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정화자 (2)
쿠웅!
거인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에일과 네슈아의 합공에도 오래도 버틴 녀석이었지만, 놈을 상대한 둘의 실력과 호흡은 완벽한 수준이었다.
공격을 한 번이라도 허용했다간 즉사할 상황이었지만, 한 번의 공격조차 허용하지 않고 보스 몬스터를 제압했다.
“그럼…….”
거인의 머리맡에 선 에일은 장검을 높이 치켜올렸다.
콰악!
[교단의 적, 신성모독자를 처단하였습니다!]
[‘형벌 선고’에 따라 지정된 형벌을 성공적으로 집행하였습니다. 스킬의 효과로 스탯 보너스가 두 배로 늘어납니다.]
[여신의 총애 +1.35% (현재 85.69%)]
[빛의 교단 공헌도 +650]
[신앙심 스탯 +20]
[광기 스탯 +20]
[레벨이 올랐습니다!]
떨어져 나간 거인의 머리가 데굴데굴 굴러갔다.
턱.
네슈아의 발치에 멈춰선 머리, 단검을 거둔 그에게 에일이 시선을 보냈다.
“여긴 어쩐 일이야?”
「너야말로」
네슈아가 슬쩍 꺼낸 양피지에 글자를 적어 보였다.
그 역시 에일이 올 거란 사실을 모른 채 들어왔었고, 단순히 동선이 겹쳐 생긴 우연에 불과했다.
애초에 그보다 먼저 이 던전에 대해 알고 들어선 게 네슈아였다.
“알고 온 건 아닌 것 같고……. 너도 월드 퀘스트에 발을 들인 건가?”
에일이 말하자 네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그와 마주했을 때도 고대 정령 건으로 부딪힌 것이었으니, 월드 퀘스트와 연관이 있을 거라는 건 예상 못 할 부분은 아니었다.
거기다 자신을 선뜻 도운 걸 보아 왕자 측과 연결되어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경계할 필요는 없는 상황.
정확히 누구의 퀘스트를 받고 움직이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 배신을 당했던 세력에게는 완전히 돌아선 듯 보였다.
‘그나저나 전보다 훨씬 실력이 늘었군.’
에일이 그동안 스스로 성장한 만큼, 네슈아도 전보다 실력이 늘어나 있었다.
물론 실력뿐만이 아니라 레벨과 스펙도 마찬가지.
90레벨대의 까다로운 신성모독자를 쓰러뜨리면서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정도였다.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시체에 다가선 에일과 네슈아는 보스 몬스터의 아이템을 루팅했다.
드랍된 아이템들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역시 스킬북.
보랏빛 스킬북 2권이 녀석에게서 나왔고, 둘은 그를 하나씩 나눠 가졌다.
에일은 루팅 후 남은 시체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네슈아는 부산물에는 별 관심이 없는지 무심히 시선을 돌리고 있었고, 에일이 슬쩍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혹시 이곳에서 다른 녀석은 본 적 없어? 나보다 먼저 들어왔으니까 알 거 아니야.”
“…….”
그의 말에 인벤토리를 뒤적인 네슈아가 무언가를 번쩍 꺼냈다.
잘린 다크 엘프의 머리.
“미친…….”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머리 탓에 에일이 저도 모르고 말을 내뱉었다.
무슨 아이템을 꺼내나 했는데 전혀 예상도 못 한 등장이었다.
몸통이 어디 갔는지는 둘째 치더라도, 저런 걸 왜 들고 다니는 건지.
「여기 숨어 있던 녀석이다」
“그게 마지막?”
「알아보고 있는 중이지」
어깨를 으쓱인 네슈아는 목을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콰악!
에일의 해체 작업이 끝나고, 드랍된 아이템을 회수했다.
그사이, 네슈아는 거인이 부수고 나온 벽을 통해 먼저 움직였다.
부서진 벽 너머엔 커다란 방이 놓여 있었고, 한가운데에 검은 사령석이 둥둥 떠올라 있었다.
아무래도 녀석도 사령석을 지키라고 만들어 놓은 괴물로 보였는데, 오히려 다급한 성미 탓에 먼저 위치를 발각시킨 꼴이 되어버린 모양이었다.
루팅을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난 에일도 네슈아의 뒤를 따랐고, 입구가 두 개가 되어버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싸아아아!
