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신념과 광기의 사이 (3)
여신의 명에 따라 이단 사냥을 위해 나선 에일이었지만, 상대는 수도의 요직을 맡고 있는 고위직.
일반적인 대의원급 귀족이라면 상황은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델런드는 뒤에서 굉장히 구린 짓을 벌이고 있는 입장이었다.
의식을 발각되지 않기 위해 같은 황혼회의 신도들을 제외하고선 저택 내에 들이고 있는 호위 NPC가 없었다.
하나 당장 저택 입구를 지키는 경비병만 해도, 지금의 에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만약 경비병들이 들이닥쳐 상황이 꼬이고 오인이 발생한다면, 방문객에 불과한 에일의 입장에서도 복잡해질 수 있는 상황.
“그런데 결계를 쳐 준다니 나야 고맙지.”
에일의 장검에 하얀 성화가 타올랐다.
콰과과광!
날아든 델런드의 기다란 팔이 바닥을 온통 뒤집었고, 그를 피한 에일은 놈의 간격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먹인 일격.
일섬이 놈의 가슴팍을 길게 베었고, 커다란 성화의 불꽃이 붙으며 녀석의 체력을 갉아먹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쩌저저적!
성화가 훑고 지나간 자리에 한기가 도는 서리가 퍼졌다.
피어오른 서리는 녀석의 움직임을 둔화시켰고, 둔화시킨 만큼 에일의 움직임은 더욱 빨라졌다.
새로이 얻은 유일급 장검의 특수 효과.
뿐만 아니라 장검에 붙은 공격력과 부가 스탯, 검술 숙련 패시브까지 합쳐져 일섬 스킬을 더욱 강력하게 만들었다.
현격히 줄어든 델런드의 체력이 보였고, 에일은 빨라진 속도를 이용해 더욱 놈을 몰아쳤다.
녀석의 몸에 상처가 계속해서 늘어났다.
그로 인해 더욱 증가한 서리들이 가득 뒤덮이기 시작했다.
“감히 나에게……!”
분노한 델런드가 바닥을 강하게 내려쳤다.
그러자 바닥에서 솟아난 몬스터들이 모습을 드러넀다.
패턴으로 소환된 몬스터치고 굉장히 커다란 덩치를 지니고 있었고, 하나하나 무시할 수 없는 스펙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새로운 패턴으로 상황을 뒤집기엔 너무 늦어 버렸다.
‘이 정도야 예상하고 있었어!’
신성모독자로 지정된 보스 몬스터가 이대로 호락호락하게 당해 줄 일은 없을 거란 건 눈치채고 있던바.
에일은 이미 놈에게 최대한 많은 상처를 안겨주며 놈의 속도를 최대치까지 흡수해 냈다.
서리가 뒤덮인 델런드의 움직임은 처음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느려졌다.
그에 반해 에일은 그만큼 속도가 가속된 데다가, 흑요석 방어구의 세트 효과까지 겹쳐져 더욱 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지금의 스펙에서 이렇게나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니, 스스로 감탄할 정도였다.
에일은 소환된 몬스터들을 베어 버리며 거침없이 나아갔고, 마지막엔 불의 세례 스킬을 사용해 놈들을 휩쓸었다.
파앗!
몬스터들을 집어삼킨 불꽃 속에서 에일이 도약했고, 당황한 델런드의 머리를 향해 마무리 일격을 날렸다.
콰아아아!
쿠웅!
뻗어져 나간 일섬이 괴물의 머리를 꿰뚫었고, 꼼짝없이 압도당한 델런드는 변신이 풀린 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잡았다.”
“이, 이럴 수가…….”
피범벅이 되어 빈사 상태가 된 델런드.
에일은 제압한 녀석을 꽁꽁 묶어 포박했다.
퀘스트의 내용대로라면 곧바로 놈을 단죄하는 것이 맞았지만, 에일은 그 자리에서 바로 처형식을 거행하지는 않았다.
델런드가 쓰러짐과 동시에 결계가 해제되긴 했으나, 아직 이 모든 사실이 누군가에게 발견된 것은 아니었다.
혹여나 한패였던 자가 수작을 부릴 수도 있는 노릇이었고, 귀족 암살범이 되는 건 사절이었기에 확실하게 처리하는 편이 좋았다.
“용케 아직 살아 있는 녀석들도 있네.”
시선을 돌린 에일이 고통스러운 듯 꿈틀거리는 광신도 몇 명을 보았다.
대부분은 에일의 공격에 당했거나 쓰러진 채 전투에 휘말려 죽었지만, 빈사 상태에 빠져 살아 있는 황혼회의 광신도들도 몇몇이 존재했다.
“마침 잘됐어.”
