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지하 세계 (5)
“죄인이다!”
“화형! 결단코 화형!”
화형대들이 줄지어 이어져 있는 도시의 광장.
과거 도시에서 중죄를 저질렀던 노움들이 하나둘 화형대로 끌려가고 있었다.
비명 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고, 광장을 둘러싼 수많은 노움은 그 모습을 보며 격하게 환호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집행 탓에 그동안 상당한 수용 인원을 지니고 있던 도시의 감옥이 텅 비어가고 있었다.
덜컥!
마침 리아가 광장 구석의 잡화 상점에서 물건들을 싸들고 나왔고, 그 광경을 그대로 목격했다.
“으으…….”
그녀의 얼굴은 어김없이 창백해졌다.
이미 여기까지 오는 동안 수도 없이 봐온 광경이었지만, 도무지 적응을 할 수가 없었다.
“호, 혹시 제 머리 위에 표식 같은 거 안 찍혀 있죠?”
“없으니까 괜찮습니다.”
뒤이어 상점을 나선 에일이 그녀를 안심시켰다.
자신의 일행은 건드리지 않을 거라 여러 차례 말했지만, 역시나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괜히 겁먹을 필요 없어요. 다들 알고 보면 마음씨 착한 친구들이니까요.”
“그… 저기 사람들을 불태우고 있는데요……?”
“뭐, 그거야…….”
에일은 슬쩍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때마침 다른 일행들이 건너편 상점에서 나와 줬다.
“볼일은 다 보셨어요?”
“네! 어서 여기서 나갑시다!”
로덴이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며 말했다.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모습.
반면 느긋한 표정의 알리사는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필요한 물건은 모두 챙겼어요. 게다가 에일 님 동료라고 하니까 반값에 쳐주던데요? 이번 일이 끝나면 아예 여기서 자리를 잡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요.”
“세상에, 농담이죠?”
“으음, 로덴 님은 아직 적응이 안 되시나 보네요.”
“그야 당연하죠! 여기 더 있다간 저까지 미쳐 버릴 것 같아요. 저 노움들이 하는 말이 이젠 정상인 것처럼 들릴 지경이라니까요.”
로덴이 차마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시에 가득한 비정상인들 속에 파묻혀 있으니, 오히려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여신님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이 불쌍해요!”
“어……?”
지나가던 노움 꼬마가 비죽 혀를 내밀고 달아났다.
그러자 벙한 로덴은 꼬마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렇다면 당장 출발하죠. 시작이야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니까요.”
에일은 흔쾌히 로덴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필요한 물자를 모두 구한 이상, 도시에서 볼일은 모두 끝났다.
더군다나 이 신앙으로 가득 찬 도시도 자신한테야 뿌듯한 노력의 산물이었지만, 남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다.
적응을 못 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어쨌든 그렇게 의견이 모아지자, 일행은 서둘러 도시를 빠져나갔다.
리아와 로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알리사는 색다른 노움들의 도시 경치가 좋았는지 묘하게 아쉬워하는 듯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바깥 또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다음에 지나친 도시와 마을, 심지어 사냥터까지도.
어딜 가든 빛의 교단을 따르는 신도들이 한가득 널려 있었다.
방금 지나친 평원의 붉은 오크들조차 힘을 모아 거대한 루의 신전을 건설하는 중이었고, 멀리 보이는 산맥에서는 아예 통째로 산을 깎아 루의 형상을 만들려 하고 있었다.
“이건… 저도 조금 무서워지려 하네요.”
어찌나 진풍경들이 끝도 없이 연달아 나오는지, 알리사조차 진땀을 삐질 흘릴 정도였다.
도시 전체가 물들었다 해도 놀라운 일일 텐데, 설마 이렇게 한 지역이 통째로 교단의 손에 넘어가 버리다니.
상식의 범주 내에선 정말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까…….’
* * *
에일의 파티는 목표로 했던 던전 내부에 돌입했다.
굉장히 넓은 크기를 자랑하는 ‘사룡의 무덤’ 내부는 언데드로 가득 차 있었고, 주변 종족들에게 악명 높은 고난이도 던전답게 놈들의 수준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네 명이 함께 파티로 뭉친 그들을 막아서기엔 무리였다.
