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투기장 (2)
카가가강!
모래가 날리는 결투장의 한가운데, 두 유저 간에 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쌍수 도끼를 든 전사가 마구 휘두르는 맹공을 피해, 에일은 뒤로 훌쩍 물러났다.
하지만 그가 거리를 벌리려는 순간.
전사가 강력한 액티브 스킬인 맹렬한 돌진을 사용했고, 순식간에 에일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후웅!
도끼는 허공만을 갈랐다.
곧바로 역극을 사용해 상대의 뒤를 돈 에일이 전사의 갑옷을 강타했다.
쩌엉!
튕겨져 나간 남자가 주르륵 미끄러지며 겨우 균형을 잡았다.
치열한 공방을 벌인 끝에 그의 남은 체력은 10퍼센트 남짓.
“젠장! 고작 80레벨한테…….”
전사가 분함을 참지 못하고 이를 빠득 갈았다.
처음만 해도 우습게만 보이던 80레벨의 유저.
그에 반해 전사의 레벨은 140에 달했고, 정상적인 그림이라면 그를 압도하고도 남았어야 했다.
하지만 전사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후우…….”
고비를 넘겨낸 에일이 잠시 숨을 돌렸다.
남은 체력은 30퍼센트.
넉넉하다고는 할 수 없는 수치였지만, 상황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전사는 조금 전, 일시적으로 스탯을 크게 상승시켜 주는 버프기를 사용한 뒤 승부를 내기 위해 맹렬히 공격해왔다.
까딱 잘못했다간 금세 당해 버렸을 수도 있었던 상황.
하지만 에일은 침착히 시간을 끌며, 무사히 스킬의 유지 시간을 넘겨냈다.
그동안 전사가 아껴뒀던 카드였다는 걸 생각하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셈이었다.
이제 다시 에일의 차례였다.
‘일섬의 쿨타임이 돌아왔군.’
에일은 돌아가고 있는 스킬들의 쿨타임들을 확인한 뒤, 시선을 슬쩍 돌렸다.
처음 들어왔을 때와는 다르게, 꽤나 떠들썩한 모습.
결투장의 관중석에는 어느새 다른 유저들이 한가득 몰려들어 있었다.
이제는 에스마이어의 유명인사가 되어 버린 에일의 플레이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인파였다.
에일이 결투장 하나에 자리를 잡고 매칭에 나섰기 때문에, 계속 같은 자리에서 관전이 가능한 것이었다.
‘그래도 녹화는 금지시켜 놨으니… 전력 노출 걱정은 덜하겠지.’
타앗!
곧장 검을 든 에일이 전사에게 달려들었다.
잽싸게 반응한 전사는 에일이 치켜든 장검의 궤적에 따라 도끼를 들어 올렸다.
미리 경로를 파악하고 공격을 막아 내려는 것.
하지만 순식간에 무기를 바꿔든 에일의 손엔 어느새 작은 단검이 들려 있었다.
푸슉!
단검으로 사용된 일섬이 그의 목을 그었고, 이어진 불길이 휘감겼다.
장검으로 사용하는 것보다 데미지는 덜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딱 적당한 데미지를 입힐 수 있었다.
털썩!
무릎을 꿇고 쓰러진 전사.
그는 방금의 일격 인해 빈사 상태에 빠졌고, 전사의 앞에 싸늘하게 선 에일은 발을 굴러 화형대를 소환했다.
화르르륵!
“우아아악!”
쓰러진 전사는 어김없이 에일의 손에 끌려가 불태워졌다.
“미친…….”
“결투가 목적이 아니라, 사람 태우러 온 거 아냐?”
방금 관중석에 들어와 화형을 처음 보게 된 유저들은 경악한 얼굴로 수군거렸다.
쓰러진 유저의 위에서 온갖 인성질을 하며 도발하는 일이야, 투기장에서는 쉽게 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여태껏 화형을 벌이고, 그 앞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 유저 따위는 본 적이 없었다.
물론 그것은 방금 들어와 적응을 못 한 이들만 해당되는 부분.
에일이 투기장에 들어선 이후 벌써 29번째 화형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니, 대부분의 유저는 승부의 결과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결투에서 승리하였습니다!]
[현재 전적: 29승 0패, 1,654점]
[연승 보너스로 인해 추가 점수와 보상이 주어집니다!]
[‘에일’ 님이 29연승을 거두었습니다!]
“정말 괴물이잖아?”
“대체 80레벨로 어떻게…….”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광경.
파죽지세로 치고 올라가는 에일은 어느새 29연승을 달성했다.
점수대의 다른 유저들에 비해 턱없이 낮은 레벨로 적들을 연달아 찍어 누르는 모습을 보여 줬다.