광신도들도 함께 재갈을 물리고 포박해 버린 에일은 그들을 한구석에 대충 몰아넣어 뒀다.
그러자 델런드의 저택엔 이미 죽은 광신도들의 시체들만이 한가득 쌓여 있게 되었다.
다만, 시체들을 그냥 방치하고 떠나기엔 뭔가 아까웠다.
결계도 사라졌고, 수도의 사람들 또한 경각심을 갖도록 저택에 본보기를 남겨둬야 했다.
“그럼… 작업 좀 해 볼까.”
* * *
“꺄아아악!”
“뭐, 뭐야! 왜 그래!”
한 여자가 저택의 담장을 넘어 허겁지겁 뛰쳐나왔고, 기다리고 있던 그녀의 동료들이 당황해 모여들었다.
조금 전만 해도 그녀는 무려 대의원직을 맡고 있는 귀족의 저택이 거하게 털렸다는 소식을 접하고, 혹시 남은 건 없나 잠깐 둘러보고 온다고 했었다.
현장을 지키고 서 있는 경비들 탓에 마음처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지만, 상당한 고레벨의 도적 클래스인 그녀이기에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아무것도 없이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 그게… 거기 안에 들어가 봤는데… 우으윽…….”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여자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대체 안에서 무엇을 본 건지, 속이 심하게 메스꺼운 듯한 기색이었다.
“미안, 나 잠깐 나갔다 올게…….”
그녀는 곧바로 접속을 종료했고, 덩그러니 남게 된 파티원들은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원래부터 비위가 약한 편이긴 했어도, 고작 시체 몇 구 정도로 호들갑을 떨 정도는 아니었다.
그들이 당혹감을 느끼던 그때, 뒤편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거리의 사람들이 호들갑을 떨며 어딘가로 우르르 이동하고 있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야?”
“가 보자.”
사람들을 쫓아간 그들은 굉장히 많은 인파가 몰려 있는 수도 중앙 광장에 도착했다.
원래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곳이긴 했지만, 지금은 무슨 일이라도 터진 듯이 유별날 정도로 많았다.
“왜 갑자기 이렇게 많이 모인 거지?”
“저… 저기 봐!”
동료의 손가락이 한 곳을 가리켰고, 그들의 시선이 돌아갔다.
광장 중앙에 마련되어 있는 처형대.
그 양옆에는 커다란 작살 위에 몸을 관통해 꽂은 시체들이 주르륵 전시되어 있었고, 교수대에 목이 매달린 자들도 숨이 끊긴 채 축 늘어져 있었다.
아직 살아 있는 이들도 마찬가지.
그 뒤에 서 있는 죄인들은 줄줄이 참수되어 머리가 효시되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끔찍한 광경에 절로 파티원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윽… 토할 거 같아.”
“미친놈들 아니야, 저거!”
아니나 다를까 범인은 악명 높은 빛의 교단이었다.
요즘 들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이야기가 많아지더니, 기어코 수도에서도 일을 저지른 모양이었다.
“그런데 저 자식들이 왜 광장 한복판에 와서 처형을…….”
“잠깐, 저건!”
처형대 한편에 올라서 있는 남자.
최근 화제가 되었던 에스마이어의 미친 이단심판관, 에일이었다.
‘많이도 모였네.’
사제의 옆에 선 에일이 사람들을 슬쩍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그가 이 자리에 서 있는 건 당연했다.
죄인들을 붙잡은 장본인임은 물론, 지금 수도 한복판에서 이루어지는 광신도 처형식 자체가 에일이 빛의 교단 사제들의 도움을 받아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아스칼론엔 일곱 교단의 신전이 모두 예외 없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터엉!
그사이 참수가 모두 끝나고, 이제 목숨이 붙어있는 이는 한 명뿐.
에일이 마지막 죄인을 데리고 앞으로 나섰다.
입에 재갈이 물린 채, 질질 끌려오는 델런드가 버둥거리며 딸려왔다.
“뭐? 귀족이잖아?”
“대의회의 일원이 어째서?”
그들에게 질질 끌려온 이가 대의원 델런드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사람들 급격히 술렁이기 시작했다.
앞서 악마 숭배자들의 처형이라고 들었는데, 저런 거물이 등장할 줄은 당연히 예상하지 못했었다.
“건방지긴…….”
몰린 인파 중에선 수도의 귀족들도 섞여 있었다.
감히 광신도들이 귀족에게 손을 대다니 당연히 거슬릴 것이었고, 에일은 자신을 향한 따끔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그게 전부.
당연하게도 악마 숭배는 왕국 내에서도 굉장히 큰 죄였기 때문에, 대의원을 붙잡아 끌고 오는 동안에도 왕가의 제지를 받지 않을 수 있었다.
