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투기장 (3)
털썩!
세 번째 출전을 나섰던 팀원이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같은 도적 간의 싸움이었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크윽…….”
“역시 안 되는 건가.”
세 명의 팀원이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나름 투기장의 결투에 일가견이 있는 이들이었지만, 그녀를 상대하기엔 턱도 없이 부족했다.
압도적인 실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버렸다.
그런 반면, 상대의 남은 체력은 96퍼센트.
세 명이 달려들어 제대로 체력을 깎기는커녕, 고작 뺨에 작은 상처를 주는 것이 전부였다.
‘완전히 괴물을 만나 버렸네.’
유심히 싸움을 지켜보던 에일이 그녀를 바라봤다.
레벨만 해도 170을 넘는 고레벨 유저.
지금 시점에 준랭커까지 들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두말할 여지 없이 굉장히 높은 레벨이었다.
거기다 그녀는 소속 길드도 없이 활동 중인 개인 유저였다.
점점 사냥터가 한정되어 가는 고레벨 유저임에도 길드 없이 활동할 수 있을 만큼, 본인의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것.
“하아, 기분이 끝내주는걸.”
홀로 결투장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클로에가 히죽였다.
오늘 처음으로 발을 들여 본 투기장이었지만, 누구보다도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혼자서 모두를 정리해 버리는 스윕 플레이의 쾌감이란. 진작 대장전으로 갈아탈 걸 후회가 될 정도였다.
‘그나저나 이상하게 구경꾼들이 꼬이고 있단 말이지.’
클로에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여태껏 텅 비어 있던 결투장의 관중석 쪽이, 이번 결투에서는 사람들로 꽤나 차 있었다.
“여기, 이쪽이야! 아직 안 끝났어.”
“왜 갑자기 장소가 바뀌어 가지고는.”
지금도 어디선가 찾아온 유저들이 하나둘 입장해 모여들고 있었다.
심지어 그중엔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유명 인사도 섞여 있었다.
“여긴가?”
짙은 검은 머리의 남성이 안으로 들어섰다.
흑랑의 다륜.
12강 길드의 수장이었다.
동시에 그는 소수정예로 유명한 흑랑의 길드장인 만큼, 무려 랭킹 13위를 차지하고 있는 최상위 하이랭커이기도 했다.
“굳이 직접 찾아오실 것까지야…….”
“어차피 지금은 남아도는 게 시간인데 상관없지.”
뒤를 따르는 길드원에게 다륜이 무심히 말했다.
명예 점수 2,101점의 소유자인 그는 높은 점수만큼 그에 걸맞는 상대를 매칭하려면 많은 시간이 소모되었다.
일정 점수대가 넘어서면 전 대륙의 투기장과 연동되어 매칭이 된다고는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대상이 적으니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륜은 그 지루한 매칭 대기 시간 동안 기다릴 겸 구경을 온 것이었다.
그가 관중석에 다가와 앉자, 주변의 유저들이 술렁임은 물론.
‘다륜이……? 설마 날 보러 온 건가?’
결투장에 서 있던 클로에도 동요했다.
고작 1,600점대 대장전이 치러지고 있는 무대에서, 하이 랭커가 난데없이 등장했으니 놀랄 만도 했다.
‘하긴 30연승으로 곧바로 1,700점을 달성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니까. 어디 스카웃이라도 하려는 모양인데… 다른 12강도 아니고, 흑랑 길드 정도라면 들어갈 만하려나.’
유명 길드장이 직접 결투를 보러 찾아오자 클로에의 기분도 한껏 올랐다.
그렇게 그녀가 속으로 계약 조건까지 떠올리고 있을 때.
“이거 은근 긴장되네.”
자신의 차례가 된 에일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하지만 그가 걸어 나가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팀원들은 아주 작은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상대팀 역시 팀원 하나를 잘 만난 덕에, 이미 이긴 것처럼 떠들썩하게 축제 분위기였다.
반면 그를 위에서 지켜보고 있는 관중석에서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양쪽 다 29연승입니다. 점수대에 비해 과한 상대인데 저 여자를 이길 수 있을까요? 170레벨이면 습득 스킬 수가 두 배나 차이 난다는 건데, 아무리 요즘 말 많은 에일이라 해도…….”
“그야 지켜봐야 알겠지. 여긴 필드가 아니라 투기장이니까.”
다륜과 그의 길드원뿐만이 아니었다.