영상이 만들어 낸 거품이라고 생각하고 발을 들인 이들도 의구심이 절로 사라지게 만드는 실력.
심지어 기도를 마치고 일어난 에일은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마치 29연승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무덤덤한 모습이었다.
‘후, 이번에도 쉽지는 않았어…….’
물론 겉과 달리 속마음은 조금 달랐다.
방금 마주한 상대만 해도 무려 140레벨대의 고레벨 전사.
초반에 매칭되던 결투자들과는 달리, 양측의 스킬 개수 차이가 점점 더 크게 와닿았다.
그나마 에일은 개수는 적어도 대부분이 영웅에서 유일까지 오가는 높은 스킬의 등급으로 어느 정도 커버가 되긴 했다.
하지만 이젠 상대도 마냥 낮은 등급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1,600점대에 들어섰다는 것은 투기장 대결에 굉장히 익숙하다는 것은 물론, 실력 자체도 충분히 상위권에 위치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중간중간 연승이 끊길 뻔한 위기도 있었고…….’
관중들이 구경하면서 느끼는 것과 달리, 지금까지의 연승 과정은 생각보다 수월치 않았다.
특히 27연승째에서 만났던 160대의 흑기사 유저는 워낙 실력과 스펙이 좋았던지라 정말 위험했었다.
역시 점수대가 올라갈수록 상대가 어려워졌다.
이젠 언제 갑자기 패하게 되더라도 이상할 게 없는 수준이었다.
“이제 하나만 남았는데… 이런.”
얻은 점수를 확인한 에일이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29연승을 거두며 달성한 그의 점수는 1,654점.
오늘 처음 투기장에 발을 들인 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울 만큼 굉장히 높은 점수였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에일의 계획이 조금 틀어졌음을 드러냈다.
‘이 점수대라면 30번째 승을 거둬도 조금 부족할 것 같은데?’
30번째 연승을 거두면 첫 승을 거둘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더 많은 명예 점수를 얻을 수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한다 한들 한 번에 50점이나 받는 것은 무리.
마지막 결투를 남겨두었다고 생각했지만, 30연승을 거둬도 1,700점을 달성할 수 없어 보였다.
매칭되는 상대의 레이팅에 따라 주어지는 점수도 조금씩 달라졌으니, 이런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제 더욱 어려워질 1,700점대의 직전에서 두 번이나 더 승리를 거둬야 할 상황.
하지만 에일은 원래의 계획에서 살짝 방향을 틀었다.
“으음… 그냥 한 번에 올라갈 겸 대장전으로 가지 뭐.”
[결투 방식이 변경되었습니다!]
[다음 매칭 상대를 찾고 있습니다!]
에일이 화면을 조작하자 설정되어 있던 매칭 조건이 바뀌었다.
방금 그가 선택한 결투 방식은 4 대 4 대장전.
양쪽에 네 명씩 팀을 이룬 뒤, 한 명씩 나와 결투를 벌이며 승부를 가리는 방식이었다.
과정이 조금 더 길어지고 인원이 많아지는 만큼, 명예 점수도 1 대 1 결투보다는 많이 지급되었다.
사실 유저들 사이에서 방식 선택에 영향을 줄 정도로 큰 차이가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30연승을 거두기만 한다면, 큰 보너스가 부여될 에일의 상황에선 달랐다.
대장전으로 승리를 거둔다면 한 번에 50점까지도 노려볼 수 있었다.
[매칭이 완료되었습니다!]
파앗!
옵션이 변경된 탓에 이번엔 에일이 다른 결투장이 있는 쪽으로 이동되었다.
대기실로 이동된 에일이 주위를 둘러보자, 양옆에 서 있는 세 명의 유저를 볼 수 있었다.
이번 대장전을 함께할 팀원들이었다.
“잘 부탁드려요!”
“꼭 이깁시다!”
짤막한 대기 시간 동안 팀원들이 인사를 나누었다.
전사 계열의 ‘투사’, 도적 계열의 ‘로그’, 격투가 계열의 ‘무도가’까지.
높은 점수대가 아니랄까 봐 모두 PVP에 일가견 있는 직업들이었다.
“잠깐, 저분 레벨이…….”
“어……? 정말이네.”
이상함을 느낀 팀원들이 에일을 바라봤다.
팀원 전원이 당연하다시피 세 자릿수의 레벨이었는데, 에일의 경우 80레벨에 불과했다.
심지어 직업도 비주류인 이단심판관.
최근 들어 주목을 받긴 했어도 여럿의 중요한 승패가 걸린 상황에서 팀원으로 받기엔 여러모로 꺼림직했다.
