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정화자
“이쯤이면 되겠지…….”
현장을 빠져나온 에일이 엘프를 내려놓은 뒤 숨을 돌렸다.
다행히 골목으로 몰려든 경비병들에게 들키지 않고 무사히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다만, 아직도 회복하지 못한 체력이 바닥을 치고 있는 탓에 머리가 어지러워 정신이 없었다.
얼마나 더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걱정이 되기 시작할 찰나.
[저주의 효력이 다해 치유 불가 효과가 사라집니다.]
‘됐다.’
저주가 끝났다는 메시지가 나타나자 에일은 곧바로 포션을 꺼내 체력을 회복했다.
이번엔 문제없이 체력이 주르륵 차올랐고, 어지러웠던 머리도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다만 저주의 효력이 사라진 것은 에일뿐.
만신창이가 된 하이 엘프에게 회복 포션을 마시도록 해 봤지만, 치유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에일에게 걸렸던 것보다 더 심한 저주가 걸려 있는 듯 보였는데, 그녀의 몸 상태를 고려하면 더욱 위험한 상황이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은 위독한 상태임을 알리고 있었다.
붕대를 사용해 출혈은 금세 멈추게 만들었지만, 독이나 내상에 당한 듯 점점 더 상태가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소용없어요. 저는 얼마 못 버텨요.”
벽에 기대었던 그녀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대로 이대로 치료가 불가능하다면 살아남기는 힘들어 보였다.
“저주를 풀 방법은 없는 겁니까?”
“보통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지만… 저에게 시간이 없다는 게 문제겠죠.”
그녀가 비관적인 상황을 체념한 듯 말했다.
고생하며 다크 엘프로부터 겨우 구출했는데 저주에 당해 사망이라니, 안타깝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 이유를 물을 수 있을까요? 어째서 다크 엘프가 공격을 한 것인지, 양쪽 모두 왕가와의 조약을 어기고 인간의 도시에 나와 있는 건지.”
“하지만 외부인에게는…….”
“하얀 숲과는 연이 닿아 있었습니다.”
에일이 품속에서 비상의 깃털을 꺼내들었다.
그들의 인정을 받았다는 증명, 그를 보자마자 하이 엘프의 표정은 단숨에 뒤바뀌었다.
“깃털을 가지고 계셨군요……. 그렇다면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 이대로…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방치해 둘 수는 없어요.”
“뭐든 말씀만 하시죠.”
그녀의 간절한 부탁에 에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최근 고대 정령들의 성역이 오염되는 일이 생겨났어요. 그 배후엔 방금의 다크 엘프들을 비롯해 수상한 세력들이 연루되어 있었죠.”
여기까지는 모두 알고 있는 사실.
애초에 이 사실을 하이 엘프들에게 처음 전서구로 전했던 것이 에일이었으니 당연했다.
“성역의 오염을 막기 위해 저희가 직접 나서려 했지만, 조약이 발목을 잡았고 아직도 왕가와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이대로는 너무 늦어질 상황이었고, 어쩔 수 없이 조약을 무시하고 숲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죠.”
‘그렇게 된 거였군.’
왕가의 세력이 양측으로 나뉜 지금, 하이 엘프만 한 세력이 직접 나선다면, 왕자가 필사적으로 막아설 테니 협상에 진전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왕가에서도 수상한 움직임을 눈치챈지라 막고 있었을 텐데요. 그들에게 맡기면 되는 게 아닌지…….”
에일이 한 가지 의문을 표했다.
현재 월드 퀘스트가 급속도로 진행되며 공주 측 세력과 그녀의 퀘스트를 받은 유저들이 성역을 방어하는 중이었다.
그 이후에도 여러 곳을 침범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그들이 모두 막아 내고 성역을 정상화했다고 한다.
하지만 에일의 말을 들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인간들에게 알려진 곳 외에도 숨겨진 곳이 많아요. 고대 정령의 성역은 기본적으로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자리 잡고 있고, 저희와 같이 정령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다크엘프가 나섰다면, 깊숙이 숨겨진 성역들조차 위험해요.”
하이 엘프들이 이미 파악하고 있던 위치의 성역들은 물론.
아직 따로 발견된 적 없는 성역들까지, 바깥세상으로 나선 하얀 숲의 순찰대원들이 직접 찾아다니며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했다.
