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지하 세계 (3)
쿠구구궁!
입구로 향하는 기다란 통로에서 연달아 폭음이 터져 나왔다.
본거지를 급습한 교단의 성기사단과 황혼회의 신도들이 격렬히 전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놈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이곳이 핏빛 황혼회가 지닌 최대의 시설이라 그런지, 빛의 기사단이 조금씩 밀리는 상황이었다.
덤벼드는 이들의 수준 자체도 황혼회의 심장부인 만큼, 훨씬 강력한 적이 많았다.
더군다나 상황 자체가 교단에게 포위된 상태에서 필사적으로 빠져나가려는 것이었으니, 더욱 제압하기에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더 버텨! 곧 있으면 심문소의 지원이 온다!”
선두에 서 있던 성기사가 외쳤다.
어렵사리 행방을 찾은 황혼회의 교주를 놓치지 않으려면, 단 한 곳의 통로도 밀리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그때, 후방에 있던 흑마법사가 오랜 캐스팅을 끝냈다.
그가 쏘아낸 거대한 검은 구체는 순식간에 그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콰앙!
“크아악!”
통로를 막고 있던 성기사들이 나가떨어졌다.
범위 안에 있던 황혼회의 광신도들도 함께 휘말려 목숨을 잃긴 했지만, 그 사실에 대해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드디어 뚫어냈군.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잠깐, 저쪽에……!”
“무슨……?”
갑작스레 느껴진 인기척.
그 이상의 엄청난 살기가 그들을 엄습해 왔고, 통로에 있던 이들은 모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통로의 저편.
붉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자가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두 눈은 검은 천으로 가려져 있었고, 한 손엔 기다란 낫을 들고 있었다.
중무장한 갑옷 차림이 아닌 걸 보아 성기사단은 아닌 듯했지만, 그녀가 차려입은 의복엔 붉은 십자가와 함께 교단의 상징이 새겨져 있었다.
“네… 네놈도 교단의 졸개냐?”
남자가 검을 치켜들며 외쳤다.
분명 상대는 고작 한 명뿐인 데다가, 앞도 볼 수 없는 장님이었다.
하지만 그의 몸은 이미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어 있었다.
“악마에게 영혼을 맡긴 이단들이군요.”
“닥쳐라, 쓰레기들!”
그가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기다란 통로의 끝에서 다가오고 있는 그녀에게 마구 뛰어드는 모습.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모든 존재는 죽음에 먹히기 마련. 태어난 순간부터 창조주의 의지에 따라, 죽음을 선고받은 죄인들이죠.”
어두운 통로를 통해 천천히 다가오는 여자.
그녀는 곧 완전히 빛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겠습니다.”
화르륵!
그녀의 기다란 낫에 성화가 피어올랐다.
소리를 지르며 검을 휘두른 녀석의 목이 가장 먼저 뎅겅 베여 나갔다.
통로에 가득하던 신도들이 일제히 달려들고, 흑마법사들이 마법을 준비했다.
낫이 휘둘러질 때마다 끊임없이 그들의 피가 솟구쳤다.
맹렬한 화염이 죄인들을 불태웠고, 뜨거운 열기가 통로를 가득 채웠다.
털썩!
모조리 베여 쓰러졌고, 끈적한 피가 강을 이루었다.
이곳에서 여전히 의식이 붙은 채 서 있는 건 오직 두 명뿐.
마지막 남은 남자의 옆구리에도 기다란 검이 박혀 있었다.
“커헉……!”
황혼회의 신도가 여자에게 목을 붙잡힌 채 벽에서 버둥거렸다.
“악마의 꾀임에 넘어간 이단도, 신을 섬기는 신자도. 죄의 경중만이 있을 뿐……. 우리는 모두 고통으로써 증명하고 속죄해야 합니다.”
“끄아아아악!”
파고든 칼날에서 백색 불꽃이 피어올랐고, 성화가 속살을 지지기 시작했다.
옆구리 속에서 피어오르는 불꽃, 그 참을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처절하게 몸부림쳤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비명을 지를 힘조차 없어지자, 남자는 죽음을 구걸하기 시작했다.
“주, 죽여 줘.”
덜덜 떨리는 광신도의 눈가에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여자는 조용히 손을 뻗어, 남자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눈물을 거두세요. 더 이상 울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의 눈물을 당신의 죄와 함께 불태워 줄 테니.”