서걱!
창이 호쾌하게 휘둘러지며 몬스터의 목을 베었다.
연달아 뻗어지는 로덴의 날카로운 창격은 이전에 보였던 모습 이상이었다.
그는 사용할 액티브 스킬 하나 없이 엄청난 움직임을 선보였고, 사방에서 몰려드는 언데드들을 쓸어버렸다.
화르르륵!
그 옆을 휩쓸고 지나간 거대한 성화.
에일이 사용한 불의 세례 스킬이었다.
그간 로덴 못지않게 실력이 훌쩍 늘어난 에일이 함께 전위를 맡으며, 몬스터들이 다가오는 족족 베어 넘기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의 몬스터.
게다가 사방이 뚫린 드넓은 동굴 지형은 다수를 상대하기에 까다로운 조건이었다.
하나 그럼에도 에일과 로덴은 완벽한 호흡을 보이며 놈들을 막아 냈다.
크아아악!
하지만 어김없이 등장한 또 다른 포효 소리가 동굴을 울려왔다.
더욱 많은 언데드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고, 온 방향에서 숫자가 보태져 그들에게로 몰려들었다.
어찌나 숫자가 많은지 전투라면 일가견이 있는 에일과 로덴조차도 먼저 제풀에 지쳐 쓰러지는 것을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
물론 그것은 단둘만이 있을 때의 이야기.
콰과과광!
폭음과 함께 땅에서 솟구친 화염이 언데드들을 휩쓸었다.
한 번 솟구친 화염은 곧 주위로 번져나가 강력한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영웅급 스킬, 파멸의 불씨.
캐스팅 시간만 족히 3분이 넘게 걸리는 대형 마법이었다.
위력은 좋지만 대규모 공성전쯤 되는 전장이 아닌 이상, 실전성이 떨어져 유저들의 선택을 받지 못하는 비운의 공격 마법이기도 했다.
하지만 방금 그 마법이 퍼부어지기까지는 불과 30초라는 시간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심지어 마법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쿠구구궁!
리아는 연달아 온갖 고화력 마법들을 캐스팅했고, 격렬한 마법 폭격이 동굴을 뒤흔들었다.
파티원들 중에서 가장 떨어지는 레벨대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강력한 공격들이었다.
“후, 이건 뭐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 되네…….”
쑥대밭이 된 동굴의 한가운데에서 로덴이 중얼거렸다.
에일과 알리사야 함께 사냥을 하며 리아의 능력을 봐왔다지만, 로덴은 오늘 그녀를 완전히 처음 본 상태였다.
한데 그녀는 위력을 대가로 캐스팅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대형 마법들을 간단한 마법 마냥 계속해서 쏘아냈다.
이런 재능의 마법사라면 아르메니아에서 본 적이 없음은 물론이고, 랭커들 사이에서 이야기조차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파아아앗!
그때 하얀 빛과 함께 치유가 들어왔다.
전투를 치르며 떨어졌던 로덴과 에일의 체력이 단번에 가득 찼다.
거기에 축복을 비롯한 각종 버프 스킬까지 부여되었고, 한결 가벼워진 움직임이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개인 전투력이 없다시피 함에도, 치유사가 귀족이라 불리는 이유.
이처럼 파티원들에게 힐링은 물론 강력한 버프까지 걸어 줄 수 있는 능력 때문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한술 더 떠, 알리사는 보통의 힐러들과는 달랐다.
빠악!
알리사가 스태프를 휘두르자, 마법사를 노리고 달려들던 언데드가 동굴의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그녀는 아직 상황 대처에 미숙한 리아를 몬스터로부터 완벽히 보호해 주기까지 했다.
전문 힐러직이면서도 근접 전투를 굉장히 능숙하게 수행하는 그녀의 능력 덕이었다.
그 덕분에 전위에 선 에일과 로덴은 후방 보호에 대한 걱정을 어느 정도 던 상태에서 싸워나갈 수 있었다.
‘진짜 재미있다니까…….’
전투 중이던 로덴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자신을 제외하면 다른 세 명의 파티원 모두 그동안 사람들 앞에서 두각을 드러내지 않았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잠재력은 이미 전원이 랭커나 다름없는 수준.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이었다.
