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신념과 광기의 사이 (4)
“대의회까지 건드리다니… 굉장한데.”
영상을 보던 사내가 감탄한 듯 헛웃음을 흘렸다.
벌써 며칠 전에 벌어진 사건이 담긴 영상이었지만, 그에 대한 반응은 아직 식지 않았다.
수도에 나타난 에일이 대의원급 귀족을 불태워 버리자 커뮤니티가 한바탕 뒤집어진 것이다.
대부분의 유저는 물론, 6대 길드도 사전 작업 없이는 그만한 거물을 함부로 건드리기는 어려웠다.
‘대의회의 의석이 하나 줄어든 덕에 공주 쪽이 좀 더 유리해졌군. 이번 계승권 문제에서 공주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는 건가? 레벨이 세 자릿수도 안 됐으면서 벌써부터 크게 노는걸.’
사내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화면 속의 에일을 바라봤다.
월드 퀘스트에 관여하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에일은 지금도 사방에서 이단을 사냥하며 계속 활동 중이었다.
퀘스트나 사냥을 병행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 PK만으로는 빠른 성장이 힘들었는데, 이번 왕도에서의 일 이후로, 에일은 닥치는 대로 이단을 추적하며 사냥하는 중이었다.
이대로 계속 인기를 모으기 위함인지, 아니면 따로 퀘스트라도 받아 수행하고 있는 건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그러면서도 성장은 굉장히 빠른 속도를 보이고 있다는 게 특징이었다.
게다가 어느 쪽을 목표로 했든 간에 그런 에일의 대담한 모습들을 보며 사람들이 점점 모였고, 이 추세로는 곧 빛의 교단이 일곱 교단 중에서 마이너라고 말하기에도 뭐하게 될 정도였다.
“뭘 그리 재미있게 보고 있어?”
장검을 찬 여성이 사내의 뒤편에서 다가왔다.
무려 230레벨대 유일급 장비인 절명 갑주 세트를 두른 그녀는 사내와 똑같은 길드 마크를 가지고 있었다.
워로드 랭킹 8위의 여검사, 사일러스.
전 세계를 통틀어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최정상의 플레이어.
그녀가 사내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공략은 잘 끝났나 봐? 대뜸 혼자서 고대 던전을 돌파할 거라 하더니… 벌써 끝내고 나올 줄은 몰랐는데.”
“운이 좋았지. 간만에 바깥 공기를 마시니 머리가 다 맑아지는 기분이야.”
사내가 너털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거대 던전을 단신으로 돌파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고, 그조차도 적잖이 고생을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내는 이내 다시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고, 사일러스는 탐탁지 않은 눈빛을 쏘아 보냈다.
“뭘 그렇게 보나 했더니… 또 이 녀석이야? 고작 루키 하나에 너무 관심 가질 필요 없잖아. 무려 아폴리온의 길드장께서 말이지.”
아폴리온 길드.
워로드의 패권을 다투는 6대 길드 중에서도, 가장 선두에 서 있는 거대 길드로 최강이라는 수식어를 입에 담고 있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오히려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의외네. 너 정도라면 보았을 줄 알았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영문 모를 말에 그녀가 물었다.
하지만 사내는 말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하긴, 아직 본인도 자각하지 못한 듯 보이니까.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다면 말이지…….’
화면 속 에일을 응시하는 사내의 입가가 비틀렸다.
뒤늦게 시작한 후발 주자들의 이야기 따위 관심도 없던 그였지만, 이번 경우만큼은 달랐다.
그것도 아주 많이.
* * *
<유저 정보>
이름: 에일
칭호: 이단추적자
세력: 빛의 교단
레벨: 75
직업: 이단심판관
주요 능력치
힘: 160(+100) 민첩: 135(+75) 체력: 135(+65) 마력: 20(+25) 신앙심: 261.0(+25) 광기: 256.8(+25)
패시브
[광적인 순교자(기초)], [증오의 칼날(기초)], [방어 분쇄(유일)], [검술 숙련Ⅶ(유일)], [방어 숙련Ⅶ(유일)]
액티브
[성화(기초)], [형벌 선고(사도)], [이단 지정(사도)], [역극(희귀)], [일섬(영웅)], [불의 세례(영웅)]
‘좋았어.’
