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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이단심판관-111화 (111/227)

111화 사냥의 진수 (4)

왕가의 공주, 세이아.

워로드에서도 손꼽힐 만큼 절세미인으로 유명한 그녀는 화면 너머로 보기보다는 직접 실물로 봐야 그 미모를 제대로 알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정말 이야기로 들었던 것만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아주 상냥한 인상의 미녀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신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그녀는 에일과 뚜렷이 눈을 맞추며 서 있었다.

물론 에일의 경우 게임을 시작한 뒤 루의 모습을 가장 먼저 봐 버려서 그런지 큰 감흥까진 없었다.

다만, 그녀만 한 위치의 인물이 고작 호위 한 명만을 대동한 채 이렇게 직접 찾아왔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놀라웠다.

“수도에 계셔야 할 분이 이런 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먼저 다소 무례한 발걸음이었다는 점은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급히 에일 님을 찾아와야 할 사정이 있었어요. 혹시 저희 왕궁의 상황에 대해선 알고 계시나요?”

“그야 물론입니다.”

자신의 이름까지 알고서 찾아왔다는 것에 놀랐지만, 에일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겉보기엔 평화로워 보이는 왕궁이었지만, 정작 내부의 상황은 바쁘게 흘러가고 있었다.

왕이 병에 걸려 의식을 잃은 지 오래인 탓에 왕위가 줄곧 비어 있던 것이다.

하나 상황이 지나도록 왕의 회복 가능성은 없었고, 결국 지금에서 와서는 왕위 계승을 위한 절차가 복잡하게 진행 중이었다.

“분명 다시 깨어나실 수 있을 겁니다.”

“아니요. 아버님께서는 얼마 버티지 못하실 거예요. 지금 같은 상태로는 올해를 넘기는 것조차 무리겠죠.”

세이아가 냉소적인 표정을 띠며 말했다.

친아버지가 죽어 가는데 저런 반응이라니, 놀란 에일의 표정을 본 듯 그녀가 말을 덧붙였다.

“저의 바람과 다르게, 정치는 현실이니까요.”

‘…괜히 길드장들이 공주 쪽에 힘을 실은 게 아니었군.’

그녀의 태연한 모습에 에일이 생각했다.

현재 계승권을 가질 수 있는 왕의 자손은 첫째인 오른 왕자와 둘째인 세이아 공주, 단 두 명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장남인 오른 왕자에게 자연스럽게 왕위가 가며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워로드 내 왕가의 독특한 계승 방식 탓이었다.

성별과 나이에 따라 따로 계승 순위가 나뉘어 있는 게 아니라, 왕의 뜻과 의회의 결정에 따라 적법한 계승이 이루어진다는 것.

언제나 가장 현명한 왕을 내세운다는 명목하에 이루어지고 있었고, 그에 관한 관습은 절대적이었다.

다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불상사로 인해 왕이 어떠한 의견도 낼 수 없었고, 이제 남은 건 대의회의 결정뿐이었다.

기본적으로 대의회는 대부분의 인원이 영향력 있는 왕국의 관리와 귀족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플레이어의 입장에서도 참가할 방법은 있었다.

왕국 내 거점 혹은 영지를 가지고 있는 길드의 대표자일 경우, 적은 지분이나마 의회에 참석이 가능했던 것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말 그대로 아주 적은 지분일 뿐이었고, 큰 의미를 가질 정도는 되지 못했다.

하지만 여러 지역을 통째로 집어삼킨 채 관리하고 있는 6대 길드 정도가 된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

왕국 전역의 수많은 영지를 실질적으로 관리하고 있으니, 유저 세력이라 해도 결정에 미치는 입김이 상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6대 길드들이 만장일치로 택한 쪽이 바로 세이아 공주 측이었다.

오른 왕자가 권위주의적이고 고집이 강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면, 보다 현실적이고 말이 잘 통하는 그녀에게 길드장들이 힘을 실어 준 것이다.

‘그게 영향이 컸지.’

왕자와 공주의 세력이야 귀족들 사이에서는 반으로 갈려 나뉘던 상황이었고, 이번 6대 길드의 선택 탓에 공주 쪽으로 급격히 기울어 버린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설마 이번 월드 퀘스트가 계승 문제와 관련이 있는 건가……?’

