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투기장 (4)
“커헉…….”
주르륵 밀려난 클로에가 피를 덜컥 토해냈다.
옆구리에 길게 생겨난 또 다른 상처.
예상치 못한 접전에 그녀의 체력은 어느새 40퍼센트 이하로 떨어져 있었다.
반면 신성 마법 계열의 회복기로 서서히 오른 에일의 체력은 벌써 25퍼센트를 넘어서는 중이었다.
조금 전과는 반대로 상황이 역전될 위기.
‘말도 안 돼……!’
클로에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녀는 워로드 속 자신의 실력에 대한 믿음을 굉장히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랬기에 누구보다도 지금의 사태를 믿을 수 없었다.
강자에게 패배하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고작 80레벨대의 유저에게 당하고 있는 꼴이라니.
단순히 플레이어로서의 자존심이 상하는 걸 넘어서, 멘탈이 산산조각 나 버릴 만한 일이었다.
‘뭔가… 흐름을 가져온 건가?’
반면 전투에 몰입했던 에일은 반쯤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싸움이 끝날 수도 있었던 치명적인 공격을 막아낸 순간을 기점으로, 왠지 전보다 더욱 몸이 가벼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딘지 모르게 스스로 느껴지는 미세한 차이.
변하고 있는 에일의 동조율과 연관이 있었다.
처음 게임을 시작했을 당시, 강제로 99퍼센트로 낮췄던 에일의 동조율이 100퍼센트에 가까워지자 변화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아직 미세한 차이에 불과한지라 지켜보는 이는 물론, 에일도 뭔가를 느끼기는 힘들었다.
“와아아아!”
“끝내주잖아!”
기대 이상의 접전에 열광한 관중석이 떠들썩해졌다.
시끄럽게 떠드는 그들에 인상이 구겨진 클로에는 고개를 돌려 관중석을 노려봤다.
하지만 그때, 관중들의 말소리 속에서 에일이라는 이름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잠깐… 네가 에일이라고?”
멈칫한 클로에가 앞에 서 있는 에일을 바라봤다.
에일은 그녀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이야기를 듣고 나자 확실히 알 것 같았다.
그의 정체는 에스마이어의 미친 이단심판관 에일.
먼저 이단심판관이라는 직업에, 레벨대에 비해 말도 안 되는 실력도 그렇고, 단번에 상황이 납득이 갔다.
‘그래, 분명 로덴을 눌렀다고 했지…….’
영상을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그가 로덴을 쓰러뜨렸다던 사실은 이미 전해들은 바가 있었다.
“좋아, 차라리 잘됐어. 여기서 널 누르면 내 몸값은 더 오르겠지.”
파앗!
그녀가 돌진기를 사용해 빠른 속도로 달려들었다.
정면으로 다가서는 클로에를 앞에 둔 에일은 오히려 그녀를 향해 마주 달려 나갔다.
장검을 들었음에도 오히려 간격을 좁혀 든 에일.
이제 무기를 스왑하기엔 늦은 타이밍이었기에, 그의 실책성 플레이에 클로에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빠악!
“컥……!”
에일의 어깨에 강타당한 그녀의 얼굴이 처참히 일그러졌다.
단순한 부딪힘이 아니었다.
그가 80레벨을 달성한 뒤, 여덟 번째로 습득한 스킬.
[극: 어깨치기(영웅)]
원래 상급의 스킬로 유명한 ‘어깨치기’는 데미지를 주며 상대를 밀쳐내는 단순한 기술이었다.
하지만 영웅 등급을 지닌 어깨치기는 거기에 더해 위력이 증가함은 물론, 부가 효과로 상대에게 스턴을 먹일 수가 있었다.
지금처럼 장검을 들었을 때, 상대가 간격을 좁혀올 것에 대한 대응책으로 체술 계열의 스킬을 익혀 둔 것이다.
“아, 안 돼…….”