하물며 그런 상황에 다른 귀족이 불쾌하다는 이유로 나설 수는 없었다.
오히려 이 자리에서 함부로 나섰다가는 같은 악마추종자로 의심을 받기에 딱 좋았고, 루의 광신도들에게 집요한 추적을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몸을 사려야 했다.
그렇게 여러 시선을 덤덤히 받아넘기며, 모두의 앞에 선 에일은 사슬을 움직여 델런드를 살벌한 모양새의 화형대에 묶었다.
“네놈! 이러고도 무사할 줄……!”
입을 막고 있던 재갈을 풀리자 델런드가 노성을 토해 내려 했다.
하지만 그가 미처 말을 다 내뱉기도 전에, 에일은 십자가 아래에 성화를 놓았다.
화르르르륵!
“끄아아아악!”
순식간에 거세게 타오르는 불꽃이 그를 집어삼켰다.
격한 비명이 울려 퍼졌고, 지켜보고 있던 이들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러운 통증이 작열통이었으니, 실제 고통을 느끼는 NPC 입장에서는 끔찍할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빛의 교단 사제들이 치유 마법을 쏟아부어 그의 체력을 회복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찬란한 치유의 빛에 상처가 회복되며 새살이 돋아났고, 재생된 살점은 다시금 새까맣게 타들어 가길 반복했다.
그간 무고한 이들을 수도 없이 희생시킨 죄를 묻기 위함이자, 수도의 모든 이들에게 건네는 경고의 의미이기도 했다.
어느새 검은 연기가 높이 차오른 광장엔 고통에 찬 비명이 끝없이 울려 퍼졌다.
* * *
[교단의 적, 신성모독자를 처단하였습니다!]
[‘형벌 선고’에 따라 지정된 형벌을 성공적으로 집행하였습니다. 스킬의 효과로 스탯 보너스가 두 배로 늘어납니다.]
[여신의 총애 +1.59% (현재 80.14%)]
[빛의 교단 공헌도 +900]
[신앙심 스탯 +20]
[광기 스탯 +20]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여신의 총애 +2.00% (현재 82.14%)]
[빛의 교단 공헌도 +1200]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이것으로 완전히 돌아서 버렸군.’
마지막 비명을 내뱉은 델런드를 뒤로 한 채, 자리에서 빠져나온 에일이 인파속으로 흘러들어갔다.
후드를 뒤집어써 처형에 정신이 팔린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이번 퀘스트를 수행하면서 굉장히 많은 보상을 받기는 했지만, 오른 왕자와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공주 측에 서기로 방향을 정한 시점에서 이미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델런드가 황혼회의 독실한 신자라는 사실을 왕자도 몰랐을 리는 없을 테고, 금지된 마법이든 악마숭배자든 힘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손을 내민 듯 보였다.
어차피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적대할 수밖에 없는 녀석이었다는 뜻.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거리낄 것 없었다.
“이것으로 대의회의 좌석 한 자리가 비워졌군요. 정말 기대 이상이에요.”
어느새 인파 속에서 바로 옆까지 다가온 여성.
눌러쓴 후드 아래로 푸른 머리카락과 함께 아름다운 얼굴이 비쳐 보였다.
“공주님……?”
왕가의 세이아 공주가 에일의 옆에 서 있었고, 심지어 이번엔 옆에 붙은 호위도 없이 나타나 있었다.
“그러다가 암살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후후, 저에 대해 걱정해 주실 필요는 없답니다.”
화형대를 바라보는 세이아의 눈동자에 타오르는 불꽃이 건너 비췄다.
“하얀 불꽃이 아름답네요. 솔직히 빛의 교리는 여러모로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이렇게 보니 생각이 바뀔 것도 같아요.”
처참히 불타 버린 사람의 흔적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그녀는 들뜬 기분을 보이며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야 왕자측 귀족의 목이 날아간 덕이겠지.’
왕자를 지지하던 델런드가 죽음으로서 대의회의 계승 결정은 그녀에게 한발 더 유리해진 상황이었다.
공주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두 팔 벌려 반길 만한 소식.
“저도 아직 많이 부족하네요. 이렇듯 빛의 신을 내세… 아니, 따르기에 가능한 일이 있었다는 걸 몰랐다니. 에일 님, 앞으로도 계속 심판관으로서의 역할을 다해 주시길 부탁드려도 되겠죠?”
자신을 위해 움직여 달라는 뜻.
에일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약속하셨던 부분만 지켜 주신다면야…….”
“그 이상이라도 얼마든지요. 전 주고받는 건 확실한 편이거든요. 무엇보다, 여신의 벌을 받고 싶지는 않아서 말이죠.”
세이아가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