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신념과 광기의 사이
성역의 정화가 끝나고 바깥으로 빠져나온 에일은 퀘스트를 함께 했던 리아에게 지난 세 번의 운반 위치를 모두 전해 들었다.
아이템 운반이 이루어진 곳들 모두 성역을 오염시키고 있다거나 다른 음모를 꾸미고 있을 확률이 높았기 때문에, 당연히 알아내야 할 정보였다.
그렇게 해서 얻어낸 세 곳의 정보.
하지만 그 세 군데의 위치는 모두 에일이 발을 들이기 어려운 고레벨 사냥터에 위치해 있었다.
운반을 맡은 리아의 전 파티도 안전한 길을 찾아갈 수 있었던 만큼, 에일도 몬스터들을 뚫고 성역까지 가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도착한다 한들, 지금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레벨대의 몬스터들이 포진해 있을 것이었다.
방금 정도의 난이도라면 어떤 꼼수를 쓴다 해도 에일이 클리어하기엔 무리였고, 많은 이가 얽힌 대형 월드 퀘스트인 만큼, 이런 유의 정보는 망설일 것 없이 넘기는 편이 옳았다.
에일은 그렇게 음모가 꾸며지고 있는 세 곳의 위치를 곧바로 공주 측에 전달했고, 놈들이 고대 정령들의 성역을 오염시키려 했다는 사실 또한 알렸다.
이는 굉장히 중요한 정보였다.
베일에 감싸여 있던 놈들의 의도를 가장 먼저 파악한 것이자, 동시에 다른 위치들까지 전달하며 실마리를 제공했다.
월드 퀘스트에 참여 중일 다른 고레벨 플레이어들의 손으로 넘긴 것이긴 했지만, 이미 이것만으로도 굉장히 큰 공로를 세운 것이나 다름없었고, 공주 측에게 큰 보상을 얻을 수 있었다.
왕궁 서고에서 꺼내어진 4권의 검은빛 스킬북.
그것도 무려 찬란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최상위급 스킬북들이었다.
빈 스킬창이 두 개나 존재했던 에일에게는 이만한 보상이 따로 없었고, 그 4권의 스킬북을 모두 사용해 강력한 스킬들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검술 숙련Ⅶ(유일)]
검술 숙련, 도검류 무기를 사용할 시 공격력과 무기 숙련도에 보정을 주는 기본적인 스킬이었다.
검을 사용하는 직업군이라면 필수적인 패시브였고, 대부분이 얻지 못하는 일 없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스킬이기도 했다.
하지만 에일이 이번에 얻게 된 것은 조금 달랐다.
무려 유일 등급의 스킬.
기초적인 숙련류 패시브들은 대부분이 스킬 등급에 따라 최하급인 Ⅰ부터 시작해 전설 등급인 Ⅷ까지 나뉘었다.
그리고 에일은 그중 7단계에 달하는 검술 숙련Ⅶ이었다.
같은 검술 숙련이라도 낮은 단계의 숙련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높은 수치를 상승시켜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방어 숙련Ⅶ(유일)]
방어력과 마법 방어력, 체력까지 내구에 관련되어 골고루 보정을 주는 방어숙련 패시브.
그것 역시 유일 등급으로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찬란한 수식어까지 붙은 검은빛 스킬북을 4개나 써 버리긴 했지만,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야.’
가장 기초적인 스킬이었으나, 오히려 그렇기에 가장 좋은 스킬이었다.
시기의 차이는 있더라도 결국엔 모두가 필수적으로 챙겨가야 하는 만큼, 좋은 효율의 패시브였다는 뜻이었으니.
그리고 에일은 그런 스킬을 유일 등급으로 장만하게 되었다.
이는 단순히 유일 등급 패시브 2개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확보해 둬야 하는 패시브들이었는데, 어중간하게 상급이나 희귀 등급 정도로 시작했다면 나중에 스킬을 다시 덮어씌워야 할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에일은 곧바로 최종 등급이나 다름없는 유일 등급으로 이 두 패시브를 마련하게 되었고, 그런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무기도 바뀌었고, 스킬 체감은 어떨지 시험 좀 해 보고 싶은데…….’
언덕 위에 올라가 있던 에일이 주변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스킬을 얻은 뒤 곧바로 근처의 사냥터에 들른 그는 미리 사냥 계획을 짜 두기 위해 높은 지형에 올라선 것이었다.