지켜보고 있는 대부분의 이들은 힘든 상황이라는 걸 알지만, 오히려 에일의 쪽에 묘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스펙 자체는 크게 뒤떨어지지 않아. 장비는 오히려 내 쪽이 더 좋은 편이고… 문제는 스킬인데.’
결투장에 오른 에일은 장검을 꺼내 쥐었다.
지금 상황에서 스킬 개수의 차이는 절대적이었고, 심지어 그녀가 팀원들을 농락하며 보였던 패턴은 몇 가지 되지 않았다.
패링과 연계되는 출혈 데미지를 사용한다는 것과, 대응 찌르기와 몇몇 패시브를 유추할 수 있다는 것 정도.
무려 혼자서 세 명을 쓰러뜨렸음에도 많은 패를 보이지 않았고, 특화 직업도 아니라 예상이 어려웠다.
[네 번째 결투가 시작되었습니다!]
“기껏 사람도 많이 모였는데, 마지막이 이래서야 김이 새잖아.”
에일의 레벨을 확인한 클로에가 피식 웃으며 다가왔다.
카운트다운이 끝나고 결투가 시작되었음에도, 단검을 빙글 돌리며 여유만만한 모습을 보였다.
이전의 팀원들은 그런 그녀의 태도에 화를 내며 달려들었지만, 에일은 굳이 휘말려 주지 않았다.
차분히 이단 지정 스킬을 미리 사용해 둘 뿐.
‘그렇게 나와 준다면 오히려 고맙지.’
실력도 스펙도 여태껏 만난 이들 중에서 가장 난적이었고, 방심해 주지 않으면 이기기 버거운 상대였다.
처음에 보일 틈을 제대로 활용해야 했다.
“안 오면 먼저 간다!”
자세를 취한 클로에가 왼 손의 단검을 에일에게 던졌다.
에일은 단숨에 코앞까지 날아온 단검을 장검을 쳐냈고, 빙그르 튕겨져 나간 단검은 그의 뒤편으로 날아갔다.
파앗!
바로 그때, 튕겨져 나간 단검에서 클로에가 번쩍 나타났다.
투척한 단검이 있는 곳으로 도약할 수 있는 스킬의 효과.
배후를 잡게 된 그녀는 곧바로 등을 향해 단검을 찔렀다.
‘이런!’
급히 반응해 돌아선 에일은 뒤로 훌쩍 물러섰다.
하지만 그사이 공격은 적중했고, 등에 얕은 상처를 남겼다.
‘꽤 단단하잖아……?’
체력바를 확인한 클로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적게 줄어든 체력.
투기장의 레벨 보정이 없었다면 그녀의 단검에 스치기만 해도 너덜너덜해졌을 체력이었지만, 이곳에서는 아니었다.
높은 등급의 장비와 스킬, 추가 스탯까지 지닌 에일의 투기장 스펙은, 훨씬 높은 레벨대를 지닌 그녀의 입장에서도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수치가 아니었다.
‘생각보다 반응도 빠르고… 방어 쪽에 치중한 녀석인가? 조금 더 과감하게 들어가도 상관없겠어.’
방어에 많은 투자를 했다는 건, 곧 오래 가지고 놀기 좋은 장난감이라는 것.
클로에는 에일의 긴 장검 사이를 거침없이 파고들며 간격을 좁혀왔고, 에일은 허둥지둥 공격을 막으며 주르륵 밀려났다.
변화무쌍한 쌍수 단검의 궤적이 코앞까지 바짝 접근한 채 휘둘러졌다.
한 자루의 장검만으로는 막기 버거운 상대.
하지만 자신의 공격에 취한 그녀는 필연적으로 틈을 보일 수밖에 없었고, 에일은 그 틈이 생길 순간만을 기다렸다.
‘지금이다!’
파앗!
깊게 찔러진 단검과 함께 에일의 역극 스킬이 발동됐다.
“뭐……?”
허공을 가른 클로에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대놓고 스킬을 사용했다면 그녀도 반응할 수 있었겠지만, 클로에는 현재 무게 중심이 과하게 앞으로 쏠린 상태.
그 덕에 에일은 완전히 그녀의 뒤를 잡을 수 있었다.
콰과과과과!
강력한 검격과 성화가 뻗어 나가 클로에를 정통으로 베었다.
그녀는 일섬에 휘말려 나가떨어졌고, 에일은 곧바로 장검을 휘둘러 불의 세례를 토해 냈다.
키릭!
날아가던 상태에서 곧바로 팔을 짚은 클로에.
하지만 쏟아지는 불의 범위가 워낙 넓어, 움직임만으로 몸을 빼내기엔 무리였다.
