으로서 길드 마크를 지니고 있었다.
어지간히도 겁을 상실한 녀석들이 아니라면 감히 빙해 길드, 그것도 길드장과 1군 레이드팀을 상대로 이런 일을 벌이지는 않을 터.
“설마…….”
콰앙!
느닷없이 요란한 폭발 소리가 귀를 울렸다.
커다란 화염구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것이었다.
길드원을 여럿 휩쓴 대형 마법에 이어, 사방에서 화살들이 날아들었다.
“기습이다!”
“당황하지 말고 대응해!”
단숨에 벌어진 아수라장.
퍼부어진 화살 사이로 수많은 유저가 나타나,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 자식들이 해보자는 거냐!”
분노한 테온이 대검을 움켜쥐었다.
그리곤 곧장 돌진기를 사용해 적에게 쇄도했다.
아무리 갑작스러운 기습에 당했다고는 하나, 하이 랭커인 그는 조무래기 길드원 따위 단숨에 베어 버리려 했다.
하지만 놈은 단칼에 당해 주지 않았다.
쩌엉!
‘이걸 반응해?’
순식간에 휘둘러진 테온의 대검을, 왼손의 방패로 막아선 남자.
테온의 무지막지한 힘 탓에 멀리 튕겨져 나가긴 했지만, 공격으로 큰 대미지를 입지는 않았다.
생각 이상으로 실력을 가지고 있단 걸 깨닫자, 테온은 그제야 놈들의 장비를 확인했다.
갑옷 위에 그려진 검은 늑대의 엠블럼.
흑랑의 길드원들이었다.
철저히 소수 정예로 이루어진 유일한 12강 길드.
방금 녀석이 단칼에 베이지 않은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이 새끼들이… 지금 장난질 하냐?”
테온이 성난 표정으로 이를 갈았다.
흑랑이라면 빙해의 적대 길드 중 하나였다.
하나 놈들의 활동 영역이라면 여기서 꽤나 먼 거리에 있었고, 이렇게 갑자기 그들의 영역까지 찾아와 기습을 해온 적은 없었다.
한창 전쟁 중이었다면 모를까, 오랜 소강상태였던 지금 난데없이 자신을 습격하다니.
테온의 입장에선 기분이 더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니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뭐 하려고? 너희가 이만큼 몰려와 봤자 내 목을 딸 수 있을 것 같냐?”
“아니, 그것 내 몫이지.”
짙은 흑발의 남자가 창을 쥔 채 모습을 드러냈다.
흑랑의 길드장이자, 랭킹 13위의 하이 랭커.
테온은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격한 반응을 토해냈다.
“다륜, 이 XXX아.”
“더러운 입은 여전하네. 이렇게 직접 만난 건 두 달 만인가?”
다륜이 씩 웃었다.
“네가 여기까지 나타났다는 게 뭘 의미하는 건지는 알고 있겠지?”
“그래, 전면전이다.”
직접적인 전쟁이 아니더라도 적대 관계의 두 길드원이 마주치면, 흔하게 싸움이 벌어지고는 했다.
하나 지금처럼 두 길드장이 마주하는 자리에 계획적으로 습격에 나섰다는 것.
결코 견제 정도로 그칠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못해도 두 길드 간의 전면전을 의미했다.
“서로 눈치나 보던 게 슬슬 지겹던 참이라. 이제 레이드 꼬장이나 부리면서 깔짝대는 건 그만해야지.”
“동감이다, 이 새끼야. 어디 한번 제대로 붙어 보자고. 너희 연합 쪽 녀석들도 긁어모아 와야지?”
“그렇지 않아도 지금쯤 움직이고 있을 거다.”
다륜이 냉소를 머금었다.
“바스! 당장 연락 넣어!”
“아, 네! 알겠습니다!”
테온이 외치자 그의 길드원이 급히 동맹 길드 쪽에 연락을 취했다.
두 길드와 동맹 관계였던 길드들까지 모두 움직이려는 것.
전쟁의 규모가 급격히 불어날 조짐이었다.
“그러고 보니 에일이라는 녀석. 네 생각보다 수완이 좋던데.”
“뭐야?”
갑자기 등장한 에일의 이름.
테온은 그제야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되었다.
“이 XXX가……!”
* * *
에일의 여러 활약 이후, 빛의 교단 세력은 전에 비해 눈에 띄게 강해졌다.