하얀 숲의 순찰대원이라면 하이 엘프의 정예들이었고, 두말할 필요 없이 굉장히 강력한 전력이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합의가 된 경우가 아니라 의심받지 않는 선에서 움직여야 했고, 그런 반면 사건이 너무나 광범위한 탓에 인력이 부족했다.
그 탓에 그녀를 포함해 순찰대원의 신분이 아닌 자들까지 직접 숲 밖으로 나서야 했다.
“그리고 저희는 단순히 성역만 찾아 나선 게 아니었어요. 정령의 기운이 느껴지지는 않지만, 성역을 오염시켰던 기운이 퍼져 있는 장소도 몇 군데 발견되었고……. 그곳에서 새로운 단서를 찾아나서는 게 저의 임무였죠. 미처 도착도 하기 전에 습격을 받아 이렇게 되어 버렸지만…….”
점점 숨이 거칠어진 그녀는 피를 한차례 토해 냈다.
새까맣게 변한 피가 엘프의 의복을 적셨다.
“제 임무를 대신 맡아 주세요. 당신에게는 아직 버거울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반드시 완수해야 하는 임무예요. 만약 녀석들을 막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덜덜 떨리며 뻗어진 그녀의 손이 에일의 손을 맞잡았다.
그 말을 끝으로 하이 엘프의 숨이 끊어졌고, 그녀가 쥐여 준 마지막 물건이 에일의 손에 들어와 있었다.
‘…….’
목적지의 위치가 담긴 지도였다.
* * *
“분명 여기가 맞는데…….”
지도에 표기된 지역에 도착한 에일이 주변을 둘러봤다.
베스라 평원.
넓은 면적에 비해 몬스터는 하나 없는 평화로운 지역이라 유저들에게 그리 인기 있는 지역은 아니었다.
하지만 에일이 신경 쓰고 있는 건 그게 아니었다.
단지 이곳이 오염된 지역이라고 보기엔 너무나도 깨끗하다는 것.
언데드나 사악한 악령이 나타나기는커녕, 깨끗한 자연에 야생 동물들이 뛰노는 곳이었다.
‘정보가 빗나갔을 리는 없고, 이런 경우는 보통… 지하겠지.’
에일이 목적지를 찾아 나섰다,
그는 엘프처럼 정령의 기운이나 오염된 기운을 멀찍이서 느낄 수가 없었으니, 대강 짐작으로 때려 맞추는 수밖에 없었다.
지도의 위치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며, 정확히 표기된 장소로 가 숨겨진 지형이 없는지 살펴보았다.
“찾았다.”
수상쩍은 입구를 발견한 에일이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어쩐지 눈에 안 띄는 구석에 박혀 있는 위치부터 입구의 생김새까지 수상한 냄새를 풀풀 풍겨왔다.
화아악!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오염된 기운이 물씬 풍겨왔다.
좀 전까지 있던 바깥의 환경이 거짓말같이 느껴질 만큼 강렬한 기운이었고, 동굴 내부는 서서히 썩어 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정령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는 걸 보면, 정령이 잠들어 있는 성역은 아닐 테고… 뭘 노리고 있는 거지?’
키르르륵!
그때, 에일의 앞에 검은 악령이 나타났다.
성역에서 보였던 녀석들과 비슷한 생김새였고, 갑자기 나타난 몬스터에 에일은 재빨리 놈의 정보를 확인했다.
던전의 일반 몬스터쯤으로 보이는 녀석의 레벨은 무려 90, 상당히 높았다.
‘괜히 무리일 수 있다고 말한 게 아니었네.’
에일에게 의뢰를 넘긴 하이 엘프는 부탁을 남기며, 다소 무리일 수도 있다고 말을 덧붙였었다.
워로드가 가상현실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NPC들도 레벨 시스템 자체는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는바.
더군다나 정보창을 보지 못한다 해도 유저가 NPC의 레벨을 짐작하듯, NPC도 유저의 레벨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런데 70레벨대인 에일이 90레벨대의 사냥터를 향하게 되었으니, 그로서는 위험할 수도 있다고 주의를 준 것이었다.
‘쉽지는 않겠지만, 불가능할 것도 없지.’
현재 75레벨인 에일은 녀석과 15레벨의 차이가 있었다.