하지만 미심쩍게 느낀 팀원들이 에일의 전적창을 열어 확인하기도 전.
[각 팀의 출전 순위가 결정되었습니다!]
[‘에일’ 님은 4번째 출전자입니다.]
시스템으로 인해 랜덤으로 결정되는 출전 순서.
에일의 경우엔 마지막 네 번째 출전자가 되었다.
“빨리 다들 장비 체크하시고 준비하세요! 이제 나가 봐야 합니다.”
“그래도 네 번째시네요. 앞쪽 분들이 분발해 줍시다.”
가끔씩 일어나는 수준 이하 플레이어의 매칭.
이런 상황을 원망할 법도 하지만, 팀원들은 애써 실망감을 내색하지 않았다.
팀원들이 서둘러 대기실 바깥으로 나서기 시작했고, 에일도 머리를 긁적이며 그를 따랐다.
에일이 결투장으로 들어서자, 건너편엔 상대팀의 유저 네 명이 들어오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럼 저부터 가 보겠습니다.”
“힘내세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첫 번째 순번의 유저들이 양쪽에서 걸어 나왔다.
에일의 팀에서 처음으로 나선 이는 130레벨의 투사였던 남자.
반면 상대편에 선 여자는 허리춤에 두 자루의 단검을 찬 것으로 보아, 도적 계열 직업으로 보였다.
[첫 번째 결투가 시작되었습니다!]
메시지와 함께 결투가 곧바로 시작되었다.
카앙!
먼저 달려든 것은 투사.
단숨에 접근기를 사용해 거리를 좁혀들었고, 정면 싸움엔 취약한 도적과 검을 맞대었다.
거기다 그는 단순히 거기서 멈추지 않다.
“간다!”
한쪽 단검을 옆으로 쳐낸 뒤 검을 높이 치켜 올렸고, 내리 찍히는 검에서 노란 빛이 번쩍 빛났다.
투사의 전용 스킬인 방어 부수기.
상대가 방어 자세를 취해도 단번에 무력화시키며 추가 데미지까지 입히는 강력한 기술이었다.
정확히 피하기 어려운 타이밍에 꽂히는 일격.
하지만 정작 공격을 마주한 도적의 입가가 비틀렸다.
“패링!”
카앙!
도적의 단검이 기술이 실린 공격을 옆으로 흘려보냈다.
아무런 데미지도 주지 못하고 비껴간 투사의 검.
그 사이에 도적은 그의 옆구리에 치명적인 일격을 남겼다.
푸욱!
“컥…….”
‘저 타이밍에 반격기를……?’
심지어 평범한 반격기가 아니었다.
공격을 흘린 동시에 옆구리에 먹인 단검은, 추가 데미지는 물론 출혈까지 적용되어 그의 체력을 갉아먹었다.
일반적으로 출혈 피해를 주면 시간을 끄는 게 정석적인 플레이였다.
하지만 상대는 한 번 생긴 틈을 놔주지 않았다.
푸욱!
단검이 물러서고 있던 투사의 옆구리를 한 번 더 찔렀다.
인상을 찌푸린 남자가 그녀를 떼어내기 위해 검을 휘둘렀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검을 휘두르는 그에게 오히려 ‘대응 찌르기’ 스킬을 먹이며 출혈 스택을 추가로 쌓았다.
‘젠장, 도저히 따라갈 수가……!’
정신없이 밀려나는 투사가 입술을 깨물었다.
공격을 제대로 막아 내기는커녕, 변화무쌍한 단검의 날이 향하는 곳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패시브, 요동치는 칼날 때문이었다.
푹! 푹! 푹!
일방적인 데미지 교환은 계속되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팀원들이 경악했다.
“찔렀던 곳만 계속 찌르고 있잖아…….”
“완전히 가지고 놀고 있어.”
처음 찔렀던 한쪽 옆구리만을 집요하게 공략하는 도적.
전략적인 이유가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명백히 이곳에 있는 모두에게 실력을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푸욱!
“커헉…….”
투사가 맥없이 바닥에 쓰러졌고, 승부가 결정나며 그는 팀원들이 서있는 위치로 전송되었다.
“왜 이렇게 시시해?”
비웃음을 머금은 도적의 입가.
하지만 반대편에 선 팀원들은 아무도 뭐라 입을 열지 못했다.
자신만만한 그녀의 태도에 걸맞게 엄청난 실력이었고, 벙 쪄버린 팀원들은 그제야 상대의 전적 창을 확인했다.
[레벨 171, 도적]
[29승 0패(승률 100%), 1,660점]
“어서 다음 녀석이나 올라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