먼저 지형을 파악하고 일반 몬스터들의 배치나, 필드 보스 혹은 엘리트 몬스터가 나타나지는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막상 주변을 살피기 시작한 에일의 시선은 몬스터가 아니라 유저들에게로 향했다.
“갑자기 저기서 뭘 하는 거지……?”
양쪽에서 몰려든 두 무리의 유저들.
아무래도 유저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난 것이 보였다.
많은 사람이 몰리는 사냥터에서 유저들 간에 분쟁이 발생하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고, 오히려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에일의 시선을 더욱 사로잡는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한쪽에서 불타고 있는 커다란 십자가.
‘저건 아무리 봐도…….’
완전히 새까맣게 타들어 가 정확히 확인은 되지 않았지만, 십자가에 묶여 있는 사람의 시체 형체가 어렴풋이나마 보였다.
두말할 여지 없이 화형의 흔적.
다른 이도 아니고 에일이 그걸 구별 못 할 리는 없었다.
적잖이 당황한 에일은 서둘러 몸을 숨긴 채 그들에게로 접근했다.
양쪽에서 대치하고 있는 여섯 명의 파티와 세 명의 유저.
“이 개자식들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분노한 파티원이 마주한 남자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곧장 팔을 쳐내며 그를 떨쳐낸 남자는 태연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네놈들의 파티에 이단이 섞여 있었다. 정화의 불꽃 속에서 참회의 시간을 가졌지. 지금쯤 여신의 곁에서 죄를 뉘우치고 있을 거다.”
“뭐, 뭐야?”
“이런 미친 자식들이……!”
충격을 받은 파티원들이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설마 했었는데 정말 저 십자가에 묶여 타 버린 이가 자신들의 동료였던 것이었다.
파티 사냥 중 휴식을 취하며 잠시 떨어져 있던 사이에 이런 참사가 발생해 버렸고, 동료는 원래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새까맣게 불타 버렸다.
하지만 가장 황당한 건 몸을 숨긴 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에일이었다.
‘아니, 요즘 따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고 듣기는 했지만 이건 무슨…….’
원래 모든 유행이 그렇듯이, 한 번 시작되면 여기저기서 따라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마련이었다.
정신 나간 광신도와 죄인의 화형이란 게임이 무감각해졌을 많은 이에게 구미가 당길 만한 자극적인 소재였고, 그것도 세계 점유율을 모조리 해치운 워로드에서 일어난 이슈였으니, 얼마나 많은 이가 따라 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당장 워튜브에서만 해도 에일을 따라 한 콘텐츠의 영상들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빛의 교단 입문자들도 대폭 늘어났다.
하지만 설마 이렇게 직접 마주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그런 죄인을 옆에 두고 있다는 것만으로 참수해야 마땅하나, 여신님의 자비가 네놈들을 살렸다. 평생을 감사하며 살아가도록.”
“잠깐, 혹시 너희 중 빛의 교단에 관심 있는 자는 없나?”
‘세상에…….’
눈을 질끈 감은 에일이 이마를 감싸 쥐었다.
아니나 다를까 신도들은 분노한 파티원들을 상대로 정신 나간 소리들을 해댔다.
“이 XX! 미친 자식들 그냥 죽여 버려!”
“곱게 죽을 생각은 하지 마라!”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파티원들은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었다.
같은 파티의 동료가 끔찍하게 살해되었으니 당연히 복수를 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반응에 오히려 신도들은 더욱 분노했다.
“감히 정당한 집행을 방해하려는 것이냐?”
“이단자의 동료들답군! 모조리 여신의 곁으로 보내 주마!”
“화형! 화형! 화형이다!”
서로 무기를 뽑아 든 일촉즉발의 상황.
[‘빛의 심판자, 루’가 그들의 진정한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들의 숭고한 뜻은 후세에 길이 남게 될 것입니다.]
“하, 미치겠네…….”
저건 용기가 아니라 미친 짓이었다.
여섯이나 되는 파티원을 상대로 신도들은 고작 세 명뿐이었고, 레벨이나 스펙도 큰 차이가 없었다.
이대로 싸웠다간 당연히 승산이 없는 상황.
하지만 그럼에도 신도들은 오히려 더욱 전투적으로 무기를 들이밀었다.
“다 죽여 버려!”
“심판의 시간이다!”
카가가각!
격돌한 양측의 유저들.
검과 검이 부딪치고, 불꽃이 튀며 난장판이 벌어졌다.