검은 마력을 풀풀 풍기고 있는 사령석.
하지만 이전에 봤던 사령석들과는 달리, 주변의 기운을 강하게 빨아들이는 듯한 모습이었고 주변에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건…….”
휘릭!
에일의 목으로 찔러진 단검.
벽 뒤에 기척을 감추고 숨어 있던 다크 엘프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며 기습한 것이었다.
방심을 틈탄 날카로운 일격이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카앙!
비어 있던 왼손에 단검을 소환해 내며 공격을 막아 냈다.
방심하고 있던 에일이었지만, 이 정도에 손쉽게 당해 주지는 않았다.
에일이 첫 기습을 막아 내자 기회를 노리던 다크 엘프는 당황했고, 다음 반응이 늦어졌다.
콰악!
“커헉…….”
순식간에 다가온 네슈아의 단검이 다크 엘프의 목에 박혔다.
그의 직업 ‘그림자 파수꾼’의 전용 스킬인지 에일조차 정확히 어떤 스킬이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다가온 속도로 보아 상위 등급의 접근기라는 건 확실했다.
그 틈에 장검을 빼든 에일이 단번에 놈을 갈랐다.
털썩!
그대로 뒤로 쓰러진 다크 엘프는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고개를 처박았다.
“깜짝이야…….”
「놈들이 자주 쓰는 수법이다」
“그동안 많이 상대해 왔나 보네.”
에일의 짐작에 네슈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습격자가 제압되자 둘의 시선은 다시금 방의 한가운데로 향했다.
여전히 짙은 마력이 맴돌고 있는 사령석이 놓여 있었고, 에일은 그를 제거하려 가까이 다가서려 했다.
하지만 손을 뻗으려는 그때.
파앗!
사령석의 형체가 갑자기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뭐……?”
당황한 에일이 멈칫 물러섰다.
마치 어디론가 전송된 듯한 사령석의 모습, 요동치던 주변의 마력도 일순간에 가라앉아 잠잠해졌다.
“미안하지만… 이미 늦었어…….”
쓰러져 있던 다크 엘프가 그들을 향해 조소를 흘렸다.
사령석이 파괴되지 않은 채 무사히 회수되었고, 소기의 목적 또한 달성한바.
“네놈도 곧…….”
콰악!
하지만 다크 엘프는 겨우 붙어 있던 목숨마저 잃었다.
거침없는 네슈아의 손속.
그는 이번에도 엘프의 머리를 직접 인벤토리에 챙겨 넣었다.
‘이상한 취미… 일 리는 없을 테고, 퀘스트라도 받은 건가.’
그 모습을 본 에일이 머리를 긁적였다.
화형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했지만 머리를 인벤토리에 넣은 채 들고 다니라니, 찝찝할 것 같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사령석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으나, 오염된 땅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섰던 네슈아와 에일이 던전의 악령들도 상당수 제거해 둔 상태였는데, 오히려 바깥에선 제거했던 악령들이 조금씩 다시 생겨나는 중이었다.
“이걸 어쩐다…….”
정화 능력을 가진 이도 없었고, 몬스터가 리젠되고 있는 것을 보아 단순히 제거하는 방식으로도 정화가 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그냥 두고 가기도 애매하고,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
「아직 정화 방법에 대해 모르는 건가?」
“정화 방법?”
네슈아가 익숙한 아이템 하나를 인벤토리에서 꺼내 들었다.
사령석을 파괴할 때마다 조금씩 얻을 수 있었던 검은 파편.
그가 파편 조각을 들어 올리자, 사령석이 내뿜던 것과 흡사한 검은 기운이 사방으로 새어 나왔다.
츠츠츠츳!
새어 나온 검은 기운은 다시금 대지로 흘러들어갔다.
그러자 오염된 땅은 다시 원래의 빛을 서서히 되찾았고, 곧 작은 흔적도 없이 복구되었다.
[오염되었던 대지가 다시 정화되었습니다!]
[부분 목표 달성으로 인해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쓰는 거였나…….”
그동안 사령석을 부술 때마다 루팅이 가능했기에 일단 쌓아 두기만 했지, 어디에 쓸모가 있는지는 알아내지 못했었다.
그런데 설마 사령석으로 인해 오염되었던 대지를 다시 정화하는 데 쓸 수 있었을 줄이야.