콰악!
더욱 깊숙이 박힌 검.
남자의 눈이 뒤집히며 입이 뻐끔거렸다.
죽음이 거의 다가오는 순간엔 강력한 신성 마법이 그를 감쌌고, 고통은 영원할 듯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버둥거리던 남자는 본능적으로 허리춤의 단검을 집었다.
“죽어……!”
콰악!
여자의 심장에 깊숙이 박힌 단검.
핏줄기가 후두둑 떨어지며 몸이 휘청였다.
그녀의 입가에서도 피가 주르륵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비명을 토해 내지도, 쓰러지지도 않았다.
단지 천천히 입을 열 뿐.
“저 또한 죽어 지옥에 가리니, 기꺼이 당신을 구원하겠습니다.”
* * *
“모든 입구를 봉쇄해 뒀습니다, 집행관님. 미리 파악해 둔 비밀 통로들은 모두 파괴해 둔바, 녀석이 빠져나갈 구석은 없을 겁니다.”
“수고했다.”
황혼회의 본거지 안으로 진입한 젊은 남자가 짤막하게 말했다.
가장 앞장서고 있는 남자의 이름은 페드로, 대륙에 다섯뿐인 루의 집행관 중 하나였다.
이곳이 사실상 황혼회의 마지막 본거지인 만큼, 이번 기습 작전엔 그를 포함해 무려 두 명의 집행관이 직접 나서게 되었다.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선 페드로는 곧 건너편 통로에 들어섰고, 한바탕 끔찍한 살육이 이루어진 현장을 마주할 수 있었다.
온통 핏빛으로 점철된 바닥과 벽.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훼손된 시체들과 고약한 냄새로 가득했다.
족히 수백은 찢겨 죽은 듯한 광경이었다.
페드로는 이 지옥도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여자와 마주했다.
“세턴, 또 네 짓이냐?”
인상을 찌푸린 그가 말을 뱉었다.
그러자 낫을 든 여인, 세턴이 고개를 돌려 페드로를 바라봤다.
“오셨군요.”
세턴이 옅은 미소를 띠며 그를 반겼다.
그녀의 정체 역시 페드로와 같은 교단의 집행관.
빛의 교단 내의 최대 결정권자이자, 대륙 최강의 전력들이었다.
“여신님의 넓은 관용이 없었다면, 너 또한 이단으로 불태워졌어도 할 말이 없었을 거다.”
페드로는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철저한 원리주의자인 그는 차마 그녀의 사고방식과 행동들을 견딜 수 없었다.
빛의 교인으로서 죄인들을 심판하고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만이 진정한 사명이거늘.
교단의 수많은 신도는 물론, 같은 집행관들 사이에서도 신의 뜻에 대해 해석하는 방식이 모두 다르다고는 해도, 세턴은 그 정도가 조금 과했다.
하지만 세턴은 그의 그러한 태도에 익숙한 듯 가볍게 웃어넘겼다.
“글쎄, 과연 그럴까요? 만약 제 믿음이 틀렸다면 집행관으로서 설 수 없었겠지요. 모두에겐 여신에게 향하는 길이 있고, 그 길을 충실히 걸어 나가면 그만입니다. 그분의 뜻을 전해받아, 이곳에 함께 서 있다는 게 가장 중요하겠죠.”
“…….”
페드로는 여전히 그녀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봤다.
잠시의 묘한 침묵을 깨고, 세턴이 먼저 입을 열었다.
“황혼회의 교주는 내버려 두실 건가요? 형제여.”
“…가지.”
가장 중요한 건 여신의 명.
본거지 안에 숨어 있을 황혼회의 교주를 붙잡는 게 우선이었다.
이단심문소의 심판관들이 합류한 뒤, 이미 시설 내에 포진해 있던 황혼회의 광신도들은 대부분 제압이 끝난 상태.
콰앙!
두 명의 집행관이 문을 부수고 들이닥쳤다.
“여기 있었군, 교주. 아직도 발악하고 있었나?”
“웃기지 마라! 끝장나는 건 네놈들이니까!”
촤아아악!
황혼회의 교주에게로 검은 기운이 몰려들었다.