누가 봐도 불리한 상황임에도 신도들은 정말 죽음이 두렵지 않은 듯 달려들었고, 파티원들은 순간 광기 어린 전투에 당황하며 밀려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그것만으로 두 배나 되는 숫자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하, 어쩔 수 없지…….’
신도들이 상처 입기 시작하자, 몸을 숨기고 있던 에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같은 신도인데 전멸당하도록 내버려 둘 수야 없었다.
무엇보다 여기서 개입하는 편이 여신에게 점수를 따 두기 좋아 보였고.
촤아악!
“크억……!”
넘어진 신도를 노리던 파티원이 단번에 나가떨어졌다.
순식간에 그들을 향해 뛰쳐나온 에일의 장검에 당한 것이었다.
“이, 이 자식이!”
난데없는 불청객의 등장에 파티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향했고, 안 그래도 분노한 상태인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에일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미 이단의 낙인이 찍혀 지정당한 이상, 검에 당하는 건 오롯이 그들의 몫이었다.
파앗!
단번에 역극 스킬로 뒤를 돈 에일이 남자의 가슴팍을 꿰뚫었고, 뒤를 노리는 다른 파티원의 창을 비껴내며 흘렸다.
적의 창을 움켜쥔 에일은 단박에 거리를 좁혀 그에게 일섬을 먹였다.
콰과과과!
단단한 중갑을 둘렀던 창기사 클래스조차도 버틸 수 없는 일격.
기사는 힘을 잃고 기우뚱 쓰러지려 했고, 에일은 그를 붙잡아 옆에서 발사된 화살을 대신 맞게 했다.
“잠…….”
빠악!
궁수에게 도약한 에일은 얼굴에 주먹 한 방을 먹인 뒤, 단번에 그녀의 다리를 베어 버렸다.
순식간에 쓰러져 버린 네 명의 유저.
믿기 힘든 광경을 봐 버린 두 파티원은 주춤주춤 물러나며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그를 에일이 놓아줄 리 없었다.
화르르륵!
“으아아악!”
광역기인 불의 세례가 그들을 휩쓸었고, 두 유저는 하얀 불꽃에 먹혀 바닥을 맞이해야만 했다.
털썩!
정확히 빈사 상태가 된 채 쓰러진 여섯의 유저.
에일은 새로 얻은 무기와 스킬에 만족한 채 장검을 거두었고, 그 광경을 바로 앞에서 목격해 버린 신도들은 입을 쩍 하고 벌렸다.
“에… 에일 님……?”
“말도 안 돼!”
그의 얼굴을 곧바로 알아본 신도들, 사실 그야 당연했다.
에일이라면 무려 로덴을 눌렀던 화제의 인물이자, 그들이 빛의 교단에 들어온 직접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한데 그런 에일을 직접 코앞에서 보게 되다니. 흥분을 가라앉힐 수 있을 리 없었다.
“우아아악!”
“자, 잠깐, 다들 진정하세요!”
에일이 달려드는 신도들을 겨우겨우 떼어내며 진정시켰다.
“죄… 죄송합니다. 너무 흥분해서 그만.”
“오오, 에일 님이 나타나 위기에 처했던 저희를 구해 주시다니! 이 또한 여신님의 뜻이겠지요!”
신도들이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그들에겐 여신의 메시지가 닿지도 않을 텐데, 정말 착실히 컨셉을 이어가는 유저들이었다.
하긴 애초에 그러려고 말도 많은 빛의 교단에 들어온 것일 테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에일 님! 여기 이 녀석들은 어떻게 할까요?”
신도 중 한 명이 파티원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자 빈사 상태로 쓰러져 있던 파티원들은 움찔하며 겁에 질린 얼굴을 들어 보였다.
“사… 살려 줘. 분명 너희가 먼저……!”
“닥쳐라, 이단!”
“에일 님이 결정하시죠.”
“모조리 목을 매달아 버릴까요?”
신도들이 무한한 신뢰의 눈빛을 보내왔고, 조금은 난처함을 느낀 에일이 고민에 빠졌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근처에서 사냥하던 주변 유저들의 시선까지 한껏 쏠린 상황.
그들 중 대부분이 동정 섞인 눈빛이었지만, 무시무시한 에일까지 자리에 있는 이상 감히 도와줄 생각 같은 건 떠올릴 수 없었다.
‘복잡하게 생각할 건 없나.’
잠시 고민하던 에일은 간단하게 답을 정했다.
드드드득!
죄인을 태울 화형대들이 솟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