상태창을 확인한 에일이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에일은 그간 여신이 내린 이단 사냥 정규 퀘스트를 쉴 새 없이 깨고 다녔다.
델런드를 붙잡아 처형한 이후로, 퀘스트를 클리어하면 곧바로 다음 퀘스트가 나타나 갱신되었기 때문에 중간에 끊길 걱정도 없었다.
다른 표적을 노리는 루의 퀘스트들은 델런드만큼이나 많은 보상을 주지는 않았지만, 이단을 손쉽게 추적해 제거해 내는 에일의 솜씨와 겹쳐져, 일반적인 육성 방법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 에일은 며칠 만에 75레벨을 넘어섰고, 공헌도와 스탯은 물론 한층 효과가 상승한 칭호까지 얻어냈다.
‘나만 퀘스트를 받고 있는 게 아닌 건 아쉽지만…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지.’
여신의 정규 퀘스트가 생성되기 시작한 것은 에일뿐만 아니었다.
빛의 교단 내의 다른 유저들 사이에서도 여신의 퀘스트가 내려졌다는 소식이 돌기 시작했다.
사도인 에일뿐만이 아니라, 모든 신도를 대상으로 주어진 걸 보아 여신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려는 모양.
물론 다른 유저들이 에일만큼 잦은 빈도로 퀘스트를 받지는 못했지만, 루의 영향력이 확보될수록 주어지는 퀘스트들은 더더욱 늘어날 것이었다.
‘다른 신격들이 깨어나기 전에, 최대한 교단을 성장시켜 차이를 벌려 두기 위함이겠지.’
아무래도 루가 활동에 박차를 가한 듯했고, 황혼회의 소탕이 끝이 나면 더욱 활발하게 움직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신격들은 왜 서로 경쟁하려는 거지?’
순간 궁금증이 일은 에일이 생각에 잠겼다.
분명 신격들은 워로드가 게임 속 세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한데 그들은 워로드의 최고신 자리를 차지하기 움직였고, 그를 따르는 신도들 사이에서도 강한 경쟁심이 보였다.
단순한 자존심 싸움일지, 원활한 게임의 진행을 위해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건지, 어쩌면 그들 나름대로 자신들의 세계에 충실하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직접 물어보기엔 왠지 무례한 질문이 될 것 같아 삼갔고, 그사이 목적지에 도착한 에일은 창고의 앞에 섰다.
찰그락!
에일은 경매장에서 수령했던 골드들을 인벤토리에서 꺼내 창고 관리인에게 넘겨 보관했다.
원래 창고에 맡겨 두었던 돈과 델런드의 저택에 있던 금고를 털면서 꽤나 두둑히 얻었던 돈까지 합쳐, 보관액은 어느새 1만 골드를 가볍게 넘어섰다.
거기에 더해 상당량 보유하고 있는 토륨 주괴의 시세도 완만한 속도로 오르는 중이었다.
쓸 만한 옵션을 지닌 보조무기들을 구매하느라, 적지 않은 돈을 썼음에도 타격이 거의 없는 수준.
재정적인 면에 대해선 당분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럼 다음 표적을 잡으러 가 볼까.’
볼일을 마무리 지은 에일이 자리를 옮겼다.
이번 이단 사냥의 타겟은 암시장의 악질 노예 상인이었고, 이번엔 구체적으로 교수형으로 처리하라는 조건까지 붙어 있었다.
이미 구체적인 위치까지 파악하고 온 터라 애를 먹을 일은 없는바.
놈이 활동하는 암시장은 도시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있었다.