그는 어느 틈인지 품속에 있던 정체 모를 검은 보주를 꺼내들어 사용했고, 주변에 짙은 검은 안개가 뒤덮이기 시작했다.
교주는 스스로 사용한 아티팩트로 인해,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하지만 곧 두 집행관의 표정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쩌저저적!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악마.
탐욕의 악마, 베나론.
모습을 흉내 낸 악마의 아종 따위가 아닌, 진정한 악마가 이곳에 직접 나타난 것이다.
쿠웅!
베나론이 가볍게 손을 휘젓자 강력한 충격파가 발생했고, 그 여파로 인해 둘이 나가떨어졌다.
“크윽……!”
바닥을 굴렀던 두 집행관이 서둘러 일어났다.
그들은 떨어뜨린 무기를 다시 들기 위해 손을 뻗었다.
츠츠츠츳!
그러나 집행관들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췄다.
움직임뿐만 아니라, 의식 자체가 멈춰 버린 모습.
아무리 강한 힘을 지녔다 한들, 직접 모습을 드러낸 신격체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집행관 둘이라… 나쁘지 않군.”
베나론이 그들을 내려다보며 웃음을 흘렸다.
빛의 여신이 아끼는 최강의 말들.
직접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현신은 오래 유지할 수 없었고, 베나론은 지체 없이 팔을 뻗어 그들을 죽이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콰아아!
새하얀 빛이 검은 안개를 몰아내며 방 안을 밝혔다.
당황한 베나론의 눈앞에 나타난 여신의 모습.
찬란한 백색 갑옷을 두른 정의와 빛의 여신, ‘루’였다.
“설마 직접 모습을 드러낼 줄이야. 사도를 만들어 낸 탓에 한동안은 직접 움직일 수 없을 줄 알았는데 말이지.”
베나론이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훑었다.
자신이야 소모성 아티팩트를 사용해 모습을 보였다고는 하나, 루는 아무런 보조적인 수단도 없이 직접 강림해 진체를 드러냈다.
굉장한 영향력 소모가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
“여긴 뭣 하러 나타난 거지? 집행관 둘이 그만한 가치를 지녔을 리는 없을 테고.”
베나론이 질문을 던져왔다.
하지만 루는 그런 녀석을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
“네 소중한 사도에게 손을 댄 것이 그리 화가 났나? 아니면 이 또한 광기의 산물인가? 어느 쪽이건 어리석구나.”
베나론은 기분 나쁜 웃음이 걸린 입을 쩍 벌리며 다가섰다.
녀석의 괴이한 팔이 루에게 뻗어졌다.
촤아악!
루는 장검을 휘둘러 놈의 팔을 쳐냈다.
베나론에게서 떨어져 나간 팔이 바닥에서 꿈틀였다.
치이익!
하지만 잘려 나간 녀석의 팔은 금방 재생되었고, 베나론에게서 의기양양한 미소가 지어졌다.
“우린 영원의 존재. 서로를 죽일 수 없다. 설령 이 땅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었다 할지라도.”
“영원이라… 큰 착각을 하고 있구나.”
루가 가소롭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베나론의 거대한 덩치 탓에 위를 올려다보는 모양새였지만, 거만한 그녀의 눈빛은 눈앞의 하찮은 악마를 꿰뚫어 보았다.
“네가 존재할 수 있던 시간은 고작 1년뿐이었다. 그조차도 절반쯤 잠들어 있었지.”
촤악!
치지지직!
이번에도 검은 피를 뿜으며 떨어져 나간 녀석의 오른팔.
“아니……?”
하지만 놀란 베나론은 흠칫 멈춰 섰다.
잘려져 나간 팔이 재생되지 않았다.
거기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베나론은 느낄 수 있었다.
단순히 이곳에 드러낸 육체가 아닌, 진정한 자신의 실체까지도 큰 타격을 입었다는 것을.
“네놈……! 이게 어떻게 된 거냐!”
격분한 베나론이 왼팔을 뻗어 루를 덮치려 들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녀석의 공격은 루를 감싸고 있는 찬란한 빛의 장막에 막혀 맥없이 튕겨져 나갔다.
“반쪽짜리 신격이 제대로 알 리가 없지. 게임의 룰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네 역할은 여기까지다.”
화르륵!
루의 장검에 성화가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