콰과광!
한껏 탄력을 받은 파티는 거침없이 던전을 돌파해 나갔다.
다른 파티였다면 엄두도 못 낼 만큼 굉장히 빠른 속도였다.
던전의 난이도상 같은 인원수는 물론, 어지간한 10인 이상의 파티가 와도 이렇게 속전속결로 해치우긴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게 에일과 로덴의 레벨이 하나씩 추가로 올라갔을 때 즈음.
일행은 중간 휴식을 취하기 위해 안전한 장소에서 잠시 멈춰 섰다.
“허기 수치도 곧 다 떨어질 듯한데, 여기서 식사까지 하고 가죠.”
“그럼 제가 준비할게요.”
이번에도 요리 랭크가 높은 알리사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던전에 진입한 뒤 줄곧 파티의 식사를 책임졌는데, 높은 요리 랭크 덕에 버프 효과까지 있는 음식을 섭취할 수 있었다.
“알리사 님! 이번엔 저도 도울게요!”
“고마워요. 그럼 저쪽 좀 부탁드릴게요.”
리아도 나서 요리를 거들기 시작했고, 그동안 에일과 로덴은 다시 장비를 정비한 뒤 길을 나섰다.
“그럼 저흰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하세요.”
분명 휴식을 취하려 멈춰 선 것이었는데, 갑자기 그들이 다시 떠나는 이유.
출발에 앞서 미리 내부 정찰에 나서기 위함이었다.
이곳 ‘사룡의 무덤’은 다른 유저들에게 발견되어 정보가 풀려 있는 던전도 아니었고, 무덤을 관리해 오던 노움들조차도 내부의 지리는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구조 자체도 단순한 일자형이 아닌, 사방으로 아주 복잡하게 얽혀 있는 식이었다.
그 때문에 그들이 직접 길을 찾아 나가야 했다.
‘땅이 오염된 상태로 봤을 때 의심 가는 지점부터 중점으로 이동 중이긴 하지만… 출발하기 전에 틈틈이 길을 봐 두는 편이 좋으니까.’
촤륵!
에일과 로덴은 펼쳐든 간이 지도를 표기해 가며 길을 찾았다.
두 명이 따로 움직이는 만큼, 들키지 않고 숨어 다니기에 조금이나마 더 수월했다.
그렇게 그들이 몬스터들의 눈을 피해 복잡한 던전의 지형을 머릿속에 새기고 있던 도중.
마주친 깊은 골짜기의 사이, 세 갈래로 나뉜 다리가 놓여 있었다.
그 너머를 가득 막고 서 있는 언데드들의 무리에 둘은 재빨리 몸을 감췄다.
“건너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것 같은데… 여기서 더는 못 가겠는데요?”
“음, 아무래도 그렇네요.”
둘이서 저 많은 무리와 싸움을 벌이긴 부담스러웠다.
무엇보다 녀석들을 모조리 쓰러뜨린다고 해도, 그 소리를 듣고 다른 언데드들이 더 몰려올 수도 있었다.
지금으로선 무리하지 않고 물러나야 했다.
“여기서 남쪽으로 갔을 땐 허탕을 쳤으니까, 이쪽 방향 위주로 가면 되겠네요. 그나저나 처음 들었던 것보다 훨씬 난이도가 높은걸요.”
“맞아요. 깊이 들어갈수록 더 심해지는 게… 아무래도 오염 때문에 몬스터의 개체수도 같이 늘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이번 퀘스트를 의뢰한 노움에게 처음 던전에 대한 정보를 전해 들었을 때보다, 훨씬 난이도가 높았다.
안 그래도 까다로운 던전에서, 대지 오염까지 발생하니 더욱 골치가 아파진 것이다.
“그럼 이만 돌아가죠.”
“잠깐! 저 아래에…….”
흠칫 놀란 로덴이 골짜기 아래를 가리켰다.
그러자 에일의 시선도 자연히 깊게 내려선 절벽 아래로 향했다.
‘보인다……!’
짙은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기다란 물체.
거대한 사룡의 꼬리였다.
“저기 있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