예상보다 더 높은 레벨대이긴 했지만 에일은 개의치 않았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레벨대 근처에서 사냥하는 게 가장 효율적이라는 것은 워로드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게임에서 통용되는 기본 상식.
하지만 어느 정도 스펙이 받쳐 주는 동시에, 중요 퀘스트까지 병행하고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스릉!
검을 빼든 에일과 악령이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살아 있는 생명체를 저주하듯 맹렬히 달려드는 악령이었지만, 싸움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콰악!
키아아악!
검에 꽂힌 악령이 성화에 불타며 발버둥 쳤고, 에일은 단숨에 녀석의 목을 그었다.
털썩 쓰러진 악령, 이미 에일에게 온몸에 크고 작은 상처들을 얻은 뒤라 더는 버틸 수 없었다.
‘한꺼번에 여러 마리를 상대하는 게 아닌 이상, 아주 위험할 것 같지는 않네.’
방금의 전투로 대강 수준을 파악했고, 이 정도라면 충분히 던전 공략이 가능해 보였다.
확신이 생긴 에일은 주저하지 않고 던전에 깊숙이 발을 들였다.
평소처럼 던전을 마구 헤집어 놓으며 몰이사냥을 하지는 못했지만, 한 마리 한 마리 신중히 쓰러뜨리며 돌파할 수 있었다.
‘이건……?’
통로 중간중간에 보이는 사람의 흔적.
몬스터의 것이 아닌 데다가 생겨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이었고, 에일은 경계를 높이며 나아갔다.
플레이어인지 결사단 혹은 엘프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쪽이건 몬스터와는 다른 방면으로 위험할 수 있었다.
‘구조가 복잡하긴 하지만, 던전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아 보이는데…….’
또다시 막다른 길 앞에 선 에일이 생각했다.
진입한 지 오래되지 않았음에도 대충 던전의 구조가 눈에 들어올 정도였다.
고레벨 던전이 너무 큰 규모로 펼쳐져 있으면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에일의 입장에서는 좋은 소식이었다.
하지만 그때, 그의 앞에 불청객이 등장했다.
콰과과광!
벽을 부수며 나타난 거대한 괴물.
[죄악의 존재, 신성모독자를 발견했습니다!]
쿠어어어!
비대한 몸집의 거인이 에일을 향해 포효했다.
어깨에 지고 있던 몽둥이를 힘껏 휘두르자, 한쪽 벽이 요란하게 부서졌다.
“이런……!”
다급히 물러서며 녀석의 정보를 확인한 에일이 미간을 좁혔다.
지금 레벨대의 던전이라면 평범한 보스라도 골치 아플 텐데, 상대는 무려 95레벨의 신성모독자.
아무리 못해도 전에 상대했던 다크 엘프 이상이었다.
콰앙!
놈이 몽둥이를 내리치자 가공할 만한 괴력에 충격파가 생겨났다.
충격파에 밀려나간 에일이 바닥을 굴렀고, 그 순간을 노린 거인의 몽둥이가 다시 한 번 휘둘러졌다.
한 대라도 맞으면 어떻게 될지는 뻔한 위력.
에일은 다급히 몸을 날리며 겨우겨우 녀석의 공격을 피해 냈다.
“크윽……!”
에일은 불의 세례를 사용하며 놈을 공격해 봤지만, 예상했던 것만큼 데미지가 나오지 않았다.
레벨 차이를 무시하지 못함은 물론, 비대한 몸집에 걸맞게 체력도 굉장히 높았다.
견적 자체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상황.
굉장히 어려운 적이었고, 에일도 고전을 피하지 못했다.
‘젠장, 포기해야 하는 건가?’
어떤 선택지가 되었든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나았고, 여기서 물러나야 하는 건지 고민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콰과과과!
거대한 흑색창이 나타나 거인의 가슴팍을 단박에 꿰뚫었다.
커다란 대미지와 함께 부가 효과인 속박에 걸려 꼼짝 못 하는 모습.
침묵의 창.
에일도 익히 알고 있는 하이 코스트의 공격계 마법 스크롤이었고, 오로지 교단에 몸을 담고 있는 이들만 사용 가능한 것이었다.
‘설마…….’
스릉!
단검을 뽑아든 네슈아가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