머리를 쥐어잡은 클로에가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정신을 차리려 애를 써봤지만, 시스템상 강제된 스턴의 앞에서 어쩔 방법은 없었다.
그사이 쿨타임이 돌아온 일섬.
에일은 양손의 장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이건 절대……!”
콰과과과!
일섬의 검격이 그녀를 휩쓸었다.
체력이 바닥난 클로에가 백색 불꽃과 함께 튕겨져 나갔고, 그녀는 빈사 상태가 되어 축 늘어졌다.
일어설 힘은 물론, 발악하며 떠들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에일은 그녀의 앞에 서 목을 내려쳤다.
콰악!
뺨에 길게 튄 핏줄기들이 주륵 흘러내렸다.
형편없이 쓰러진 클로에는 곧 상대 팀 자리로 전송되었고, 에일은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겁에 질린 듯 창백한 얼굴이 되어 버린 상대 팀원들을 응시했다.
“다음.”
* * *
[대장전 결투에 승리하였습니다!]
[‘빛의 심판자, 루’가 당신의 멋진 활약에 찬사를 보냅니다!]
[여신의 총애 +1.00% (현재 87.85%)]
[빛의 교단 공헌도 +1,500]
[신앙심 스탯 +5]
[광기 스탯 +5]
[칭호 ‘리버스 스위퍼’를 획득하였습니다!]
[칭호 ‘투기장의 대가’를 획득하였습니다!]
[칭호 ‘연승의 신’를 획득하였습니다!]
나머지 세 명이 화형대 위에서 활활 불타 버린 뒤.
역스윕 승리를 거둔 에일의 앞에 메시지들이 떠올랐다.
만족스럽게 미소를 띤 그는 자신의 전적창을 확인했다.
[30승 0패(승률 100%), 1,714점]
30연승을 달성하며 마의 1,700점을 넘어선 모습.
팀원들이 전멸한 상태에서 혼자의 힘으로 역스윕을 달성한 덕에, 추가 보너스를 받을 수 있었고, 평범한 승리보다 더욱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번 투기장의 목적이었던 ‘파쇄의 인장’을 구매하는 데 필요한 5만 포인트도 모두 모았다.
‘좋아, 이걸로 한발 더 다가설 수 있겠어.’
이렇게 힘든 과정을 거치며 얻었듯, 파쇄의 인장이라면 상당한 희소 아이템이었다.
그리고 퀘스트에서 이런 아이템을 요구했다는 것은 그만큼 보상 또한 클 확률이 높았다.
파앗!
에일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단번에 결투장을 빠져나왔다.
괜히 인파가 몰려 복잡해지기 전에, 전용 상점에 들른 뒤 투기장을 빠져나가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승부가 갈림과 동시에 그가 사라지자, 감사인사를 전하려던 팀원들은 멍하니 멈춰 섰다.
관전하던 유저들도 또다시 사라진 에일을 찾기 위해 우르르 빠져나갔다.
“이거… 정말 이겨 버렸네요…….”
흑랑의 길드원이 머리를 긁적였다.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던 다륜은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렸다.
“재밌네. 로덴을 쓰러뜨렸다는 영상이… 마냥 거품만은 아닌걸.”
* * *
메디아의 투기장에 한바탕 피바람이 불고 난 뒤.
다시 하얀 숲으로 향한 에일은 하이 엘프들에게 파쇄의 인장을 전달했다.
파쇄의 인장을 건네자 그들은 의식을 통해 지령서에 걸려 있던 굳건한 봉인을 풀 수 있었다.
에일은 크게 기뻐한 하이 엘프들에게 보랏빛 스킬북들을 보상으로 받았고, 적잖은 양의 골드도 함께 챙길 수 있었다.
하지만 진짜 보상은 그게 아니었다.
바로 다크 엘프의 지령서에 담겨져 있던 내용.
그곳엔 에일의 예상 이상으로 아주 많은 정보가 들어 있었다.