어쩔 수 없이 여태 아껴두던 스킬을 사용해 성화를 피해 냈다.
“오케이, 탈출기 하나 빠졌네.”
“이 자식이…….”
클로에가 이를 뿌득 갈았다.
스스로 방심했다고는 하나, 방금의 움직임은 절대 이 점수대의 수준이 아니었다.
허용한 공격 한 번에 체력의 40퍼센트가 날아갔고, 심지어 에일은 장검의 ‘서리 약탈자’ 효과로 그녀의 속도까지 일부분 뺏어올 수 있었다.
‘제대로 된 공격력 보정 스킬도 없을 텐데 어떻게… 운으로 이 점수대까지 올라온 건 아니라 이건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그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엇보다 한참 뒤떨어지는 상대에게 이런 공격을 허용해 버렸다는 사실이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었다.
“장난은 끝났어… 바로 끝내 주마.”
‘온다.’
터엉!
발을 구른 클로에가 두 검을 휘둘렀다.
십자를 그리며 날아오는 단검을 에일은 무기를 들어 막아 냈다.
하지만 그녀는 예상했다는 듯이 간격을 한차례 더 좁혀 왔고, 몸을 낮추며 다리를 뻗었다.
빠악!
옆구리에 꽂힌 연환각.
큰 충격을 입은 에일은 속수무책으로 뒤로 날아가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상대가 나가떨어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홀드!”
푸욱!
그림자가 뾰족이 솟아나 에일의 등을 꿰뚫었다.
속박 상태의 적에게 두 배 데미지를 입히는 ‘비수 꽂기’가 가슴팍에 적중했고, 곧장 몸을 비튼 클로에는 ‘전율의 일격’을 내리찍었다.
콰앙!
적중 시 공포 상태에 빠지게 되는 전율의 일격.
물 흐르는 듯이 이어지는 스킬 연계였고, 클로에는 끝을 맺기 위해 검을 뻗었다.
“끝이다!”
쩌엉!
묵직한 소리와 함께 에일이 튕겨져 나갔다.
한바탕 바닥을 구른 그는 힘겹게 땅을 짚고 일어섰다.
“젠장… 죽을 뻔했네.”
에일은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냈다.
마지막 연계기였던 그녀의 ‘심장 찌르기’는 에일이 급히 장검을 들어 간신히 막아 낼 수 있었다.
남은 체력은 15퍼센트.
만약 공격을 허용했다면 무조건 죽었을 것이다.
“그걸 어떻게…….”
“공포 효과는 나한테 소용없거든.”
기초 패시브 스킬인 광적인 순교자의 효과.
그리고 그녀의 속도를 빼앗아 왔던 덕도 있었다.
파아앗!
새하얀 빛이 에일을 감쌌고, 떨어졌던 체력이 서서히 회복되었다.
투기장으로 향하기 전, 새로 배운 두 개의 스킬 중 하나.
영웅급 회복기인 치유의 빛이었다.
단번에 많은 양의 체력을 회복시켜 주는 스킬은 아니었지만, 지속 회복 효과를 지닌 덕택에 전투 중에도 상처가 조금씩 아물게 할 수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80레벨이 무슨…….”
뜻밖의 선전에 당황한 양 팀의 팀원들이 술렁였다.
그리고 그중엔 에일의 정체를 눈치채는 이들도 나왔다.
“자, 잠깐! 저 자식도 29승 0패잖아! 똑같이 연승 중이라고!”
“저 얼굴 어디서 많이 봤다 싶었는데 혹시……?”
그를 직접 상대하고 있는 클로에는 하다하다 회복 스킬까지 사용하자 발끈하며 발을 박찼다.
“그걸 두고 볼 것 같아!”
카가가각!
어김없이 간격 안쪽으로 파고드는 그녀.
에일이 충분히 체력을 회복하기 전에, 재빨리 승부를 내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에일은 단검과 대검, 방패까지 상황에 맞춰 바꿔 들며 화려한 스왑 플레이를 보였고, 그녀의 맹공을 모두 받아냈다.
장검의 효과로 약탈한 속도의 덕도 있었지만, 받아치는 움직임 자체도 보다 좋아진 모습이었다.
“뭐지? 뭔가 바뀌었어…….”
그를 바라보고 있던 다륜이 중얼거렸다.
어디선가 느껴지는 이질감.
짧은 순간이지만 에일의 눈에 은은한 빛이 감돌았다가 사라졌다.
[현재 동조율 - 99.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