에일은 도시를 빠져나가려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규모는 어느 정도 있는 도시였지만, 도시 계획이나 관리는 형편없는 축에 속해 전반적으로 복잡한 길목이 많았다.
‘치안도 좋지 않은 동네라던데… 소매치기 한 번 안 만나나.’
막 게임을 시작할 때만 해도 소매치기 한 번에 난리가 났었지만, 이제 와서는 스탯 덩어리로 인식이 될 정도였다.
전과 달리 손놀림에 속을 걱정도 없었고, 미리부터 보이는 이단의 낙인 덕에 방심할 일도 없었다.
하지만 정작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은 소매치기가 아니었다.
콰과광!
갑자기 낡은 지붕 한쪽이 무너지며 파편이 마구 떨어졌다.
깜짝 놀란 에일은 뒤로 물러나 그를 피했고, 곧 그 사이로 떨어지는 여자를 볼 수 있었다.
콰당!
“크흑…….”
바닥에 부딪힌 여자가 피를 흘리며 꿈틀였다.
추락하며 큰 충격을 받았는지 도통 일어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새하얀 피부에 긴 귀를 지닌 하이 엘프.
“갑자기 무슨……?”
당황한 에일이 서둘러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에스마이어 지역의 하얀 숲에 있어야 할 하이 엘프가 왜 이런 곳에 있는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왕가와의 조약상 영역 밖으로 나오는 게 불가능할 텐데, 아예 솔스티드 지역에 위치한 인간의 도시에까지 나와 있었으니,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때, 무너진 틈 사이로 또 다른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갑자기 나타나 뛰어내린 남자가 쓰러져 있던 여인을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쩌엉!
그 사이를 막아선 에일이 단검과 함께 남자를 튕겨냈다.
생각 이상으로 묵직한 느낌에 에일의 인상이 찌푸려졌고, 곧바로 착지한 남자의 얼굴을 응시했다.
‘이번엔 다크 엘프인가.’
하얗다를 넘어서 병자처럼 창백한 피부와 늘어진 검은 머리, 그 사이로 보이는 기다란 귀까지.
어둠 숲의 다크 엘프가 확실했다.
심지어 녀석의 머리 위에는 선명한 이단의 낙인까지 찍혀 있었다.
‘95레벨?’
정보창을 통해 상대의 레벨을 확인한 에일.
NPC를 상대로는 정보 확인이 안 되는 경우도 많았는데, 녀석의 경우는 제대로 보였다.
“끼어들지 마라, 인간.”
“그건 곤란한데…….”
고개를 돌린 에일이 쓰러져 있는 하이 엘프를 힐끗 바라봤다.
하이 엘프라면 이전에 좋은 관계를 맺어둔 세력이었고, 반대로 다크 엘프는 이번 월드 퀘스트에서 어딘가 구린 의뢰를 유저들에게 맡기던 녀석들이었다.
어느 쪽의 편을 들어야 할지는 뻔한 이야기.
하지만 에일과 다크 엘프의 레벨은 무려 20이나 차이가 났다.
엘프들이라면 기본적으로 인간에 비해 전투력도 뛰어난 편이었고, 대강 살펴보기에도 쉬워 보이는 상대는 아니었다.
이 정도 차이라면 꽤나 큰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굳이 그럴 필요야 없지.’
에일은 재빨리 쓰러져 있던 하이 엘프를 붙잡았다.
그녀를 데리고 도시의 경비대가 있는 쪽으로 달아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에일이 일으켜 세우려 하자, 정작 그녀는 만류하듯이 에일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모습.
‘설마 왕가와의 조약 탓인가?’
경비대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면 다크 엘프뿐만 아니라, 그녀의 신분도 노출이 되는 건 당연한 일.
아무래도 자신의 목숨 이상으로 문제가 커지길 원치 않는 듯 보였다.
스릉!
인상이 구겨진 다크 엘프는 양손에 단검을 꺼내든 채 다가왔고, 한숨을 내쉰 에일은 장검을 들었다.
“해보는 수밖에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