그중 가장 먼저 적혀 있던 건, 원래 이 지령서를 지닌 다크 엘프가 다음에 향하려던 여러 목적지였다.
정령이 잠든 성지를 포함해 다양한 위치 정보가 적혀 있었고, 알룬드는 바로 그 정보들을 토대로 놈들의 추적에 나설 것이라고 했다.
동시에 본인들이 원했던 수준의 확실한 물증이 잡힌 만큼, 다크 엘프들에게 따로 엄중한 경고를 전할 것이라 했다.
물론 경고 선에서 단념할 일이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터.
자칫하면 엘프들 간에 전쟁까지도 날 수 있어 보이는 사안이었고, 알룬드 역시 전면전을 불사한 듯한 모습이었다.
“뭐, 일단 그쪽은 엘프들에게 맡기고…….”
칠흑같이 어두운 공간 속.
횃불을 든 에일이 아래를 살피며 조심스레 발을 내딛고 있었다.
‘거기 적혀 있던 것 중 진짜 대박은 따로 있었지.’
지령서의 내용 중, 마지막 즈음에 적혀 있던 진짜 핵심.
바로 여지껏 발견된 적 없는 새로운 지역에 대한 정보였다.
다크 엘프들은 그간 사령석을 이용해 심각한 오염을 발생시켜 왔고, 어떤 곳은 그로 인해 커다란 지반 침식이 발생했다고 했다.
문제는 바로 그 지반 침식이 벌어진 곳 아래에서 새로운 지역을 발견했다는 것.
‘지령서 마지막에 적힌 짤막한 문단이라,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적혀 있지는 않았어. 하지만 위치만큼은 확실히 적혀 있었단 말이지.’
타악!
에일은 바로 그 지령서에 쓰여 있던 입구를 통해, 무너진 지반 아래로 향하는 중이었다.
침식으로 만들어진 통로인 만큼 여러모로 불안한 형태의 지형이긴 했지만, 도중에 막히는 일 없이 아래로 계속해서 이어져 있었다.
덕분에 최소한 정보가 거짓일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투기장의 영상은 스튜디오에서 제작 중이고… 이번 정보만 맞으면 당분간 걱정은 없을 텐데…’
횃불을 든 에일이 거친 땅 사이를 내려가며 균형을 잡았다.
오염으로 인해 중간중간 흐물흐물해진 바위가 있어 미끄러지지 않게 주의해야 했다.
솔직히 다시 올라올 때는 어느 세월에 올라오나 막막하긴 했지만, 지금 그걸 따질 때는 아니었다.
금지된 사원에서 보았듯, 새로운 던전의 최초 발견은 엄청난 보상을 가져오기 마련이었다.
더군다나 지금 이 정보를 얻은 건 오로지 지령서의 봉인을 파훼한 에일뿐.
다른 경쟁자는 아예 없는 시점이었다.
연관된 퀘스트의 레벨로 보아 100레벨대 근처는 되어 보였고, 그러면 쓸어담을 수 있는 보상의 규모는 더욱 커진다.
타악!
“도착한 건가?”
어둡기만 하던 통로의 끝.
훌쩍 뛰어내린 에일이 아래로 내려서자, 사방에서 은은한 빛이 비춰오기 시작했다.
워로드 내에서 은은히 빛나는 바닥과 천장을 가진 장소는 일반적으로 지하의 던전이나 새로운 지형이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휘잉 불어오는 바람에, 에일은 곧 자신이 높은 절벽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절벽이잖아? 여긴……?”
절벽의 끝.
아래를 내려다본 에일은 멍한 얼굴이 되었다.
최초로 발견된 새로운 던전이 나타나 주기를 기대했지만, 에일이 마주한 건 차원이 달랐다.
아래에 펼쳐진 어마어마한 너비의 땅.
그리고 드넓게 퍼져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여러 개의 지하 도시가 빛을 내고 있었다.
새로운 도시… 아니, 그를 넘어선 새로운 지역의 발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