하나 지금처럼 두 지역에서 모인 유저들의 전력만으로 12강 길드와 정면으로 맞붙기엔 승산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가 한 선택.
워로드의 판도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워로드엔 수많은 길드들이 난립해 있었고, 그들의 관계는 이해관계에 따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리고 에일은 그에 대한 세력 관계도를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세력의 크기로 함께 분류되어 묶였다지만, 12강 길드 중에서도 여러 갈래로 세력들이 나뉘어져 있었다.
먼저 그가 상대해야 하는 빙해 길드는 학살과 나이더스 등의 12강 길드와 굳건한 동맹 관계를 맺고 있었다.
동맹은 피 말리는 워로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도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들을 적대하는 길드들의 연대도 존재했다.
그들 중 대표격이 바로 흑랑 길드.
붉은 달과 이터널 등을 비롯해 여러 길드가 그들의 연합에 대응해 뭉쳤고, 그렇게 형성된 두 연합 세력은 팽팽한 균형 속에서 서로를 견제했다.
‘그래서 흑랑 쪽을 움직이게 만들었지.’
띄워 둔 화면 속 기사를 본 에일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양쪽 연합이 격렬하게 부딪히는 중이었고, 그 무대가 된 대륙 남부는 거대한 전쟁터가 되어 버렸다.
‘다른 12강 길드들이 움직여 준 탓에 빙해의 세력은 완전히 분산되었다. 암스텔 쪽에 많은 병력을 배치시키는 건 절대 무리야.’
처음 빙해는 과시의 목적을 더해 교단을 완전히 찍어 누를 셈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바뀌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거점 곳곳에 12강 길드 간의 전투가 발발 중이었고, 다른 거점들을 모조리 거덜 내고 싶지 않다면 이쪽에 크게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전력이야 워낙에 팽팽한지라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예상 못 하겠지만. 어쨌든 양쪽 다 이득인 셈이지.’
강력한 12강 길드의 입장에서도 교단이 움직인다는 것은 가볍게 볼 수 없는 사안이었다.
수많은 신도들이 요란하게 모여 도시를 습격한다면, 반대 세력으로서도 가만히 놓치기에는 아까운 기회였다.
이런 것이 바로 월드 이벤트의 파급력이었다.
위태롭게 유지되던 판도에 돌이 던져지면 더욱 큰 파장이 일었다.
‘물론 마냥 쉬운 협상은 아니었지만…….’
에일이 입맛을 다셨다.
흑랑의 길드장, 다륜과의 협상은 그리 쉽지 않았다.
처음에 그는 빙해의 시선이 신도들 쪽으로 쏠린 틈을 이용해, 동맹들과 함께 가장 가까운 나이더스 길드를 기습할 작정이었다.
하나 그럴 경우 교단의 도시 공략은 불가능에 가까워지는 것이었고, 에일은 필사적으로 그를 설득했다.
그 결과, 다륜은 에일이 원하는 타이밍에 연합을 움직여 주는 대신, 필요할 때 교단의 도움을 한차례 받을 수 있도록 조건을 내걸었다.
에일은 그 조건 앞에 적잖은 고민을 했었다.
아무리 집행관의 위치에 있다고는 해도, 여신과 관련도 없는 일에 마음대로 교단의 세력을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정작 그 여신인 ‘루’가 메시지를 보내와 조건을 받아들이라고 재촉했다.
장본인이 상관없다고 한 이상, 망설일 필요는 없는 법.
그 덕에 거래는 성사되었다.
“끄아아아악!”
온 숲속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
모조리 붙잡혀 화형을 당하고 있는 이단들의 외침이었다.
“이 미친 자식들……!”
단두대 아래에 선 빙해의 길드원이 이를 갈았다.
하나 부질없는 발악일 뿐.
콰악!
“와아아아!”
그의 목이 댕겅 날아갔고, 수많은 신도들이 환호했다.
“이것으로 타 지역에서 암스텔로 향하던 증원군은 모두 차단되었습니다. 이제 도시로 진격할 일만 남았습니다.”
얼굴에 피가 덕지덕지 묻은 채 다가온 메이, 그녀가 에일에게 말했다.
따로 기습조를 꾸린 그의 전략은 성공적이었고, 공성전이 더 까다로워지기 전에 증원을 모두 차단할 수 있었다.
이제 도시에 빛의 심판을 행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