사령석이 빼앗았던 대지의 기운을, 부서진 파편을 통해 다시 돌려준 것이었다.
오염 과정 자체를 처음 목격한 에일로서는 쉽게 추측할 수 없었다.
“…….”
던전의 오염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 네슈아는 무기를 넣었다.
사령석을 코앞에서 놓쳐 버린 것은 아쉬웠지만, 이뤄야 할 목적은 다 이룬 셈이었다.
그리고 그건 에일 또한 마찬가지.
“이제 어쩔 생각이야?”
「놈들을 계속 사냥할 거다」
어딘가 살벌한 기운을 풀풀 풍기는 글씨.
그가 퀘스트를 받았던 세력에게 배신당했던 것까지는 알고 있었지만, 머리를 댕겅 댕겅 자르고 다니는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그때 이후로 더 심한 악연이 오고 간 듯 보였다.
큰 세력과 적대하는 개인.
분명 불리한 입장에서 쫓기는 건 네슈아일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에일은 그와 적대할 다크 엘프들이 더 불쌍하게 느껴졌다.
‘뭐, 어쨌든 이걸로 임무 완수인가…….’
* * *
오염된 지역의 정화를 끝낸 에일이 다음으로 향한 곳은 하이 엘프들의 영역인 하얀 숲.
하얀 숲에 도착한 에일은 여성 하이 엘프가 마지막으로 남겼던 퀘스트를 완수했다.
그녀가 죽은 뒤 남겼던 유품도 전달했고, 전달받은 이들은 동족의 마지막 순간을 도운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쏠쏠한 경험치와 함께. 보상으로 상위 스킬북까지 얻었다.
보랏빛 스킬북 2권, 보스 몬스터에게 얻은 것까지 합치면 3권의 스킬북이 확보된 상황.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도시에서 다크 엘프를 제압하고 얻었던 퀘스트 아이템, ‘헬리브론의 봉인된 지령서’.
여기에 적혀 있는 자의 이름에 대해서라면 순찰대장인 알룬드가 설명해 주려 했지만, 그럴 필요 없이 에일도 익히 알고 있는 자였다.
검은 마녀, 헬리브론.
어둠 숲의 수장이자 다크 엘프들을 이끄는 네임드 NPC였다.
무력만으로도 알룬드에 버금가는 강자였고, 잔인한 성정 탓에 발라티아 지역의 유저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자였다.
“이게 발견됐다는 건 아예 돌아섰다는 이야기군.”
지령서를 넘겨받은 알룬드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종족 내에서 일부가 일탈하는 정도야 어디서든 쉽게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그의 말대로 헬리브론이 직접 지시를 내렸다는 건, 사실상 다크 엘프 전체가 이번 일에 가담했다는 것이었다.
비록 지령서가 봉인되어 있어 내용을 알 수는 없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 어떤 지시가 내려졌을지야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놈들에게 책임을 묻기 위해선 확실한 물증이 필요하다. 어떤 지시가 있었는지도 알아낼 필요가 있고, 이 지령서의 봉인을 푸는 수밖에…….”
“봉인을 풀 방법이 있나?”
“물론, 하지만 아주 강력한 봉인이 담겨 있어서 쉽지는 않아. 이 정도 봉인을 소실 가능성 없이 해제하려면 파쇄의 인장이 필요하다.”
“파쇄의 인장이라면…….”
“알고 있나?”
알룬드의 물음에 에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파쇄의 인장이라면 고위 봉인 해제에 주로 쓰이는 최상위 아이템으로 모를 수가 없는 아이템이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쉬워지겠군. 가급적이면 도움을 청하고 싶지 않지만,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는 수급이 곤란해. 조약에 제약받지 않는 인간이라도 인장을 얻기는 쉽지 않겠지만… 협조해 준다면 사례는 확실히 하도록 하지.”
알룬드가 제안해 온 퀘스트.
그를 앞둔 에일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당연히 하이 엘프들이 파쇄의 인장을 구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사실상 인간의 도시에서만 거래되다시피 하는 물건이었고, 경매장 시스템이 존재하는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도 굉장히 얻기 힘든 물건이었다.
‘기본적으로 얻을 수 있는 방법 자체가 많지 않지만… 지금 내 입장에서 가능할 만한 방법은 하나뿐이겠군.’
메디아의 투기장.
그곳이 에일의 다음 목적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