갑자기 이야기가 이런 쪽으로 흐르자 에일이 추측했다.

왕가의 계승 문제야 이전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아 왔던 부분이었고, 만약 정말 관련이 되어 있는 거라면 에일의 당초 예상보다도 훨씬 더 일이 커지게 되는 셈이었다.

“대의회의 최종 결정까지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어요. 지금이야 제가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지만, 오른이라면 분명 그를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을 거예요.”

세이아가 말하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였다.

그녀의 손 위에 올려진 것은 오른 왕자의 서명이 담긴 왕가의 인장이었다.

“그건……?”

용꼬리 숲에서 얻었던 인장과 완벽히 같은 물건이었고, 에일도 인벤토리에서 인장을 꺼내 들었다.

“역시 가지고 계셨군요. 최근 들어 금지된 마법에 손을 댄 이단마법사들이 조직적인 활동을 시작했어요. 그리고 곳곳에서 발견된 흔적이 바로 이것이죠. 물론 이것만으로는 아무런 물증이 되지 못할 거예요. 이런 인장을 몇백 개를 모은다 한들 위조라고 잡아떼면 될 문제고, 오히려 계승을 위해 거짓 소문을 퍼트리며 수작을 부린다고 주장할 테니까요. 하지만 그들의 배후에 오른이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해요.”

‘이런 거였나……. 블러디 핸즈에서도 함부로 나서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군.’

무려 왕가의 세력 다툼이 벌어지고 있는 월드 퀘스트.

아무리 세력을 떨친다 한들 뒷골목을 누비는 도적 세력이 손쉽게 가담할 수 있는 판이 아니었다.

혹여나 줄을 잘못 선택했다간 그대로 조직 전체가 공중분해 당할 수 있었다.

결사단이 갑자기 전면으로 나선 것도 왕위를 물려받을지 모르는 왕자의 비호가 있던 탓이었을 테고, 아마 이번 퀘스트는 여태껏 일어난 워로드의 모든 월드 퀘스트 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규모가 될 것이다.

“혹시 그들이 무슨 꿍꿍이를 벌이는지 아십니까?”

“아니요. 그들의 일원을 붙잡기도 했지만, 결국엔 알 수 없더군요.”

에일의 물음에 세이아는 고개를 저었다.

오른 왕자가 결사단까지 끌어들이며 어떤 일을 꾸미는지는 아직 공주 측에서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결사단원을 붙잡은 적은 있으나 탄압받던 지난 세월에 독기를 품었는지, 회유는 물론 아무리 심한 고문도 무용지물이었다.

워낙 지독한 자들이라 무슨 일이 일어나건 절대 정보를 내뱉지 않았다.

“한데 그자들이 갑자기 빛의 교단과 충돌을 벌였더군요. 에일 님께서 빛의 교단을 대표해 그들을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전해 들었고요.”

“그건 어떻게…….”

“저희도 듣는 귀 정도는 마련해 두고 있으니까요.”

세이아가 간단하게 답했다.

순간 무의식적으로 묻긴 했지만, 에일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왕국의 둘뿐인 직계 왕족이니, 당연히 누구보다도 많은 정보를 손에 쥐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무려 왕가의 공주가 자신 앞에 직접 찾아온 이유도 이해되었다.

빛의 교단이라면 왕가조차도 쉽게 생각할 수 없는 강력한 집단이었고, 이번 사건에 한해서만큼은 그를 대표하고 있는 게 에일이었다.

지금 같은 시점에 위험을 감수하고 호위 하나만 대동한 채 찾아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런 때이기에 더욱 움직여야 했을 것이다.

“같은 왕궁 내부의 인물을 움직이는 데에는 한계가 있고, 수도 바깥의 힘이 최대한 필요할 때예요. 저를 위해 움직여 줄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뜻이죠.”

“왕위를 반드시 원하시는 겁니까?”

“저는 야망 있는 사람을 좋아해요. 욕심 없는 사람을 믿지도 않고요. 무슨 생각을 할지도 모르는 사람을 곁에 둘 수는 없죠. 만약 자리를 얻어내는 데 협력해 주신다면, 왕국 내 교단의 입지를 이전과 완전히 달라지도록 변화시킬 수 있을 거예요.”

세이아가 은은한 미소를 띠며 말해 왔고, 에일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만약 이번 퀘스트에서 적극적으로 움직여 충분히 공헌해 그녀를 왕위에 올린다면, 공로를 인정받아 빛의 교단의 위치를 다른 여섯 교단과 다르게 뒤바꿀 수 있다는 것이었다.

더할 나위 없는 달콤한 제안이었다.

왕국의 공식적인 지지를 받은 교단이라면 차별성이 부여되었고, 세력 확장의 가능성에 대해선 말할 것도 없었다.

여신인 루가 직접적으로 얻는 영향력 또한 막대한 영향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에일 개인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

공주에게서 받을 퀘스트 보상을 제외하고도, 교단 내에서 압도적인 입지와 공헌도를 쌓을 기회이기도 했다.

하지만 워로드가 늘 그렇듯, 퀘스트에 좋은 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 퀘스트의 결과가 반대로 왕자 측의 승리로 마무리된다면, 에일 역시 숙청 대상이 될 것이다.

아니, 단순히 그런 것을 넘어 그가 속한 빛의 교단 전체가 큰 타격을 받은 채 이전과 같은 모습을 되찾지 못하고 몰락해 버릴 수도 있었다.

성공 시 주어질 보상이 막대했지만, 리스크 또한 분명하다는 것.

‘이걸 어쩐다…….’

에일이 눈앞에 놓인 거대한 선택지 앞에 갈등했다.

뜬금없이 이런 일의 결정권자가 되다니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머뭇거리고 있는 에일의 앞에 떠오른 메시지.

[‘빛의 심판자, 루’가 당신에게 무얼 망설이냐고 묻습니다.]

‘그래… 뭘 망설인 거지?’

단지 자신뿐만이 아니라 교단과 루의 미래까지 걸려 있던 문제였기에 더 머뭇거렸을지도 몰랐다.

하나 그녀의 말이 떨어진 지금.

에일은 바보 같은 망설임을 훌훌 날려 버렸다.

* * *

끄아아악!

고통에 찬 죄수의 비명이 울려 퍼졌고, 피를 머금은 불길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언제나처럼 단죄가 이루어지고 있는 교단의 이단심문소.

“역시 소문으로 듣던 만큼 살벌하구나.”

가면이 벗겨진 대처가 즐거이 웃음을 흘렸다.

팔다리가 묶인 채 결박당한 그는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도 겁먹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앞에 다가온 굳은 표정의 이단심판관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그래서 이제 날 어쩔 생각이지?”

“질문을 던질 테니, 네가 알고 있는 모든 걸 털어놓으면 된다.”

“나처럼 살만큼 산 늙은이에게 목숨이라도 구걸하라는 건가?”

“아니, 죽음을 구걸하게 될 거다.”

“죽음을 구걸해? 하!”

대처는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음을 머금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그가 금지된 마법에 깊숙이 발을 들인 뒤, 이따위 심문 같은 건 한두 번 겪어 본 일이 아니었다.

손톱을 뽑고, 채찍질하며, 정신을 잃으면 끌고 나간다.

죽음을 선사하지 못하기에 이루어지는 장난질이었고, 온갖 풍파를 겪어온 대처에겐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한쪽 입꼬리가 미처 다 올라가기도 전.

푸슈욱!

붉은 핏줄기가 솟구쳤고, 대처의 표정이 고통과 경악으로 뒤덮였다.

순식간에 검을 뽑아든 이단심판관이 곧바로 대처의 목을 절반이 넘게 깊숙이 도려낸 것이다.

고문이 목적이라면 이루어져서는 안 될 행위.

죽음이 다가온 대처의 의식이 서서히 멀어졌다.

하지만 그 순간.

“크허억……?”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다.

목이 도려내졌던 대처의 숨이 붙은 채, 다시 눈을 뜨게 된 것이다.

마치 떠나가려던 의식이 강제로 사로잡힌 듯 돌아왔고, 곧 자신이 고위 신성마법으로 치유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건져진 방금의 감각, 그리고 강렬한 고통에 대처의 몸이 덜덜 떨려왔다.

“심문을 시작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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